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시인의 시 감상

2004.10.13 12:16

길버트 한 조회 수:83 추천:7

재미시인의 작품을 소개하자는 의견이 있을 때 많이 망설여진 것이 사실입니다. 시인이 시인을 평가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모순이 있기 때문입니다. 배움에 정진하고 있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못한 탓에 등단해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인을 섣부르게 평한다는 것은 자칫 부작용이 있으면 안하는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다 뜻깊은 취지라면 돌아가며 재미시인을 소개하면서 창작의 의욕을 고취시키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 또한 의미있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해야 할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재미시인의 시 감상이라는 소재를 달고 먼저 시를 창작한 시인을 소개하기에 앞서 보다 객관적인 합평이 되도록 후에 소개를 할려고 합니다.
예술품을 팔방에서 보는 것, 본질은 통하되 각기 다른 면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시인의 시상과도 다를 수 있다는 전제를 먼저하며 평론이라기보다 순수한 감상으로 생각해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부활을 꿈꾸는

비오는 고속도로 한 켠
느릿느릿 자동차 한 대, 견인차에 끌려간다
뒷덜미 잡혀가는 뭉개진 삶
충혈 된 과거가 두 눈에 껌벅이고
비 젖은 낡은 발뒤축
동그라미 두 개가 아스팔트를 끌고 간다
양심 추월했던 위태로운 욕망
배수구에 흘려 보내며
서슬 퍼렇던 크락숀 비명도 잠재우고
신열 든 한 세상
앞으로만 내달았던 생애가
지금 들 것에 실려 간다
쉼 없던 날들의 긴장과 곤두서던 날카로운 신경 줄
세상에 미끄러지며 곤두박질쳤을까?
짓이겨진 상처 아린 혀로 핥으며
가뭇없이 사라질 어둠 속에서도
부활을 꿈꾸고 있을까?
내일을 알 수 없는
막막한 공중 위에서의 일단 멈춤
붉게 번져 가는 눈시울을 빗물이 헹궈낸다
난폭한 생존 앞에서
잠시 궤도 이탈한 헐거운 육신 위로
참 선한 빗방울 퍼지고
온 몸으로 덜그럭거리는 저 신음소리
시간이 움켜 쥔 생명 풀어놓는 고단한 표정 위로
꽃잎 같은 바람 몇 개 펄럭이고
어디선가 피비린내 난다                          
                                          

이 시의 배경은 고속도로에서의 자동차가 사고났던 일에 대한 에피소드이지만 단순히 에피소드가 아닌 비 오는 날의 풍경과 함께 화자는 평범한 일상의 일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상상의 추리를 확장해서 인간의 비애를 담고 자동차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긴장과 날카로운 신경, 난폭한 생존, 고단한 표정 등 남성적 이미지가 풍겨집니다.
비가 오는 길, 고속도로에서의 자동차 사고의 난감함만큼이나 화자가 평소 가지고 있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드러내면서 타자가 된 시인은 사건에 대한 객관적 모습을 보이려고 합니다. 평소 시인을 21세기의 현대 부르주아라고 놀릴 만큼 노동자도 서민층도 아니지만 나르시스 즘에 빠지지 않고  보편적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화자와 사건의 발생에 있어 직접적인 연관보다 다소 거리를 두고 타자의 위치가 떨어져 있으면서 시간의 흐름에 대한 경과와 그 과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된 것을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에 대입시켜봅니다. 상상계(The Imageinary)에서의 자아와 거울상(specular image) 간의 이자관계에서 고장난 자동차가 동일성인 자신이 아니라 상징계의 제 삼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거울에 반영된 이미지와 '동일시'를 통해 자동차의 형태와 인간의 삶을 연결시켜 때로는 절망의 순간에서 아픔을 느끼게 하는 죽음을 전재로 설정하지만 회복보다는 새로운 부활, 즉 재창조에 의한 삶의 의욕을 강조합니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어떤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계기의 전환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소망일 것입니다.  
시를 창작하는 시적 대상의 소재는 과학의 발달과 빠른 정보로 많을 수 있지만 하나의 시를 통해 세상의 흐름을 한 눈에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의 직접적 경험으로 고장난 자동차를 통해 과거의 자취를 더듬고 그 위에 미래의 예견과 어려운 현실의 접목으로 간접적 아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참 선한 빗방울을 맞으면서'는 다소 과장된 사고의 열거라고 볼 수 있지만 '신열 든 한 세상' 이나 '가뭇없이 사라질 어둠,(흔적 없이) 꽃잎 같은 바람이 펄럭인다'는 대비는 시인만의 뛰어난 시적 표현방법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미국에 살지만 문학인으로 우선되는 것은 아름다운 우리나라 말을 가꾸고 전통을 이어가는데 있습니다. 6행의 아스팔트는 외래어로 한국말을 변화시킬 수 없으니 상관없지만 9행의 크락션은 경적이라고 하거나 나팔의 비명이라고 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연 갈이가 없다는 것은 내용에서 보는 것과 같이 자동차와 인간의 삶을 시적 환경을 동시간과 같은 동일체로 놓고 한 사건에 대해 마무리까지 리듬을 끝까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꽃의 장례(葬禮)

