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소설 <금시조>를 읽고

2004.10.22 12:22

길버트 한 조회 수:213 추천:8

<금시조>

글을 씀에 있어 그 기상은 금시조가 푸른 바다를 쪼개고 용을 잡아 올리듯 하고, 그 투철함은 향상(香象)이 바닥으로부터 냇물을 가르고 내를 건너듯 하라고 가르치는 서예가인 석담 선생에게 숙부에 의해 자란 주인공 고죽이 열 살 나이에 맡겨져 성장하면서 고죽의 배움과 깨달음의 과정을 회상하는 이야기는 시작된다.
고죽의 숙부는 국외로 망명하여 석담 선생을 찾지 않았다. 석담은 '예(藝)'보다 '도(道)'를 더 우선시 하는 인물로 고죽을 사랑하면서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다. 오히려 석담은 고죽에게 신학문을 배우라고 권장하면서 문하로 받아들일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다. 스물 일곱에 조급한 성취감에 빠져 스승에게 알리지 않고 문하를 빠져나와 자기 과시를 하게된다. 고죽은 그런 석담을 아침에 붓을 쥐기 시작해서 저녁에 자기솜씨를 자랑하는 보잘것없는 환쟁이를 제자로 삼지 않겠다고 하며 고죽을 냉담하며 용서할 때까지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후에 사면을 받게되지만 고죽은 스승을 이해하지 못하고 봄날 산허리를 스쳐 가는 구름그늘처럼, 여름날 소나기가 씻어간 들판처럼, 가을 계곡의 물처럼, 눈 그친 후에 트인 겨울 하늘처럼 유유하고 신선하고 맑고, 고요하면서도 권태롭고 쓸쓸하고 적막하다고 여긴다. 결국 고죽의 삶을 지배한 것은 사모와 동경 쪽이었다. 새로운 세계로의 강렬한 유혹을 억누르고 신학문을 포기했을 때 예측됐던 것처럼 고죽은 자신도 모를 열정으로 석담 선생을 흉내내고 있었다.  
후에 운곡과 함께 들어 온 석담 선생은 고죽에게 지게를 벗고 사랑으로 들게 하여 제자로 삼는다. 글씨가 법도로 삼아야 할 것은 텅비게 하여 움직여가게 하는 것으로 마치 하늘과 같으니, 하늘은 남북 극이 있어서 그것으로 굴대를 삼아 그 움직이지 않는 곳에 잡아매고, 그런 후에 그 하늘을 항상 움직이게 한다. 이런 까닭으로 글씨는 붓에서 이루어지고, 붓은 손가락에서 움직여지며, 손가락은 손목에서 움직여지고, 손목은 팔뚝에서 움직여지며, 팔뚝은 어깨에서 움직여진다. 어깨니 팔뚝이니 팔목이나 하는 것은 모두 그 오른쪽 몸뚱어리라는 것에서 움직인다고 가르친다.  
사군자 중에서 석담이 특히 득의해하던 것은 대나무와 매화였다. 그 대나무와 매화가 한일합방을 경계로 이상한 변화를 일으켰다. 대원군도 신동(神童)의 그림으로 감탄했다는 석담의 대나무와 매화는 원래 잎과 꽃이 무성하고 힘차게 뻗은 것이었으나 그때부터 점차 시들고 메마르고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후년으로 갈수록 심해 노년의 것은 대 한줄기에 잎파리 세 개, 매화 한 등걸에 꽃 다섯 송이가 넘지 않았다. 그것은 망국(亡國)의 대나무가 무슨 흥으로 그 잎이 무성하며, 부끄럽게 살아남은 유신(遺臣)의 붓에서 무슨 힘이 남아 매화를 피우겠느냐는 것이었다. 고죽의 생각은 달라 정소남(정사초)은 난의 노근(露根)을 드러내어 망송(亡宋)의 한을 그렸고, 조맹부는 훼절(毁節)하여 원(元)에 출사(出仕)했지만, 정소남의 난초만 홀로 향기롭고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비천하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고죽과 석담의 사상은 달랐다. 고죽은 스승과는 달리 보편적 원리로서의 도를 인정하지 않고, 한 인간의 삶과 마찬가지로 서예 역시 독특하게 추구되어야 할 상대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서예가 다른 무엇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독자적 세계를 추구해 가지만 석담 선생과 대립된 의견을 보이고 있다. 서화는 심화(心畵)니라. 