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복숭아를 모르고

2005.11.23 12:46

정찬열 조회 수:181 추천:6

퇴근길에 과일가게에 들러 포도 두 송이와 오렌지 한 박스를 샀다. 골목 어귀에 들어서니 우리 집 불빛이 보인다. 이제 아들 승이가 뛰어나와 반갑게 인사를 할 것이다. 그 순간, 최영미 시인이 쓴 '과일가게에서'라는 시가 생각났다. 사과는 복숭아를 모르고 / 복숭아는 포도를 모르고 / 포도는 시어 토라진 밀감을 모르고 ...
과일가게에서 처음 만난 과일들이 서로를 모르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그러나 한솥밥을 먹으며 십 수년동안 얼굴을 마주하여 살아온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잘 모른다면 크게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닐까.
평소에 아들을 잘 안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일이 최근에 발생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아들에게 미안하다. 아버지인 내가 아들을 너무 몰랐다는 생각 때문에 근래에 아들 얼굴 보기가 민망스럽다. 아이들을 이해하는 좋은 아빠라고 은근히 자부해오던 터라서 더욱 그러하다.  
지난 수요일 오후. 아들 승이 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수업할 시간에 전화를 걸어와 걱정부터 앞섰다.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 들뜬 목소리. "아빠, I WON!" "I GOT IT!" 아이는 무척 흥분된 목소리로 자기가 학생회장에 당선된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전화를 받고 난 다음, 엉뚱하게 권투선수 홍수환이 생각났다. 챔피언이 된 직후 방송을 통해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외치던 기쁨에 들뜬 그 모습이 떠올랐다. 내 아들 승이도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회장 당선이 확정되자 그 소식을 아빠에게 전하기 위해 바삐 공중전화로 달려갔을 것이다. 마치 모처럼 100점 맞은 시험지를 엄마에게 보여드리고 싶어 허둥지둥 집으로 달려갔었던 초등학교 시절의 내 모습처럼. 그런데 아빠인 나는 아들이 선거를 하는 날인 것조차 관심에 두지 않고 있었다니.
사실 나는 승이가 10학년 회장선거에 나선다고 했을 때 마음속으로 당선은 생각지 않았다. 그저 다른 아이들 틈에서 기죽지 않고 잘 지내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기특했다. 그도 그럴 것이 600여명 되는 10학년 학생 중 한국인이 열 명 미만이고 아시안이 5%가 채 되지 않는, 백인이 절대다수인 학교에서 우리 아이가 회장에 당선된다는 건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일계 중학에서 올라온 아이들이 95%이상을 차지하는 학교의 신입학년에서, 다른 학교 출신인 승이 입학한지 8개월만에 치루는 회장 선거에 당선되기는 불가능 할 것이라는 제법 논리적인 근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당선되었다. 아버지의 계산법은 틀렸고, 나는 아들을 몰라도 한참 몰랐던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평소에 말수가 적고 조용한 아이가 이런 사고(?)를 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아이의 어디에 그런 모습이 감추어 있었을까.
이곳 미국은 학교에 예능시간이 없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주일에 한 번씩 승이를 미술학원에 보낸 적이 있는데, 학원에 갈 때마다 캔디를 한 봉지씩 사 달라고 했다. 아이들과 나누어 먹겠다는 것이었다.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고 궂은 일은 솔선하던 어릴 적 모습을 생각해 보니, 녀석은 그때부터 이미 친구 사귀는 방법을 간파했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잣대로 아들을 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들과 발을 맞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이번 일을 통해 실감했다. 그런 아버지가 어디 나 혼자 뿐이랴 싶기도 하다. 아버지가 자라온 세상과 아들이 사는 세상이 다르고, 아이들이 한 발 앞서 세상을 바라보고 걸어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은 사과와 복숭아가 친해져 간다는 최영미의 시처럼, 나도 아들과 좀 더 친해지고 싶다. 복숭아와 포도가 서로 어울려 과일가게가 아름다운 것처럼, 나도 아들과 잘 어울려 웃음 넘치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다. 푸르름 넘실거리는, 이 가정의 달 오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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