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신팔복
2014.09.26 06:18
가족여행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신팔복
민족의 대 명절 추석은 흩어져 있던 가족이 한데 모이는 날이다. 맛있는 음식도 장만해서 함께 즐긴다. 성묘를 다니고 조상의 얼을 기리며 집안의 우애도 다진다. 내 어린 시절엔 마을마다 잔치 분위기였다. 또래끼리 모여 밤도 따 먹고, 넓은 집 마당이나 골목길에서 구슬치기, 윷놀이, 제기차기 등을 즐겼다. 어른들은 농악을 울렸고, 젊은 아낙들은 강강술래를 하며 둥근 달을 맞이하는 마을단위의 놀이를 즐겼다. 가족중심 사회로 바뀐 요즘의 명절은 마땅한 놀이가 없어 집안에만 있으려면 무료하다.
가까운 함양을 가보자는 내 의견에 모두가 동조했다. 더욱이 서울 태생인 큰며느리는 남쪽 지방의 문물을 구경하자니 좋아하는 눈치였다. 아내가 좋은 곳이 있느냐기에 내가 몇 군데 안내하기로 했다. 명소가 아니더라도 가족끼리 함께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명절이라서 장만한 음식도 많으니 찬합에 담아가자고 하니 딸부터 그건 아니라고 했다. 아내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짐을 챙겨 나섰다. 내가 앞좌석에 타고 뒤에는 며느리와 두 살배기 손자를 태우고 아내가 탔다. 내 차는 큰아들이 운전했고, 사위 차에는 딸과 외손자와 외손녀 그리고 손녀가 탔다. 고속도로를 달려 높고도 긴 육십령 터널(해발 734m, 길이 3,170m)을 지났다. 차창 밖 풍경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어느새 함양에 도착했다. 차가 멈추자 잠자던 손자도 깨었다. 내가 손자를 안아 내렸다. 할머니보다 할아버지를 더 따르는 것 같아 은근히 기뻤다.
명절 연휴라서 함양읍내는 조용했다. 사위 차로 먼저 도착한 애들은 벌써 신바람이 났다. 셋이서 차 지붕 위 창(sun roof)으로 머리를 내밀고 할머니를 불러댔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 군청 앞 커다란 느티나무를 배경으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나도 함빡 웃었다. 아내가 좋아서 ‘오냐, 오냐’ 하며 달려가 안아서 내려주었다.
길을 건너 함양읍 중심가에 위치한 학사루(學士樓)로 갔다. 정면 5칸에 측면 2칸으로 된 팔작지붕의 너른 누각이었다. 경남의 유형문화재 40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창건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학사루는 통일신라 때 함양 태수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이곳에 자주 올라와 시를 지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2층에 올라서니 오래된 누각이라 현판과 단청이 허름했다. 기둥에 8폭의 주련(柱聯)이 있었다. 그 중
“學士已乘黃鶴去(학사이승황학거), 行人空見白雲流(행인공견백운류).”
“학사는 이미 황학 타고 가버렸는데, 행인은 부질없이 흰 구름만 바라보네.”
라는 두 구절이 마음에 들어왔다. 갓 쓰고 도포를 입은 후임 태수들의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그들의 고매한 인품이 그려지기도 했다.
여느 해보다 빠른 추석이라 날씨가 더웠다. 천 년의 숲을 자랑하는 상림공원으로 갔다. 최치원 태수가 함양읍 서쪽을 흐르는 위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둑을 쌓고 물길을 돌려서 만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숲이란다. 근래에 만들어진 연못에는 홍련과 백련, 가시련 등 많은 연(蓮)이 있었다. 철이 지나 연꽃은 없었고, 물 양귀비의 노란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손자와 손녀가 포충망으로 잠자리를 잡고 요리조리 뛰어다니며 놀았다. 잠자리 날개를 잡고 다니다가 살려주라는 제 엄마의 말에 모두가 하늘로 날려 보냈다. 해방된 잠자리는 멀리 날아가 버렸다. 저릅대기 끝에 거미줄을 감아 매미를 잡던 일이 회상되었다. 진드기처럼 붙여 한 마리씩 잡는 재미가 무척 좋았었다. 개구리밥이 떠 있는 물속엔 붕어 말과 해캄이 많았고, 우렁이도 살고 있었다. 우렁이를 잡아 보여주고 연잎에 물을 담아 흔들어 보였다. 물이 둥글게 뭉쳐 뱅글뱅글 돌아갔다. 아이들이 저릐들도 해보겠다고 야단이었다. 즐거운 모습을 오래 간직하려고 활짝 웃으며 가족사진도 찍었다.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보였다.
