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꾸 (동심의 세계)

2008.12.06 18:02

이용우 조회 수:177 추천:3

아빠, 나 하이꾸 만들었어."

어느 날 저녁식사 후 신문을 뒤적이고 있는데 숙제를 한다던 그린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 무슨 소린가 했다. 그래서 되물었다.

"하이꾸가 뭐야?"

"아빠 하이꾸도 몰라? 재페니스 포엠, 아빠 모임에서는 코리안 포엠 하잖아. 하이꾸가 재페니스 포엠이야."

그제서야 나는 그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린이 말한 '하이꾸'가 바로 그 일본의 단가 '하이꾸' 라는 것을 알아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이리 줘봐, 어디 좀 보자."

나는 그린이 내미는 종이를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그 종이에는 왼편 상단에 몇 송이 꽃그림과 함께 'haiku' 라고 인쇄되어 있고, 중앙에 짤막한 영시 한 편이 프린트로 찍혀 있었다. 그리고 아래 하단에 그린의 필체로 또 다를 시 한 편이 흑연필로 적혀 있었다. 중앙의 프린트 된 영시는 샘플 하이꾸가 분명했고 그것을 보고 그린이 자신의 하이꾸를 만들어 하단에 쓴 것일 터였다. 그 내용을 순서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 Haiku -




                       In the rains of spring,

                       An umbrella and raincoat

                       Pass by, conversing           "Spring Rain" by Buson    

        




                        

                        Nature is thriving,

                        Nature has unique style

                        Green, Green everywhere     "Nature"  by Green lee  

  

위의 것은 버손 이라는 사람이 쓴 "봄비" 라는 제목의 시 이고, 아래의 것은 "자연" 이라는 제목의 그린이 지은 시 이다. 두 시를 보는 순간 잠깐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입이 마르고 목구멍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한국문학을 하는 한인소설가의 딸이 우리의 시조가 아닌 일본의 단가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나는 분노의 시선으로 그 영시 하이꾸를 세 번 네 번 읽고 또 읽었다.

나는 그린에게 네가 한 번 읽어보라고 했다. 어떻게 해서 이 영문 시가 5-7-5 형식의 하이꾸가 되는지 듣고 싶었다. 그린은 음,음 하고 목청을 가다듬더니 샘플 시부터 읽어 나갔다. 잘 보라며 손을 치켜들더니 한 음절 마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읽었다.

"스프링 래인, 바이 버손. /  인 더 레인 ? 스프링, / 앤 옴브 렐 라 앤드 레인 코트 / 패스 바이 컨 버 싱"

"네츄럴, 바이 그린. / 네츄 럴 이즈 드라이 빙, / 네츄 럴 해스 유 니 크 스타일 / 그린, 그린 에브 리 웨얼."  

띄어쓰기 스페이스 안에 붙여진 것은 두 음이든 세 음이든 한 자로 계산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인, 더, ?, 등은 물론 한 자가 되고, 레인 도 한 자, 스프링 도 한 자로 치는 것이다.          

"봄비" 의 내용은 "봄비 속에 / 우산과 비옷이 뒤섞여 / 마구 돌며 지나간다." 는 정도 이고, 그린의 시 "자연" 은  "무성히 자라는 초목, / 희한한 모습의 자연은 / 천지가 온통 초록이다" 로 읽혀지겠다.

"그린아 코리안 하이꾸도 있어, 아니, 하이꾸가 아니고 시조라고 해."

"코리안 하이꾸도 있어?"

"응, 그런데 코리안은 하이꾸가 아니고 시조라고 불러. 시조."

"시조? 어떻게 하는데, 해봐."

급한 마음에 시조를 꺼내들기는 했는데 갑자기 해보라고 하니 순간적으로 시조의 길이가 하이꾸 보다 훨씬 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 해볼게' 하고는 얼른 생각나는 시조 한 두 편을 속으로 읊으며 헤아려 보니 하나는 마흔 다섯 자, 또 하나는 마흔 여섯 자나 되었다. 시조의 길이가 하이꾸의 세 배 가까이나 되는 셈이다. 걱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읊지 않을 수도 없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그렇게 읊어 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린이 시조가 다 끝나기도 전에 불평을 했다.

"아빠, 코리안 하이꾸 투 롱이야."

"그린아, 하이꾸가 아니라니까, 시조야, 시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빠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린이 입술을 내밀며 뿌루퉁해 졌다. 하이꾸 라는 타이틀만 없었더라면 짧은 영시 한 편을 잘 지었다고 칭찬으로 침이 말랐을 터 인데, 그놈의 일본 단가 때문에 부녀간에 괜한 감정만 쌓이고 말았다.

그런데 걱정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게 더욱 큰 문제이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머지않아 그린에게 본격적으로 우리의 시조를 가르쳐 주어야 할 텐데, 시조의 길이보다도 '현대 시조'니 '해체 시조'니 해서 파괴되어버린 우리 고유의 정형 시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가 더욱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악한 일본문학은 17 자 짤막한 하이꾸를 들고 미국의 초등학교까지 침투했는데, 현대시에 콤플렉스를 가진 한국의 시조 시인들은 자신의 영혼까지 팔며 국적불명의 시조를 양산하고 있다. 이것이 시조요,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그것이 시조인가보다 하지, 구분지어주지 않고 섞어놓으면 어느 게 시 이고 어느 게 시조인지 도통 알 수 없는 게 현대 시조의 실상이다.

"시와 시조가 어떻게 달라야 하느냐 하면, 양장과 한복, 드럼과 북처럼 확연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보아서도 다르고, 들어서도 달라야지요. 마지막 연 만 삼오사삼으로 끝나면 시조라는 말이 될법이나 할 소리입니까. 토끼가 머리에서부터 꼬리까지 토끼여야 토끼지, 염소 몸통에 꼬랑지만 토끼꼬리를 붙여서 토끼가 됩니까?"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렇게 열변을 토하지만 시조시인이라는 사람들은 귀도 없고 가슴도 없는지 마이동풍,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답답한 일이지만 그린에게 시조를 가르칠 때는 오직 우리의 정형시조만 보여줄 작정이다.

"내 벗이 몇 인고 하니 바람과 송죽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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