주마퇴치/은종삼
2014.04.08 06:44
주마퇴치(酒魔退治)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은 종 삼
“참 좋은데 이렇게 좋은 걸!”
심신이 쾌활하다. 아, 이게 바로 지혜라는 거구나! 지혜란 결코 성인이나 고매한 철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누구나 잠재된 행복을 만들어가는 재주다. 나는 행복을 만들었다. ‘주마퇴치’를 한 지 5년차 소감이다.
‘주마퇴치’란 술(酒)마귀(魔)를 물리쳐(退) 버리다(治)라는 뜻으로 내가 만든 사자성어다. 문맹퇴치(文盲退治)라는 말에서 따왔다. 나는 문맹퇴치라는 말을 좋아한다. 일제강점기 시대 민족차별교육과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문맹률이 80%나 되었다. 거의 까막눈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20년대 후반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언론사와 조선어학회가 중심이 되어 농촌계몽운동과 함께 일기 시작한 문맹퇴치운동은 1960년대까지도 야학으로 이어졌었다. 군대에서도 장병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정도였다. 실로 8ㆍ15 광복 후 문맹퇴치가 시대적 국가적 대과업이었다. 그 결과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문맹률을 자랑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국가적 사회적 행복은 문맹퇴치의 덕분이기도 하다.
흔히 문인들은 술을 좋아한다고 한다. 어느 유명 시인은 “날씨야, 아무리 추워봐라, 옷 사 입나 술 사먹지.” 이런 시를 술 홍보 관련 기관에 붙여놓았다. 어떤 음식점에는 “술은 내 친구”라는 글 액자가 벽을 장식하고 있는 걸 보았다. 참으로 명시요 명문들이다. 예로부터 술타령 글들은 문학의 옷을 입고 버젓이 명작으로 회자(膾炙)되어 왔다. 당나라 때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이태백(李太白)은 음주시를 많이 남겼다. 그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장진주(將進酒)는 “돈 적다 걱정 말라, 빼어난 말(馬)과 천금 모피 옷(裘)이 아까울 것 없다. 술과 바꾸어 그대와 함께 마시자” 고 했다. 말과 옷을 술과 바꾸어 오라니 참으로 한심한 친구 아닌가. 오죽하면 주태백(酒太白)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랴. 그럼에도 이런 시가 명작이란다. 이후 문인들은 음풍농월을 즐기면서 술을 예찬하는 글들을 무수히 남겼다. 변영로 시인은 <명정(酩酊)40년>이라는 술주정뱅이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기도 했다. 이런 연유일까. 술과 글은 마치 단짝처럼 여기는 그릇된 풍조가 문학계에 만연되었다.
나는 한창 공부하고 일할 나이에는 술을 마시지 못했다. 생활비도 버겁고 시간도 없고 무엇보다도 술맛을 몰랐다. 회식 때 건배하고 몇 잔 술잔을 주고받았지만 술이 별로 좋은 줄 몰랐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사회적인 지위도 얻고 안정된 생활이 되자 술자리가 잦아지고 그걸 즐기게 되었다. 술맛도 알게 되었다. 퇴직하고 사회에 나오니 홀가분한 기분에 어디나 어울려 술을 자주 마셨다. 급기야 내 손으로 막걸리 소주병을 사들고 귀가 하는 습관마저 길들여졌다. 그런데 내 몸꼴이 점차 추악해져가는 것이었다. 몇 발짝 계단을 오르는데도 힘이 부쳤다. 동네 병원에 갔더니 대학병원에 입원하라고 소견서를 써 주는 것이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내 인생 지금부터가 자유롭게 나의 참모습을 들어내며 그간 돌보지 못했던 개인적 사회적 은혜에 보답하며 살 수 있는데, 내 스스로 내 몸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 흐트러진 나를 추스르기 위해서 산사에 들어가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살생, 도둑질, 사음(邪淫), 거짓말 하지 말고 술을 마시지 말 것’ 불자(佛子)들의 오계(五戒)를 되찾았다. 계율만 지킨다면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 될 것 같았다. 다 지키기 어려울지라도 ‘술 마시지 않는 것만’은 확실히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단호하게 술을 퇴치시켰다. 결코 술값이나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온전한 내 정신으로 나답게 살자는 각오다. 행복한 삶이란 온전한 내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술잔을 입에 대는 순간부터 내가 아닌 것이다. 술 마귀의 노예가 된다. 최근 술 취한 자가 자기를 보호해 주려고 출동한 119 소방대원과 경찰한테까지 폭행을 했다는 뉴스는 ‘저런!’ 하고 넘겼다. 그런데 현직 부장판사가 술값 시비로 종업원을 폭행하여 경찰의 소환을 당했다는 뉴스는 그대로 쇼크였다. 상대적으로 나의 ‘주마퇴치’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역시 나는 잘했다. 문맹퇴치가 국민에게 행복을 안겨주었듯이 ‘주마퇴치’가 개인과 가정의 행복을 지켜준다.
평생 애주가인 유명 문인이 아들․며느리의 간곡한 권유로 고희를 넘겨 ‘주마퇴치’를 했다고 한다. 참으로 축하할 일이다.