상림 숲은 시원했다. 여기저기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거니는 가족이 많았다. 120여 종의 나무가 1.6km의 둑을 따라 조성되어 있어 숲은 널찍했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즐길 수 있는 평평한 숲이었다. 아장아장 걷는 손자의 뒤를 따랐다. 꽃을 가리키기도 하고 나뭇잎에 손을 대보기도 한다. 새로운 환경에 접한 경험일 것이다. 애기 상사화가 우리를 반겼다. 고창 선운사에서 본 꽃무릇이다. 여기저기 피어나기 시작하는 꽃이 신부의 족두리 같았다. 꽃대 위의 붉은 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모두 활짝 피면 불꽃으로 넘쳐날 것 같았다.
천 년의 약속, 사랑나무가 있었다. 개 서어나무와 느티나무가 밑동이 한데 뭉쳐 연리지가 된 싱싱한 젊은 나무였다. 젊은 연인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굳은 사랑을 맹세하고 있었다. 천 년쯤 사랑하고 싶은 마음일 게다. 행복 문을 통해 나왔다. 오늘은 내가 행복하다. 민물매운탕이 유명하다는데 식당이 쉬어 아쉬웠다. 대신 해물 수제비를 먹었다. 어린 손자는 배가 고팠는지 칼 수제비를 잘 먹었다. 아이들이 잘 먹는 것을 보니 내 배가 불렀고, 마음이 흐뭇했다. 내 손자들이라서 그럴 것이다.
(2014. 9. 26.)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신팔복
민족의 대 명절 추석은 흩어져 있던 가족이 한데 모이는 날이다. 맛있는 음식도 장만해서 함께 즐긴다. 성묘를 다니고 조상의 얼을 기리며 집안의 우애도 다진다. 내 어린 시절엔 마을마다 잔치 분위기였다. 또래끼리 모여 밤도 따 먹고, 넓은 집 마당이나 골목길에서 구슬치기, 윷놀이, 제기차기 등을 즐겼다. 어른들은 농악을 울렸고, 젊은 아낙들은 강강술래를 하며 둥근 달을 맞이하는 마을단위의 놀이를 즐겼다. 가족중심 사회로 바뀐 요즘의 명절은 마땅한 놀이가 없어 집안에만 있으려면 무료하다.
가까운 함양을 가보자는 내 의견에 모두가 동조했다. 더욱이 서울 태생인 큰며느리는 남쪽 지방의 문물을 구경하자니 좋아하는 눈치였다. 아내가 좋은 곳이 있느냐기에 내가 몇 군데 안내하기로 했다. 명소가 아니더라도 가족끼리 함께 즐기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명절이라서 장만한 음식도 많으니 찬합에 담아가자고 하니 딸부터 그건 아니라고 했다. 아내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짐을 챙겨 나섰다. 내가 앞좌석에 타고 뒤에는 며느리와 두 살배기 손자를 태우고 아내가 탔다. 내 차는 큰아들이 운전했고, 사위 차에는 딸과 외손자와 외손녀 그리고 손녀가 탔다. 고속도로를 달려 높고도 긴 육십령 터널(해발 734m, 길이 3,170m)을 지났다. 차창 밖 풍경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어느새 함양에 도착했다. 차가 멈추자 잠자던 손자도 깨었다. 내가 손자를 안아 내렸다. 할머니보다 할아버지를 더 따르는 것 같아 은근히 기뻤다.