무언가 사르르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탁, 소리가 펄럭였다. 공기를 흔드는 마지막 저항, 망설임 하나 없이, 가슴 깊숙이 꽂힌 칼날 뽑아내 스스로 목을 치듯, 선명하게 거실바닥으로 투신하는 바싹 마른 양란 꽃의 얼굴들

한때
자신이 우주이던 꽃
세찬 격랑과 탱탱한 희망들
생의 중심을 지날 때
핏줄 속의 불티들
들끓듯 일어서
긴 꽃대 끝까지
끌어 올렸을
그 아찔했던 시간들의
현란(絢爛)
꽃잎에 주름 앉고
식은 살갗 버석일 무렵
사라지는 수분처럼
이승을 빠져나가는 생
그리고
눈물겹게 움켜쥔
죽음의 무게
놓는다.

물기 하나 없는 맑은 영혼이 날아 갈 듯 가볍다. 색깔을 지니는 것조차 욕망이었을까? 버리고 나니 이토록 가벼워지는 육신, 곧 바스라질 듯 가냘픈 너의 퇴색한 우주, 적막그늘에서 싸르르 통증을 일으키는 내 청춘이 바래가고 바람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한 생애, 풍장으로 보내고 싶다. 맨발의 네 영혼

                                                  
앞서 살펴 본 <부활을 꿈꾸는> 이라는 시와 상반적 개념으로 종말적 의미인 '꽃의 장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인의 다른 경향의 시들과 최소의 비교일 뿐 전부일 수는 없지만 시를 통해 시인의 생명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근원적 생명을 노래한 생명파 시인들의 생명중시사상과는 사뭇 다른 진보된 모습으로 성장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개화된 서양 난의 관찰을 죽음이라는 미래의 상상적 생태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담겨져 있다고 할까요. '세찬 격랑과 탱탱한 희망들'은 희로애락의 인간사를 말해주는 것이죠. 현재가 아무리 어렵고 고달파도 각자의 소박한 꿈들부터 거대한 야망까지 가질 수 있기에 삶은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요. '눈물겹게 움켜쥔 죽음의 무게'는 평소 시인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궁금증과 우주의 자전 섭리에 대한 낮은 자리에서의 사물을 바라보는 것으로 후에 표현될 욕망의 무게가 아닌가 싶습니다.

서양 난은 보통 꽃이 피면 수개월도 가는 꽃의 생명이 긴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화병의 꽃이든 화단의 꽃이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양을 하고 있기 십상인데 무심코 스치거나 버려지는 사물을 관찰해서 시상을 포착한 시인의 심상은 시의 소재에 빈곤에서 벗어나 확장된 시상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현란'은 아찔하고 눈부시게 찬란하다는 뜻으로 앞 행의 '그 아찔했던 순간들'의 어휘를 응축, 반복하면서 뜻을 더욱 강조되게 합니다.  

1연은 마지막 연의 쌍두 산문적 요소를 담으며 현대시의 작법의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1연은 꽃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를 기술하고 있고, 2연은 시인의 상상력과 의지를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 단언하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3연의 의문은 시인이 모르고 자문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욱 강조된 '버리고 나니 이토록 가벼워지는 육신'의 깨달음이며 공수래 공수거의 욕심을 버리고자하는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탱탱하게 살려는 강한 의지와 풍장으로 사라질 청춘의 빛 바램이 공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들의 사는 모습이며 '풍장으로 보내고 싶다. 맨발의 네 영혼' 이 시구는 도치되어 긴 울림의 여운으로 남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벌거벗은 몸의 줄기와 눈물이라도 뚝 떨어질 애절함이 다음 생의 환생을 믿는 윤회의 영험한 부활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우주의 모든 만물을 포함하고 있겠지요.
  


서늘한 그날의 슬픔에 대하여

1
일억 사천만년 전의 공룡
브론토사우러스 파헤쳐진 묘지
너의 단단한 흰 뼈 마다마다
서늘한 그날의 슬픔이 고여있다.
어둠 속에서도 삭지 못하는 꿈
너는 영원히 늙지 않고
먼 기억 속에서 달려오는
청동빛 바람
한때 초목이 우거졌을 땅
지금 누런 사막 무심히 누워
게으른 눈 비비고 있다

내 따뜻한 심장의 숨결 불어넣어
네가 다시 일어난다면
그래서 순하디 순한 눈빛
한없이 긴 목 낭창낭창 드리우고
쿵쿵쿵 춤사위 같은 몸짓으로 내게 온다면
나는 모딜리아니의 긴 목 닮은 너의 모가지
너무 길어서 신음하듯 불안한 너의 모가지
여문 잎새로 만든 화환 하나 걸어주고 싶다

