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이별

2014.09.12 05:02

노기제 조회 수:5





20140826             조용한 이별
                                                       노기제
  한 달 후에 은퇴 예정이던 아파트 매니저(manager)가 갑자기 이틀 전에 은퇴했다는 공문이 방마다 배달 됐다.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다. 은퇴 기념 선물을 생각 중이었는데. 며칠 전, 입주 일 년 계약이 끝나는, 9월 초하루에 맞춰 은행 계좌 증명 육 개월 치와 그 외 각종 수입 근원 증명들을 요구하던, 짧은 커트의 백발에 인자한 미소의 얼굴이 떠오른다.
  정확히 일 년 전. 중학 동창인 쥴리가 점심 초대를 했다. 새로 둥지를 옮긴 곳의 카페테리아 음식이 싸고 맛있으니 한 번 시간 내서 오라고. 자주 연락하던 친구다. 별소리 없더니 갑자기 웬 이사?
  엘에이 다운타운이 가까운, 3가와 알바라도. 세인트 빈센트 병원 뒷길에 호텔 듀라고 쓰인 건물이다. 불란서말로 신의 집. 천주교 재단이 운영하는 노인 아파트다. 동네는 빈곤층 아파트가 주를 이루고 있는 소위 멕시칸어메리칸들의 거주 지역이다. 재력 있는 시댁과 능력 있는 부부가 큰 집 지니고 중산층으로 살던 친구는 천주교 신자다.
   70이 내일 모레인 우리 나이를 상기 시키며, 이젠 나름대로 삶을 정리 해야겠기에 결단을 내렸다 한다. 맞는 얘기다. 우린 너무 많은 것들을 지니고 산다. 단출하게 줄이며 마무리 할 필요가 있다고 늘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래도 남편과 의견을 맞춰야 하고, 막상 줄이려 하니 아쉬움도 생긴 탓에 나는 미적이고 있는 터에 실전에 옮긴 친구가 마냥 크게 보였다.
  친구 안내로 방을 둘러보며 부부가 살기엔 좁은 공간이지만, 혼자 살기엔 최적이라 생각 했다. 건물 현관에서 각 방문까지, 곳곳에 설치 된 감시카메라가 24시간 작동 된다. 3층 건물에 150여동. 한국 사람이 50 퍼센트 정도지만 모든 관계자는 미국인이다. 노인 아파트 입주에 흔히 발생하는 비리 같은 건, 그림자도 없는 깔끔한 곳이다.
  순간 욕심이 났다. 당장 매니저를 만나자 했다. 전화로 먼저 약속을 해야 한다는 친구를 강제로 앞세우고, 사무실로 가니 마침 자리에 있다. 넉넉한 풍채에 인자한 미소. 짧은 커트가 백발이다. 들어오라며 반갑게 맞는다.
  나만 아는 내 속 사정을 거짓 없이 얘기 했다. 곁에 있는 친구도 그리 자세히는 모르는 얘기다. 왜 내가 당장 거처할 곳이 필요한지. 입주하려면 필요한 조건들이 있다. 내 이름으로 수입이 있어야 한다. 난 없다. 내 이름으로 된 은행 구좌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난 없다. 모두 남편과 나, 두 사람 이름으로 된 것들 뿐이다. 그러면 입주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렇게 가능하도록 만들라는 제의를 한다. 우선 당장은 조건이 안 되지만 그리 할 수 있다면 입주 하라고.
  입주 가능한 방 둘을 보여 주는데, 모두 1층이다. 그거라도 내겐 하늘이 주신 피난처니 고맙게 받으려 했다. 허나, 잠간 머뭇거리며 물었다. 혹시 3층엔 방이 없냐고. 없단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사 오기로 예약 된 방이 있기는 한데, 보기라도 하려는가 물으며 안내 해 준다.
   열어 주는 방문을 들어서며 질러댄 나의 환호성에, 그렇게 좋으냐며 환하게 웃어 준다. 예스, 바로 여기가 내 방이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냥 순식간에 느낀 것을 표현한 것뿐이다. 분명 이 방은 이사 오기로 계약 된 방이라 했다. 그래도 난 좋다. 아무런 의심도 없다. 이건 내 방이다. 특별히 나를 위해 은밀히 준비 해 두신 하나님의 손길이다.
  몇 달을, 밤바다를 헤매다 끝내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벼랑 끝에 섰던 나를, 친구를 통해 이곳으로 이끄시고, 매니저를 통해 가장 적합한, 내게 꼭 필요 했던 안전하고 편한 안식처를 주신, 살아계신 내 하늘 아버지가 우리들 곁에 계심이 증명 되던 순간이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나를 돌보심에 필요한 사람들을, 이 방 저 방에 심어 놓으신, 엄마 품 같은 아파트에서의 생활이 일 년이다. 곤한 잠에서 깨어 눈 한 번 깜박인 시간이라 느꼈는데 365일이 순풍으로 흘렀다.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어김없이 물어 준 나의 현재 상황. 날마다가 최고의 은혜를 입어, 행복하다란 대답을 주면, 함께 박수라도 치며 좋아 해 줄 기세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삶이다 라며 일깨워 주던 음성.
  이제 아파트 어디에서도 그 모습을 만날 순 없다. 혹여 입주자들에게 부담이 될까봐, 약속 된 날 이전에 조용히 방을 비운 매니저. 모두들 굉장한 은퇴 파티를 구상하면서 제각각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선물을 궁리하던 터다.
  필요한 은행 서류들을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 복사했다. 방세를 속 안 썩이고 제때에 낼 수 있다는 보장도 없이, 선 듯 방을 내주며 안심 시켜주던 포근한 품은 없다.  그 자리에 앉은 낯선 매니저에게, 준비한 서류를 제출하고 돌아서는 내 뒷모습을 새 매니저는 어찌 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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