명절 연휴라서 함양읍내는 조용했다. 사위 차로 먼저 도착한 애들은 벌써 신바람이 났다. 셋이서 차 지붕 위 창(sun roof)으로 머리를 내밀고 할머니를 불러댔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 군청 앞 커다란 느티나무를 배경으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나도 함빡 웃었다. 아내가 좋아서 ‘오냐, 오냐’ 하며 달려가 안아서 내려주었다.
길을 건너 함양읍 중심가에 위치한 학사루(學士樓)로 갔다. 정면 5칸에 측면 2칸으로 된 팔작지붕의 너른 누각이었다. 경남의 유형문화재 40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창건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학사루는 통일신라 때 함양 태수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이곳에 자주 올라와 시를 지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2층에 올라서니 오래된 누각이라 현판과 단청이 허름했다. 기둥에 8폭의 주련(柱聯)이 있었다. 그 중
“學士已乘黃鶴去(학사이승황학거), 行人空見白雲流(행인공견백운류).”
“학사는 이미 황학 타고 가버렸는데, 행인은 부질없이 흰 구름만 바라보네.”
라는 두 구절이 마음에 들어왔다. 갓 쓰고 도포를 입은 후임 태수들의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그들의 고매한 인품이 그려지기도 했다.
여느 해보다 빠른 추석이라 날씨가 더웠다. 천 년의 숲을 자랑하는 상림공원으로 갔다. 최치원 태수가 함양읍 서쪽을 흐르는 위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둑을 쌓고 물길을 돌려서 만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숲이란다. 근래에 만들어진 연못에는 홍련과 백련, 가시련 등 많은 연(蓮)이 있었다. 철이 지나 연꽃은 없었고, 물 양귀비의 노란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손자와 손녀가 포충망으로 잠자리를 잡고 요리조리 뛰어다니며 놀았다. 잠자리 날개를 잡고 다니다가 살려주라는 제 엄마의 말에 모두가 하늘로 날려 보냈다. 해방된 잠자리는 멀리 날아가 버렸다. 저릅대기 끝에 거미줄을 감아 매미를 잡던 일이 회상되었다. 진드기처럼 붙여 한 마리씩 잡는 재미가 무척 좋았었다. 개구리밥이 떠 있는 물속엔 붕어 말과 해캄이 많았고, 우렁이도 살고 있었다. 우렁이를 잡아 보여주고 연잎에 물을 담아 흔들어 보였다. 물이 둥글게 뭉쳐 뱅글뱅글 돌아갔다. 아이들이 저릐들도 해보겠다고 야단이었다. 즐거운 모습을 오래 간직하려고 활짝 웃으며 가족사진도 찍었다.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보였다.
상림 숲은 시원했다. 여기저기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거니는 가족이 많았다. 120여 종의 나무가 1.6km의 둑을 따라 조성되어 있어 숲은 널찍했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즐길 수 있는 평평한 숲이었다. 아장아장 걷는 손자의 뒤를 따랐다. 꽃을 가리키기도 하고 나뭇잎에 손을 대보기도 한다. 새로운 환경에 접한 경험일 것이다. 애기 상사화가 우리를 반겼다. 고창 선운사에서 본 꽃무릇이다. 여기저기 피어나기 시작하는 꽃이 신부의 족두리 같았다. 꽃대 위의 붉은 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모두 활짝 피면 불꽃으로 넘쳐날 것 같았다.
천 년의 약속, 사랑나무가 있었다. 개 서어나무와 느티나무가 밑동이 한데 뭉쳐 연리지가 된 싱싱한 젊은 나무였다. 젊은 연인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굳은 사랑을 맹세하고 있었다. 천 년쯤 사랑하고 싶은 마음일 게다. 행복 문을 통해 나왔다. 오늘은 내가 행복하다. 민물매운탕이 유명하다는데 식당이 쉬어 아쉬웠다. 대신 해물 수제비를 먹었다. 어린 손자는 배가 고팠는지 칼 수제비를 잘 먹었다. 아이들이 잘 먹는 것을 보니 내 배가 불렀고, 마음이 흐뭇했다. 내 손자들이라서 그럴 것이다.
(2014.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