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에서 만난 어머니의 마음/이희석
2014.04.11 08:39
장독대에서 만난 어머니의 마음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이희석
연둣빛 햇빛이 찬란한 4월, 어머니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는 고향 집을 찾아가 보았다. 뒤꼍으로 가니 소담스러운 장독대에는 크고 작은 단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치 아기단지와 엄마단지들이 올망졸망 모여앉아 가족회의를 하는 듯 보였다. 지난날 어머니는 아마 날마다 이 장독에 들락거리며 간장, 된장, 고추장을 비롯하여 젓갈, 장아찌에 이르기까지 날라다 우리 가족의 입맛을 돋우는 반찬을 장만하셨으리라.
장독에는 간장만 들어있지 않았다. 늘 어머니가 있었고 맛이 있었다. 특히 장맛은 햇볕과 눈비, 이슬과 바람을 잘 다스려야 살아났다. 메주가 둥둥 떠 있는 간장독. 메주 주위에 약간의 빨간 고추와 숯을 띄우는 건 잡균을 제거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간장, 고추장, 된장에 가끔 햇볕을 쪼여야 곰팡이가 피지 않고, 구더기도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칠팔월 뙤약볕이 뜨면 어머니는 장독들의 뚜껑을 열어 종일 햇볕에 달구다가 갑자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면 깜짝 놀라 장독대로 뛰어가셨다. 빗물이 들어가면 장맛이 변하니까.
해마다 우리 집 장독 가에는 봄부터 한해살이 꽃들이 피어났다.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등 붉은 꽃을 심어 부정한 것들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했다. 실제로 뱀은 봉숭아를 싫어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밖에 분꽃, 과꽃, 접시꽃, 백일홍들도 피어 포근함과 정겨움을 안겨 주었다.이웃끼리 오순도순 아름다운 정을 나누던 곳도 장독대였다.
아름다운 추억은 세월을 거슬러 찾아온다. 장독대는 놀이터였다. 장독대 귀퉁이에서 소꿉놀이하던 어릴 적 기억도 있고. 장독대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잠자리를 잠자리채로 후다닥 덮치다가 뚜껑을 깨 야단을 맞은 적도 있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장독대 사이로 숨바꼭질을 했던 추억도 아련하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옷자락이 보일라, 장독 뒤에 숨어라.”
감쪽같이 숨으려 했으나 장독 뒤에서도 잘도 들켰던 그 시절이 그립다. 누이들 손톱에 봉숭아 꽃잎 물을 들여 주는 장소도 장독대였다. 붉은 봉숭아 꽃잎은 손톱을 예쁘게 물들이는 맨 처음 매니큐어 구실을 다했다.
어머니의 따스한 마음이 담겨 있는 장독대. 그리고 집안의 음식 맛이 좌우되던 소중한 곳. 내 고향 마을은 어느 집이나 뒤꼍으로 돌아가면 크고 작고 차이는 있을망정 가지런한 모습으로 놓여있는 장독대가 있었다. 간장을 담은 큰 항아리는 뒤쪽에 나란히 세워놓았고, 가운데는 된장이나 막장을 담은 중간 크기의 독을 놓았다. 그리고 앞쪽에는 고추장이나 장아찌를 담은 작은 단지들을 벌려 놓았다. 그렇게 놓은 것은 장을 퍼 나르기 쉬울 뿐 아니라 장독을 편하게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햇빛이 잘 들고 통풍에도 효과적이었다.
또한, 장독대를 보면 그 집안의 독특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뉘 집을 찾아갔을 때 이 윤기가 반지르르한 장독대를 보면, 그 집안 주부의 됨됨이를 알 수 있었다. 그 시절 우리네 음식 맛을 내는 데는 장독대의 단지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다. 특히 간장, 된장, 고추장은 그 집안의 음식 맛과 직결되었다.
장독대 이야기를 하면서 김칫독을 빼놓을 수 없다. 독은 흙의 정기가 담겨 있는 자연 친화적 옹기이다. 농경사회의 정착과 더불어 우리 민족은 땅 기운을 받은 옹기를 애용해왔다. 과학적으로도 검증되었듯이 우리의 옹기는 숨을 쉰다. 이런 좋은 옹기에서 익어간 장이나 김치가 잘 익어 제 맛을 낸다. 해마다 우리 집에서는 초겨울이 다가오면 봄부터 피어난 일년생 꽃들이 다 시들면 어머니는 그것을 걷어치웠고, 아버지는 직접 삽을 들고 땅을 파 독을 묻었다. 그리고 담근 김장 김치, 물김치, 동치미를 그곳에 갈무리해두고 겨우내 꺼내먹었다.
