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미국 비자가 예상보다 늦게 나오는 바람에 수원 사는 친정 여동생 집에 몇 달 머물게 되었다. 갑자기 시간이 남아돌아 뭘 할까 고민하다가 당시 유행하던 박공예를 배우러 다녔다. 가끔 어린 딸을 데리고 가서 곁에 앉혀 놓았는데 그날은 딸 저쪽 곁에 얌전하게 생긴 한 여자가 조각에 열중하고 있었다. 혹여라도 그녀의 팔놀림에 방해가 될까 봐 '저 언니 곁으로 너무 가까이는 가지 마'라고 살며시 딸에게 일러주었다. 나의 조그만 소리를 알아 들은 그녀의 표정이 좀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 몸에서 냄새가 나기 때문에 피하는 건 줄 다 안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너무 황당해 '그게 그런 게 아니고….' 어벙벙한 상태로 해명을 늘어놓는 동안 자기 설움에 복받친 그녀가 짐을 챙겨 밖으로 홱 나가 버렸다.

날벼락을 맞은 듯 벙 뜬 나는 마침 박공예를 지도하는 가게 주인이 들어오길래 어떻게 이런 오해를 할 수 있는거냐며 억울해 했다. 이야긴즉슨 그 여자분은 나이가 꽉 찬 '미스'인데 몸에서 나는 '암내' 때문에 직장에서도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라며, 본인이 저렇게 난리 치지 않으면 쉽게 알아챌 일이 아닌데 제 발 저려 저러니 우리가 이해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나를 위로했다. 남의 호의를 제 식대로 해석해서 벌인 한바탕 소동에 기가 막혔지만, 사연을 듣고 보니 자신의 결점에 지나치게 민감한 그녀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해는 자신의 상처만 들여다보느라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랭보의 시 중의 한 구절이다. 정말 이 땅에 상처 없는 영혼이 없다면 그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오해를 하고 오해를 받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일 것이다. 오해는 우리의 마음 곳곳에 복병처럼 숨어 있다가 얼토당토않은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 사이의 소통에 태클을 건다.

오해는 친분이 전혀 없는 사이에서도 생기지만, 친한 사이로 발전해 가는 과정 혹은 관계가 돈독해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것 같다. 어떤 사이에서든 오해는 사람을 참 쓸쓸하게 한다. 우울한 감정에 젖어 일상의 행복이 솔솔 빠져나가는 일이다. 다행히 오해가 잘 풀려 더 좋은 사이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사귐의 기쁨으로 들떴던 지난 시간을 안타까이 바라볼 뿐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괴테는 "오해는 뜨개질하는 양말의 한 코를 빠트린 것과 같아서 시초에 고치면 단지 한 바늘로 해결된다"고 했지만 모든 관계에 적용 가능한 말은 아닌 것 같다. 섣불리 시도하다가 더 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지켜내고 싶은 인연의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말 좋아하는 한 이웃으로부터 어이없는 오해를 받고 눈물이 날 만큼 섭섭했지만, 진심은 통한다는 말에 의지한 진지한 대화로 빠트린 한 코를 찾은 기억이 있다.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나를 외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혹은 누군가를 향한 내 마음에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깔릴 때, 난 종종 '오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만약 오해라면? 쓸데없는 소모전에 정신 에너지를 쏟고 있는지도 모른다. -


미주 중앙일보 2014.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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