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전', 전주의 자존심을 살리다
2014.10.05 07:58
‘경기전’, 전주의 자존심을 살리다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은종삼
전주의 상징물은 뭐니 뭐니 해도 경기전(사적 339호)이다. ‘경사스러운 땅’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그 위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세운 왕의 고향에 세워진 객사라는 뜻의 풍패지관(보물583호)이 전주의 중심가 충경로에 우뚝 서 있고, 건지산자락엔 태조 이성계의 시조 이한 공의 묘소인 조경단이 있다. 또 경기전 울안에 이한 공과 부인 경주김씨 위폐를 모신 조경묘 등이 있어 역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나 경기전은 단순히 역사적 유적지로서의 가치보다는 조선의 혼이 연면히 이어져 오늘날 한문화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가는 샘솟는 기운이 일고 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연간 500여만 명의 관광객이 한옥마을을 찾는 명소가 되고 있는 현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경기전 5만여㎡의 널찍한 터에는 400여년의 나이를 자랑하는 은행나무, 회화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 잣나무, 배롱나무 등 우람한 노거수들이 즐비하게 서 있어서 경기전의 위용을 지켜주고 있다.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매화나무가 절하는 모습으로 예를 갖추고 있고, <용의 눈물> <왕과 비> 등의 사극 촬영소로 유명해진 대나무 숲이 운치 있게 바람소리를 낸다. 일명 어사화라고도 일컫는 능소화가 백 살이 넘은 잣나무를 타고 올라가 하늘 높이 피어 있는데, 전국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경기전에는 태조어진(국보317호)과 정전(보물1578호) 및 수복청, 마청, 조병청, 용실, 어정, 전사청, 경덕헌, 동재, 서재 등의 부속건물과 예종대왕 태실 및 비(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 16호), 전주사고, 어진박물관 등 30여 개 동의 건물과 조형물들이 있어 조선왕조의 탯줄임을 여실이 보여주고 있다. 이중에서 ‘태조어진’과 ‘전주사고’는 특별한 의미를 안고 있다.
경기전은 태종 10년(1410년)에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려고 세워졌다. 정유재란(1597년)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6년(1614년)에 중건했다. 곧 경기전의 존재 가치는 ‘태조어진’에 있다. 태조어진은 총 26점이 제작되었고 전주와 경복궁, 경주, 평양, 개성, 영흥 등 여섯 곳에 어진봉안처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다 소실되고, 전주 경기전의 어진만 유일하게 남았다. 현재 봉안된 어진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동학농민혁명, 화재 등으로 적상산, 위봉사, 전주향교 등으로 피난살이를 하면서 여러 번 수난을 겪고 간신히 살아남았다. 참으로 경기전의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덕이 아닌가 싶다.
전주사고(全州史庫)는 1439년(세종21년) 경기전 안에 세워져 태조부터 명종 때까지 804권의 조선왕조실록(국보151호)을 봉안했다. 원래 실록은 춘추관, 전주, 충주, 성주 등 네 곳의 사고에 각 1부씩 봉안했으나 임진왜란 때 다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 실록만 화를 면하여 조선의 역사를 살려 냈다. 이 또한 우연이 아니다. 경기전의 신묘한 정기와 전북인의 깨어 있는 선비정신이 일궈낸 공덕이다. 당시 경기전 관리 참봉 오희길과 태인 선비 손홍록, 안의 등이 왜란을 피하려고 20여 필의 말과 수십 명의 인부를 동원 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기고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14개 월 간이나 무사들이 지키고 있었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실로 눈물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고장 선각자 선비들의 우국충절에 옷깃을 여밀 뿐이다. 전주사고에서 지켜낸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만일 전주사고가 아니었다면 어찌 우리 역사를 알 수 있겠으며, 문화민족으로서 긍지를 세계에 드높일 수 있었겠는가? 그야말로 전주사고는 한국인의 자존심의 상징이다. 전주사고에 봉안했던 조선왕조실록을 전주한지로 복원하여 부본을 만들어 전주어진박물관에 보관했다고 한다. 참으로 전주는 자랑스러운 기록문화의 메카다.
왕과 왕비가 되어 용상에 앉아 있다. 장도를 차고 수문장이 되어 위엄을 떨치기도 한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쳐다보며 환하게 웃는다.
“왕비가 되어보니 어떠세요?”
“기분이 좋은데요.”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들이 경기전에서 체험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며 나눈 대화이다. 방학 중이라서인지 평일에도 젊은 남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경기전을 누비며 희희낙락하고 있다. 경기전은 일반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지일 뿐만 아니라 전국 학생들의 체험학습 활동의 장으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불과 2년 전 만해도 개가 뛰어놀고 취객들이 흡연하고 쓰러져 자던 동네공원 수준이었다. 당시 전주시에서 경기전 유료화 계획안을 내놓자 일부 시민단체와 언론은 “시민의 자유로운 휴식공간으로 개방해야 한다.”며 유료화를 적극반대하고 나섰었다. 나는 “문화재의 가치를 인정하는 시민의식이 깨어나야 한다.”며 신문 칼럼으로 유료화를 적극 옹호했었다.
2012년 경기전이 유료화가 된 이래 2년간 200여만 명이 관람했고 14억여 원의 입장료 수입을 냈다고 한다. 드디어 조선왕조의 발상지요 조선역사를 살린 경기전이 제 모습을 찾게 된 것이다. 아니 경기전이 전북과 전주의 자존심을 살려낸 것이다.
“경기전이여, 영원무궁하라!”