물(物)을 빌어 내 마음을 그리는 것인즉 반드시 물의 실상(實相)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하자 고죽은 글씨 쓰는 일이며 그림 그리는 일이 한낱 선비의 강개(慷慨)를 의탁하는 수단이라면, 그 얼마나 덧없는 일이겠느냐고 하며, 장부로 태어나 일평생 먹이나 갈고 화선지나 더럽히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고 모르긴 하되 나라가 그토록 소중한 것일진대는, 그 흔한 창의(倡義)에라도 끼여들어 한 명의 적이라도 치고 죽는 것이 더욱 떳떳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만히 서실에 앉아 대나무 잎이나 떼어내고 매화나 훑는 것은 나를 속이고 물을 속이는 일이 아니냐고 예도(藝道)에 대한 생각을 말하자 석담 선생은 물에 충실하기로는 거리에 나앉은 화공이 훨씬 앞서지만 그들의 그림이 서푼에 팔려 나중에는 방바닥 뚫어진 것을 메우게 되는 것은 뜻이 얕고 천했기 때문이며 고죽의 그림이며 글씨 그 자체에 어떤 귀함을 주려고 하지만, 만일 드높은 정신의 경지가 곁들여 있지 않으면 다만 검은 것은 먹이요, 흰 것은 종이일 뿐이라며 예는 도의 향이며, 법은 도의 옷이다. 도가 없으면 예도 법도 없다고 한다.
이미 육순에 접어들어 늙음의 기색이 완연한 석담 선생은 거기서 문득 밝은 얼굴이 되어 일생을 불안하게 여겨 오던 제자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고죽은 끝내 그의 기대를 채워 주지 않았다. 먼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이제 예닐곱 살 난 학동들에게 붓을 쥐여 자획을 그리게 하는 것은 글씨에 도가 앞선다면 죽기 전에 붓을 잡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냐고 하자 석담 선생은 기예를 닦으면서 도가 아우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평생 기예에 머물러 있으면 예능(藝能)이 되고, 도로 한 발짝 나가게 되면 예술이 되고, 홀연히 합일되면 예도가 되며 도를 앞세워 예기(藝氣)를 억압하는 것은 수레를 소 앞에다 묶는 격이 아니겠느냐고 석담 문하에 든 직후부터 반생에 이르는 고죽의 항변을 하자 석담 선생의 반응도 그를 받아들일 때부터의 불안이 결국 적중하고 만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는지 날카로웠다. 네 부족한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애써 채우려들지는 않고 도리어 요망스런 말로 얼버무리려 하느냐고 호통을 치며 경서(經書)에도 뜻이 없었고, 사장(詞章)도 즐거워하지 않았으며 오직 붓끝과 손목만 연마하여 선인(先人)들의 오묘한 경지를 자못 여실하게 시늉하고 있으니 어찌 천예(賤藝)와 다름이라며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앞사람의 드높은 정신의 경지를 평하려드는 뻔뻔스러운 놈이라고 한다. 학문은 도에 이르는 길이라는 뜻이었다. 고죽이 서른 여섯 나던 해 무렵 고죽은 여러 면에서 몹시 지쳐 있었다. 두 불행한 사제가 돌아서는 마지막 자리 다시 석담 선생의 문하로 돌아간 그 8년 동안 그의 고련(苦練)은 열성스럽다 못해 참담할 지경이었다. 하도 자리를 뜨지 않고 서화에 열중하는 바람에 여름이면 엉덩이께가 견디기 힘들만큼 짓물렀고, 겨울에는 관절이 굳어 일어나 상 받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석담 선생의 말없는 꾸짖음을 외면한 채 서화가 관련이 없으면 어떤 것도 보지 않았고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이미 그 전에 십 년 가까이 석담 문하에서 갈고 닦았지만, 후년에 이르기까지도 고죽은 그 8년을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부분으로 술회하곤 했다. 그 전의 십 년이 오직 석담 선생의 경지에 오르고자 노력한 십 년이라면, 그 8년은 석담 선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기간이었다. 운곡에 의해 석담 선생의 소식을 듣고 회한에 서린다. 고죽이 해방 전 해에 행장을 꾸려 산을 내려왔지만 석담 선생은 돌아가신 후였다. 