요즘엔 너도나도 간장 된장 고추장을 사 먹게 되었고, 온실 재배 기술과 냉장고가 일상화되어 사시사철 싱싱한 채소류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입맛 경험에 의하면 김치만큼은 김칫독에 보관해야 해가 지나도 깊은 맛을 내는 것 같다.
대가족이 모여 있듯 올망졸망 크고 작은 독들이 가득했던 그 장독대, 우리 어머니들의 쉼터가 되어 주었던 포근하고 정겨웠던 장독대도 양옥과 아파트라는 주거 문화에 밀려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더욱이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로 인해 이사를 자주 하게 됨에 따라 덩치 큰 독들이 짐이 되고 옹기들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렸다. 아파트에 살다 보니 베란다가 장독대 역할을 하다가 이제는 김치냉장고가 장독대를 대신하게 되었고, 된장도 냉장고에 넣고 먹게 되었다. 우리의 먹거리를 좌우하는 것이 된장과 간장인데 그것들을 제대로 만들어 먹을 수 없어 아쉽다. 장독대에 깃들었던 어머니의 마음과 정(情)도 함께 사라진 것만 같아 안타깝다.
가족과 다정히 모여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던 장독대, 옛것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나는 고향 집 장독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어머니가 장독대에 호미를 놓고 손을 씻은 뒤 항아리의 뚜껑을 금방 여실 것만 같다. 아내는 그곳에서 가져온 작은 장독들을 아파트 베란다 한쪽에 놓고 간장과 고추장을 보관하거나 동치미를 담아 이용하고 있다. 장독대 분위기에는 미치지 못하나 이것이 바로 정취 어린 우리네의 모습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사라져가는 우리의 맛과 멋, 그리고 장독대와 장독이 안타깝다.
(2014. 4. 11.)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이희석
연둣빛 햇빛이 찬란한 4월, 어머니의 마음이 가득 담겨있는 고향 집을 찾아가 보았다. 뒤꼍으로 가니 소담스러운 장독대에는 크고 작은 단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치 아기단지와 엄마단지들이 올망졸망 모여앉아 가족회의를 하는 듯 보였다. 지난날 어머니는 아마 날마다 이 장독에 들락거리며 간장, 된장, 고추장을 비롯하여 젓갈, 장아찌에 이르기까지 날라다 우리 가족의 입맛을 돋우는 반찬을 장만하셨으리라.
장독에는 간장만 들어있지 않았다. 늘 어머니가 있었고 맛이 있었다. 특히 장맛은 햇볕과 눈비, 이슬과 바람을 잘 다스려야 살아났다. 메주가 둥둥 떠 있는 간장독. 메주 주위에 약간의 빨간 고추와 숯을 띄우는 건 잡균을 제거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간장, 고추장, 된장에 가끔 햇볕을 쪼여야 곰팡이가 피지 않고, 구더기도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칠팔월 뙤약볕이 뜨면 어머니는 장독들의 뚜껑을 열어 종일 햇볕에 달구다가 갑자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면 깜짝 놀라 장독대로 뛰어가셨다. 빗물이 들어가면 장맛이 변하니까.
해마다 우리 집 장독 가에는 봄부터 한해살이 꽃들이 피어났다.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등 붉은 꽃을 심어 부정한 것들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했다. 실제로 뱀은 봉숭아를 싫어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밖에 분꽃, 과꽃, 접시꽃, 백일홍들도 피어 포근함과 정겨움을 안겨 주었다.이웃끼리 오순도순 아름다운 정을 나누던 곳도 장독대였다.
아름다운 추억은 세월을 거슬러 찾아온다. 장독대는 놀이터였다. 장독대 귀퉁이에서 소꿉놀이하던 어릴 적 기억도 있고. 장독대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잠자리를 잠자리채로 후다닥 덮치다가 뚜껑을 깨 야단을 맞은 적도 있었다. 어릴 적 친구들과 장독대 사이로 숨바꼭질을 했던 추억도 아련하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옷자락이 보일라, 장독 뒤에 숨어라.”