2
화석 되어 붙어있는 뼈 마디마디 사이로
끓어오르는 울음소리
죽지 않고 살아 온 그리움이 매달린 그 소리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달려 와
모래사막 넘어가던 지친 노을
속눈썹에 무겁게 걸리고
돌아서는 발끝에 툭툭 채이기도 하는
너의 울음소리 애련하게 가슴에 담은 나는
슬픈 너의 환영(幻影)
기어이 보고 말았다


공룡이 멸종 된 건 유성이 지구에 부딪히며 생긴 엄청난 기후변동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지구가 구름으로 싸여서 갑자기 추워져 공룡 종류가 적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신 우리 포유류 동물이 번성하기 시작했으니 공룡의 재앙은 포유류의 축복. 바다와 육지는 계속 뒤바뀌고 있어요. 지금도. 미주 대륙이 유럽 아프리카 대륙과 멀어지는 속도는 한해 2인치. 옛날엔 하나였어요. 모든 대륙이. 인도가 아시아 대륙과 부딪히며 생긴 히말라야 산맥...지금도 조금씩 높아지고 있지요...그 위에 있는 조개 화석들...옛날 바닷가였다가 인도 대륙이 밀려와 산이 되었으니...               <퍼옴- 고대진 시인의 설명>

'지금 누런 사막 무심히 누워 게으른 눈 비비고 있다' 고 한 1연의 10~11 행의 기술을 볼 때 고대생물 전시관에서 감상한 뚜렷한 기억을 집에서, 영상매체로 다시 보게되고, 전시관의 방문에 대한 회상을 하면서 떠오른 시상을 창작에 연결 지었습니다.    
시인 스스로 '따뜻한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은 인간미 넘치는 온화한 마음을 드러낸 것으로 비록 공룡이 현존할 수 있기에는 어려운 환경인 것은 인지하면서도 더불어 함께 살고 싶은 시인의 소녀적 감성으로 이를테면 '순하디 순한 눈빛', '쿵쿵쿵 춤사위'로, '화환'을 걸어주고 싶은 희망이 베여있습니다. 3연은 기억에 대한 상상력입니다. 고대의 초원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와 살기 위해 걸어온 사막, 황혼이 암시하듯 감기는 눈은 죽음을 초연하게 맞이하는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강한 의지가 허공에서 울림으로 표출되면서 눈앞에 환영으로 살아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시의 제목에서 이미 '서늘한 그 날의 슬픔에 대하여'가 환영으로 인해 더욱 애잔한 목소리로 들리게 됩니다.    

3편의 시를 살펴봤습니다. 시대의 구분은 비록 역행하여 앞선 두 작품은 올해에 '서늘한 그 날의 슬픔에 관하여'는 작년에 창작한 것입니다. 시인의 시작메모에서와 같이 생명과 맞물려 있다는 것이 공통적이며 이것이 시인의 시정신이 베어있는 일관된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그곳에 내가 걸려있다>의 홍문표 교수의 시평을 보면 실존적 주체로서의 현존재를 통해 문명과 역사와 현실이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나와 인간이나 모두가 외로울 뿐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진정한 실존에 대한 성찰을 하도록 하고 스스로 존재의 의미에 육박하도록 하는 기능을 시를 통해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생명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으로 자칫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 정신 세계에서 삶의 대한 순응으로 시간의 흐름을 통해 사물과 인간관계를 자연스럽게 성립시키고 있습니다.    
'서늘한 그 날의 슬픔에 대하여'의 시작 메모를 읽어봅니다. '인간은 가끔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꿈꾸며 이미 사라진 것들에 대한 애착도 서늘하도록 슬프다'고 했습니다. 또한 '먼 훗날 내가 사라질 이 땅에서 까마득히 오래 전에 사라진 것들을 지금 불러본다.'고 하듯이 세상에는 어떠한 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생로병사의 굴곡을 누구나 겪는 것이지만 시를 통해 시인의 초월적 신세계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사는 동안 자연 친화적인 노력을 기우려 달라는 교훈이 담겨져 있는 듯합니다.
객관적으로 살펴본 세 시가 다른 시인들의 시적 경향과 비교해서 이민의 서정을 그린 고향이나, 가족, 그리움이 아닌 현실 자체에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장태숙 시인의 약력소개

명지대 사회교육대학원 문예교육학과 문예창작 전공.
월간 '문학공간' 수필 등단, 계 간 '창조문학' 시 등단
한국문협,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국창조문학가협회 이사
미주한국문인협회 이사, 사무국장.  
우이시 동인, 비존재동인.

시집 : <내 영혼 머무는 곳에>, <그 곳에 내가 걸려 있다>

2001년 제6회 '창조문학가상' 수상.

현대시 10월호에 장태숙 시인의 <부활을 꿈꾸며>외 1편이 실렸더군요.  앞으로도 끊임없이 창작하셔서 좋은 작품들을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