(2014. 4. 8.)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은 종 삼
“참 좋은데 이렇게 좋은 걸!”
심신이 쾌활하다. 아, 이게 바로 지혜라는 거구나! 지혜란 결코 성인이나 고매한 철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누구나 잠재된 행복을 만들어가는 재주다. 나는 행복을 만들었다. ‘주마퇴치’를 한 지 5년차 소감이다.
‘주마퇴치’란 술(酒)마귀(魔)를 물리쳐(退) 버리다(治)라는 뜻으로 내가 만든 사자성어다. 문맹퇴치(文盲退治)라는 말에서 따왔다. 나는 문맹퇴치라는 말을 좋아한다. 일제강점기 시대 민족차별교육과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문맹률이 80%나 되었다. 거의 까막눈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20년대 후반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언론사와 조선어학회가 중심이 되어 농촌계몽운동과 함께 일기 시작한 문맹퇴치운동은 1960년대까지도 야학으로 이어졌었다. 군대에서도 장병들에게 한글을 가르칠 정도였다. 실로 8ㆍ15 광복 후 문맹퇴치가 시대적 국가적 대과업이었다. 그 결과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문맹률을 자랑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국가적 사회적 행복은 문맹퇴치의 덕분이기도 하다.
흔히 문인들은 술을 좋아한다고 한다. 어느 유명 시인은 “날씨야, 아무리 추워봐라, 옷 사 입나 술 사먹지.” 이런 시를 술 홍보 관련 기관에 붙여놓았다. 어떤 음식점에는 “술은 내 친구”라는 글 액자가 벽을 장식하고 있는 걸 보았다. 참으로 명시요 명문들이다. 예로부터 술타령 글들은 문학의 옷을 입고 버젓이 명작으로 회자(膾炙)되어 왔다. 당나라 때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이태백(李太白)은 음주시를 많이 남겼다. 그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장진주(將進酒)는 “돈 적다 걱정 말라, 빼어난 말(馬)과 천금 모피 옷(裘)이 아까울 것 없다. 술과 바꾸어 그대와 함께 마시자” 고 했다. 말과 옷을 술과 바꾸어 오라니 참으로 한심한 친구 아닌가. 오죽하면 주태백(酒太白)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랴. 그럼에도 이런 시가 명작이란다. 이후 문인들은 음풍농월을 즐기면서 술을 예찬하는 글들을 무수히 남겼다. 변영로 시인은 <명정(酩酊)40년>이라는 술주정뱅이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기도 했다. 이런 연유일까. 술과 글은 마치 단짝처럼 여기는 그릇된 풍조가 문학계에 만연되었다.
나는 한창 공부하고 일할 나이에는 술을 마시지 못했다. 생활비도 버겁고 시간도 없고 무엇보다도 술맛을 몰랐다. 회식 때 건배하고 몇 잔 술잔을 주고받았지만 술이 별로 좋은 줄 몰랐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사회적인 지위도 얻고 안정된 생활이 되자 술자리가 잦아지고 그걸 즐기게 되었다. 술맛도 알게 되었다. 퇴직하고 사회에 나오니 홀가분한 기분에 어디나 어울려 술을 자주 마셨다. 급기야 내 손으로 막걸리 소주병을 사들고 귀가 하는 습관마저 길들여졌다. 그런데 내 몸꼴이 점차 추악해져가는 것이었다. 몇 발짝 계단을 오르는데도 힘이 부쳤다. 동네 병원에 갔더니 대학병원에 입원하라고 소견서를 써 주는 것이었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내 인생 지금부터가 자유롭게 나의 참모습을 들어내며 그간 돌보지 못했던 개인적 사회적 은혜에 보답하며 살 수 있는데, 내 스스로 내 몸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 흐트러진 나를 추스르기 위해서 산사에 들어가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살생, 도둑질, 사음(邪淫), 거짓말 하지 말고 술을 마시지 말 것’ 불자(佛子)들의 오계(五戒)를 되찾았다. 계율만 지킨다면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 될 것 같았다. 다 지키기 어려울지라도 ‘술 마시지 않는 것만’은 확실히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단호하게 술을 퇴치시켰다. 결코 술값이나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온전한 내 정신으로 나답게 살자는 각오다. 행복한 삶이란 온전한 내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술잔을 입에 대는 순간부터 내가 아닌 것이다. 술 마귀의 노예가 된다. 최근 술 취한 자가 자기를 보호해 주려고 출동한 119 소방대원과 경찰한테까지 폭행을 했다는 뉴스는 ‘저런!’ 하고 넘겼다. 그런데 현직 부장판사가 술값 시비로 종업원을 폭행하여 경찰의 소환을 당했다는 뉴스는 그대로 쇼크였다. 상대적으로 나의 ‘주마퇴치’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역시 나는 잘했다. 문맹퇴치가 국민에게 행복을 안겨주었듯이 ‘주마퇴치’가 개인과 가정의 행복을 지켜준다.
평생 애주가인 유명 문인이 아들․며느리의 간곡한 권유로 고희를 넘겨 ‘주마퇴치’를 했다고 한다. 참으로 축하할 일이다.
(2014.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