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의 시- 자진한 잎

2005.01.13 18:52

조만연.조옥동 조회 수:198 추천:9



2003년 9월20일 토 중앙일보-조옥동의 <시와 함께>



  자진한 잎
                                   이근배


세상의 바람이 모두 몰려와
내 몸에 여덟 구멍 숭숭 뚫어 놓고
사랑소리를 내다가
슬픔소리를 내다가
이별이 아니면
저별?
산사태가 지고
해일이 오고
둥둥둥 북이다가 징이다가
꽹과리이다가 새납이다가 장고이다가
잃어버린 여자의 머리카락이다가
달빛이다가
풀잎이다가
살아서는 만나지 못하는
눈먼 돌이다가
한 밤 새우고 나면
하늘 툭 터지는
그런 울음을 우는

보수와 진보, 반미와 친미, 파업과 진압, 타협과 엄벌, 온갖 소리 시끄럽더니 아주 큰 매미가 날아 왔다. 미 동부에는 이사벨이 북상했다. 산사태가 지고 해일이 오고. 휩쓸어간 폐허에서 차라리 눈 먼 돌이 되고싶다. 사방에 흩어져 구겨져 있는 자진한 잎새들이 모두 입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자궁 속을 빠져 나온 생명마다 주어진 여덟 개의 구멍 중에서 소리내어 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입뿐이기에 진노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저별? 크신 이의 은총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어 캄캄한 밤새우고 나면 하늘 툭 터지는 그런 울음을 울고싶은 입술이다. 타는 목을 축일 수조차 없는 흙탕물에 범벅이 된 벼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들녘의 한 노인의 주름진 모습은 말 그대로 한 자진한 잎이었다. 겨울은 아닌데 몹시 사나운 바람이 우리 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아는 듯 몸 속을 파고든다. 슬픈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아도 되는데.
일제 압박에서 해방을 맞은 근대 조국의 상황은 "대홍수였다"고 시인은 한마디로 말하고 있다. 울분과 기쁨조차도 속 시원하게 말못하고 마른 입술같은 자진한 잎새들이 사방에 굴러다닌 역사를 우리는 안다. 이데올르기의 거대한 담론의 거품은 전쟁과 정쟁으로 문학 밖의 세상이 슬픔과 이별 아니면 분단으로 인한 손실의 산사태와 해일을 맞고 민생은 모두 자진한 잎이 되어 있을 때, 문학의 세계 또한 시끄러워 북소리 징소리 꽹과리 장고 날라리까지 합칠 만큼 이구동성, 갑론을박 잃어버린 여자의 머리카락같이 소용없는 소용돌이의 시대를 겪으면서도 시인은 모국어의 아름다운 씨앗들을 뿌리며 사랑을 낭만을 노래하고 싶었다. 1961년 동시에 조선, 경향, 서울신문 신춘문예 입상을 한 기록을 가진 시인은 학교를 졸업 고향 당진으로 낙향 후에도 어머니께 졸라 쌀 장리를 얻어 명동으로 올라와 공초 오상순 선생님주변에서 흠뻑 문향에 젖어서야 시골로 다시 내려가곤 했다.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이며, 시조시인으로도 빼어난 시인은 시집 「노래여 노래여」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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