산사에서 희미하게 바랜 벽화를 우연하게 보게되고 주지에게 묻자 수미산 사해(四海)에 사는데 불법수호팔부중(佛法守護八部衆)의 다섯째로, 금시조(金翅鳥) 또는 묘시조(妙翅鳥)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게되고 가루라(迦樓羅)는 머리에는 여의주가 박혀 있고, 입으로 불을 내뿜으며 용을 잡아먹는다는 상상의 거조(巨鳥)라고 듣자 문득 금시벽해(金翅碧海)라는 귀절이 떠올랐다. 석담 선생이 그의 글씨가 너무 재예(才藝)로만 흐르는 것을 경계하여 써 준 글귀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고죽의 머리 속에 살아 있는 금시조는 추상적인 비유에 지나지 않았었다. 선생의 투박하고 거친 필체와 연관된 어떤 힘의 상징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퇴색한 그림을 대하는 순간 그 새는 상상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이긴 하지만 그는 그 거대한 금시조가 금빛 날개를 퍼덕이며 구만리 창천을 선회하다가 세찬 기세로 심해(深海)를 가르고 한 마리의 용을 잡아 올리는 광경을 본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제야 그는 객관적인 승인이나 가치부여의 필요 없이, 자기의 글에서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그런 광경을 보면 그것으로 그의 삶은 충분히 성취된 것이라던 스승을 이해할 것 같았다.
고죽의 전반생은 두 개의 상반된 예술관 사이에 끼어 피 흘리며 괴로워한 세월이 지나고 나이 들고 병석에 누웠어도 초헌이라는 제자의 부축을 받으며 화방골목을 뒤지고 다닌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그림을 수거하고 있었다. 고죽의 집, 장독대 옆 화단에 일 평생 동안 서화들을 내려놓게 된다.  일평생 고죽을 속이고 세상 사람들을 속여 스스로 값진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으로 당연한 듯 세상 사람들의 감탄과 존경을 받아왔지만 서화들 속에서 금시조를 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설령 새를 본다한들 고죽의 삶이 온전한 것으로 채워지지 여전히 의문이었던 것이다. 가족들과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을 지르고 그 불길 속에서 홀연히 솟아오르는 한 마리 거대한 금시조를 보게된다. 그 날 밤 향년 72세로 고죽은 숨을 거둔다.

고죽이나 석담의 예술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그 안에 진정으로 녹아나는 두 사람의 인간적 고뇌와 진정한 예술의 아우라를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참다운 예술성과 끊임없는 진정성에 직면하게 된다. 예와 도는 둘 다 중요함에도 서로 상반된 견해와 의견의 피력으로 예술에 대한 근원적 뿌리를 찾는 것으로 스승과 제자가 각기 다른 예술관으로 서로 등을 돌리게 된다는 내용이다. 비록 스승을 떠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걷지만 금시조라는 영험의 새를 통해 위선과 자만으로 참다운 예술성에 부합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고죽이다. 결국 진리라는 것의 참과 거짓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논리적 사고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에 이르러서야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것인데 이것은 보이는 것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예술 정신에 입각한 학문으로 도를 깨닫게 되는 과정인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나 정신이 베어있지 않는 몸으로만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