감쪽같이 숨으려 했으나 장독 뒤에서도 잘도 들켰던 그 시절이 그립다. 누이들 손톱에 봉숭아 꽃잎 물을 들여 주는 장소도 장독대였다. 붉은 봉숭아 꽃잎은 손톱을 예쁘게 물들이는 맨 처음 매니큐어 구실을 다했다.
어머니의 따스한 마음이 담겨 있는 장독대. 그리고 집안의 음식 맛이 좌우되던 소중한 곳. 내 고향 마을은 어느 집이나 뒤꼍으로 돌아가면 크고 작고 차이는 있을망정 가지런한 모습으로 놓여있는 장독대가 있었다. 간장을 담은 큰 항아리는 뒤쪽에 나란히 세워놓았고, 가운데는 된장이나 막장을 담은 중간 크기의 독을 놓았다. 그리고 앞쪽에는 고추장이나 장아찌를 담은 작은 단지들을 벌려 놓았다. 그렇게 놓은 것은 장을 퍼 나르기 쉬울 뿐 아니라 장독을 편하게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햇빛이 잘 들고 통풍에도 효과적이었다.
또한, 장독대를 보면 그 집안의 독특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뉘 집을 찾아갔을 때 이 윤기가 반지르르한 장독대를 보면, 그 집안 주부의 됨됨이를 알 수 있었다. 그 시절 우리네 음식 맛을 내는 데는 장독대의 단지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다. 특히 간장, 된장, 고추장은 그 집안의 음식 맛과 직결되었다.
장독대 이야기를 하면서 김칫독을 빼놓을 수 없다. 독은 흙의 정기가 담겨 있는 자연 친화적 옹기이다. 농경사회의 정착과 더불어 우리 민족은 땅 기운을 받은 옹기를 애용해왔다. 과학적으로도 검증되었듯이 우리의 옹기는 숨을 쉰다. 이런 좋은 옹기에서 익어간 장이나 김치가 잘 익어 제 맛을 낸다. 해마다 우리 집에서는 초겨울이 다가오면 봄부터 피어난 일년생 꽃들이 다 시들면 어머니는 그것을 걷어치웠고, 아버지는 직접 삽을 들고 땅을 파 독을 묻었다. 그리고 담근 김장 김치, 물김치, 동치미를 그곳에 갈무리해두고 겨우내 꺼내먹었다.
요즘엔 너도나도 간장 된장 고추장을 사 먹게 되었고, 온실 재배 기술과 냉장고가 일상화되어 사시사철 싱싱한 채소류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입맛 경험에 의하면 김치만큼은 김칫독에 보관해야 해가 지나도 깊은 맛을 내는 것 같다.
대가족이 모여 있듯 올망졸망 크고 작은 독들이 가득했던 그 장독대, 우리 어머니들의 쉼터가 되어 주었던 포근하고 정겨웠던 장독대도 양옥과 아파트라는 주거 문화에 밀려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더욱이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로 인해 이사를 자주 하게 됨에 따라 덩치 큰 독들이 짐이 되고 옹기들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렸다. 아파트에 살다 보니 베란다가 장독대 역할을 하다가 이제는 김치냉장고가 장독대를 대신하게 되었고, 된장도 냉장고에 넣고 먹게 되었다. 우리의 먹거리를 좌우하는 것이 된장과 간장인데 그것들을 제대로 만들어 먹을 수 없어 아쉽다. 장독대에 깃들었던 어머니의 마음과 정(情)도 함께 사라진 것만 같아 안타깝다.
가족과 다정히 모여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던 장독대, 옛것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나는 고향 집 장독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신 어머니가 장독대에 호미를 놓고 손을 씻은 뒤 항아리의 뚜껑을 금방 여실 것만 같다. 아내는 그곳에서 가져온 작은 장독들을 아파트 베란다 한쪽에 놓고 간장과 고추장을 보관하거나 동치미를 담아 이용하고 있다. 장독대 분위기에는 미치지 못하나 이것이 바로 정취 어린 우리네의 모습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사라져가는 우리의 맛과 멋, 그리고 장독대와 장독이 안타깝다.
(2014.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