(2014. 10. 5.)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은종삼
전주의 상징물은 뭐니 뭐니 해도 경기전(사적 339호)이다. ‘경사스러운 땅’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그 위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를 세운 왕의 고향에 세워진 객사라는 뜻의 풍패지관(보물583호)이 전주의 중심가 충경로에 우뚝 서 있고, 건지산자락엔 태조 이성계의 시조 이한 공의 묘소인 조경단이 있다. 또 경기전 울안에 이한 공과 부인 경주김씨 위폐를 모신 조경묘 등이 있어 역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나 경기전은 단순히 역사적 유적지로서의 가치보다는 조선의 혼이 연면히 이어져 오늘날 한문화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가는 샘솟는 기운이 일고 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연간 500여만 명의 관광객이 한옥마을을 찾는 명소가 되고 있는 현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경기전 5만여㎡의 널찍한 터에는 400여년의 나이를 자랑하는 은행나무, 회화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 잣나무, 배롱나무 등 우람한 노거수들이 즐비하게 서 있어서 경기전의 위용을 지켜주고 있다.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매화나무가 절하는 모습으로 예를 갖추고 있고, <용의 눈물> <왕과 비> 등의 사극 촬영소로 유명해진 대나무 숲이 운치 있게 바람소리를 낸다. 일명 어사화라고도 일컫는 능소화가 백 살이 넘은 잣나무를 타고 올라가 하늘 높이 피어 있는데, 전국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경기전에는 태조어진(국보317호)과 정전(보물1578호) 및 수복청, 마청, 조병청, 용실, 어정, 전사청, 경덕헌, 동재, 서재 등의 부속건물과 예종대왕 태실 및 비(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 16호), 전주사고, 어진박물관 등 30여 개 동의 건물과 조형물들이 있어 조선왕조의 탯줄임을 여실이 보여주고 있다. 이중에서 ‘태조어진’과 ‘전주사고’는 특별한 의미를 안고 있다.
경기전은 태종 10년(1410년)에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려고 세워졌다. 정유재란(1597년)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 6년(1614년)에 중건했다. 곧 경기전의 존재 가치는 ‘태조어진’에 있다. 태조어진은 총 26점이 제작되었고 전주와 경복궁, 경주, 평양, 개성, 영흥 등 여섯 곳에 어진봉안처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다 소실되고, 전주 경기전의 어진만 유일하게 남았다. 현재 봉안된 어진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동학농민혁명, 화재 등으로 적상산, 위봉사, 전주향교 등으로 피난살이를 하면서 여러 번 수난을 겪고 간신히 살아남았다. 참으로 경기전의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덕이 아닌가 싶다.
전주사고(全州史庫)는 1439년(세종21년) 경기전 안에 세워져 태조부터 명종 때까지 804권의 조선왕조실록(국보151호)을 봉안했다. 원래 실록은 춘추관, 전주, 충주, 성주 등 네 곳의 사고에 각 1부씩 봉안했으나 임진왜란 때 다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 실록만 화를 면하여 조선의 역사를 살려 냈다. 이 또한 우연이 아니다. 경기전의 신묘한 정기와 전북인의 깨어 있는 선비정신이 일궈낸 공덕이다. 당시 경기전 관리 참봉 오희길과 태인 선비 손홍록, 안의 등이 왜란을 피하려고 20여 필의 말과 수십 명의 인부를 동원 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기고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14개 월 간이나 무사들이 지키고 있었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실로 눈물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고장 선각자 선비들의 우국충절에 옷깃을 여밀 뿐이다. 전주사고에서 지켜낸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만일 전주사고가 아니었다면 어찌 우리 역사를 알 수 있겠으며, 문화민족으로서 긍지를 세계에 드높일 수 있었겠는가? 그야말로 전주사고는 한국인의 자존심의 상징이다. 전주사고에 봉안했던 조선왕조실록을 전주한지로 복원하여 부본을 만들어 전주어진박물관에 보관했다고 한다. 참으로 전주는 자랑스러운 기록문화의 메카다.
왕과 왕비가 되어 용상에 앉아 있다. 장도를 차고 수문장이 되어 위엄을 떨치기도 한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쳐다보며 환하게 웃는다.
“왕비가 되어보니 어떠세요?”
“기분이 좋은데요.”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들이 경기전에서 체험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며 나눈 대화이다. 방학 중이라서인지 평일에도 젊은 남녀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경기전을 누비며 희희낙락하고 있다. 경기전은 일반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지일 뿐만 아니라 전국 학생들의 체험학습 활동의 장으로도 자리매김하고 있다. 불과 2년 전 만해도 개가 뛰어놀고 취객들이 흡연하고 쓰러져 자던 동네공원 수준이었다. 당시 전주시에서 경기전 유료화 계획안을 내놓자 일부 시민단체와 언론은 “시민의 자유로운 휴식공간으로 개방해야 한다.”며 유료화를 적극반대하고 나섰었다. 나는 “문화재의 가치를 인정하는 시민의식이 깨어나야 한다.”며 신문 칼럼으로 유료화를 적극 옹호했었다.
2012년 경기전이 유료화가 된 이래 2년간 200여만 명이 관람했고 14억여 원의 입장료 수입을 냈다고 한다. 드디어 조선왕조의 발상지요 조선역사를 살린 경기전이 제 모습을 찾게 된 것이다. 아니 경기전이 전북과 전주의 자존심을 살려낸 것이다.
“경기전이여, 영원무궁하라!”
(2014.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