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9 12:09
장인어르신의 두루마기와 설날
전주안골은빛수필문학회 정석곤
몇 살까지 한복을 입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에 신었던 겨울 버선의 기억은 생생하다. 앨범에 ‘1958년 12월’ 이라고 쓰여진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단체사진이 있다. 남자 23명 여자 3명이다. 나의 첫 사진이다. 앞마을 우리 반 친구 사촌형님인 오계춘 담임선생님과 찍었다. 모두 검정색 고무신과 양복차림인데 남자와 여자 두 어린이는 한복을 입었다. 학생복으로 긴 바지에다 윗옷은 긴소매에 단추를 잠그고 칼라는 목을 둘러 세워져 있는데 앞을 후크로 끼웠다.
누구나 다 결혼 때는 양복과 한복을 맞춘다. 난 양복만 예비 신부와 같이 일부러 광주 충장로에 가서 맞추었다. 30대 중반 어느 성탄절 무렵, 큰맘 먹고 한복을 마고자까지 맞추었다. 한복 차림으로 성탄절 칸타타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를 발표하자 교인들이 친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아마 찬양에 오색찬란한 한복이 어우러져 더 그랬을 게다. 그리고는 한복은 농속에서 몇 년을 겨울잠만 잤다. 어느 해 설 주일인가, 한복 차림으로 인사를 나누자는 담임목사님의 권면에 못이긴 척 한복을 입었다.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기쁨은 입은 사람보다 보는 교인들이 더 컸을 것이다.
그 뒤로 설날 한복 차림은 바람으로만 끝났다. 그러면서 두루마기를 갖는 소원은 그대로였다. 장모님께서 내 맘을 아셨는지 장인어르신 두루마기를 주시는 게 아닌가? 한복 한 벌이 저절로 갖추어졌으니 뛸 듯이 기뻤다. 설날을 기다렸으나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지 못했다. 그해 유월에 장인어르신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게 아닌가? 장례를 치르면서 또 다짐을 하고 글로도 썼다. 앞으론 장인어르신의 두루마기를 설빔으로 생각하고 한복을 챙겨 입고 하늘나라에 상급 받으러 가신 장인 어르신의 신앙과 인품을 기리며 닮아가야겠다고…. 섣달 그믐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께서 아침도 못 드신 채 하늘나라로 부르심을 받아 가셔서 설이 어떻게 지난 줄도 몰랐다.
올해는 한복을 입는 설날로 벼르고 있었다.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지 않으려 며칠 앞두고 아내에게 내 한 복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곤 했다. 알았다는 말뿐이었다. 그믐날 밤, 한복을 가져오라고 다그쳤다. 머리맡에 두고 자고 싶어서였다. 아내는 며느리들과 음식을 장만하느라 아침에 챙겨주겠다는 게다.
섣달 그믐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들리는 것 같았다. 자정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정월 초하룻날은 알람이 안 울려도 이른 새벽에 눈이 떠졌다. 곧바로 목욕을 했다. 어릴 때 그믐날이면 뜨겁게 데운 물로 묵은 때를 벗기고 새 몸과 맘으로 설 명절을 맞이했던 것처럼.
드디어 한복을 입었다. 가랑이가 넓은 바지를 허리까지 추겨 올려서 입고 아래 끝에 대님을 맸다. 운동화 끈을 묶듯 했다. 통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저고리를 입고 옷고름을 맬 차례다. 내식으로 맨 게 틀린 것 같아 둘째 며느리한테 봐달라고 했더니 배운 지가 오래 됐다며 매어주었다. 이어 예복인 짙은 회색빛 두루마기를 입었다. 내 생전 처음이다. 장모님께서 주실 때는 딱 맞은 것 같았는데 조금 컸다. 며느리는 저고리보다 예쁘고 야무지게 맸다. 게다가 빨간 비단 목도리를 두르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어느 해는 설날 덕담을 세뱃돈 봉투 앞면 뒤쪽 풀 붙인 부분에다 일일이 쓰기도 했다. 올해는 세뱃돈 봉투에 다 다르게 쓴 덕담 쪽지를 넣었다. 첫 한복차림으로 세배를 받으니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봉투만 내미니 토끼 눈같이 동그래졌다. 덕담을 얼마나 간직하고 노력할 지는 얘들 몫이고 내 할 일을 다 했으니 뿌듯했다.
세배가 끝나자마자 한복을 입은 손주들과 설날 아침 인증 샷(shot) 겸 추억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마음으로 한 약속은 어겨도 티가 안 나타나지만 글로 쓴 건 오래오래 간다. 경자년 설날 아침은 등에 잔뜩 진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옹골졌다. 올 설날 한복차림은 큰 추억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해마다 찾아오는 민속 고유 대명절인 설날마다 한복을 입게되는 전통이 이어지게 될 것이다.
(2020.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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