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와 아버지

2004.10.01 14:27

강학희 조회 수:154 추천:16




홍시와 아버지 / 강학희
어릴 적, 늦가을이면 시골 선산에서 가져온 발그스름한 꼭지감들 광주리에 가득 담아 가을이 익도록 옥상 방에 두었다가, 한 겨울 살얼음이 살짝 얼어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홍시를 따끈한 방에서 재잘거리며 식구들과 나누어먹던 달디단 기억. 그 때 나는 매해 선산에 가시는 아버님을 따라가고 싶어 몇번씩이나 데려가달라 다짐을 받곤했던 기억이 난다. 그 시골의 감 나무 아래서 놀던 재미가 얼마나 좋았던지... 나무마다 빨갛게 물든 감 밭은 서울에서 살던 내겐 참 재미난 시골구경이었다. 열살 때부터 간땅꾸라 불리던 원피스를 곱게 차려 입고 미리내 선산으로 가던 나들이는 하도 눈에 선해서 생각만 해도 그 때 나이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지금은 한국 카톨릭 교회의 성지가 된 산 끝 동네, 미리내는 그 성지 앞이 전부다 감밭이었다. 선산인 그 곳에 우리가 보이면 벌써 멀리서 달려오시던 시골 산지기아저씨, 늘 일하다 나오시기 때문에 흙투성이라, 처음 뵐 때 나는 속으로 시골 사람들은 세수도 안하고, 손도 안 닦는 사람들이라 생각했었다. 그 아저씨에게는 가슴 아픈 아들, 정박아인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님은 늘 서울에서 그아이에게 줄 옷과 과자들을 챙겨 갖다 주셨다. 그 아저씨는 "아이구우-! 무슨....번번이, 죄송합니다!" 얼굴이 빨개지셔서 미안해하셨지만 아버님은 항상 손수 그 방으로 가셔서 물건을 직접 그 아이에게 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하셨다. 아버님 등 뒤에서 고개만 내놓고, 처음 그 아이, 바오로를 봤을 때 나는 문득 걔가 꼭 거미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아마도 그 아이의 가느다란 팔과 다리가 다 제멋대로 놀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얼굴이 삐뚤어진 그 아이는 입을 실룩이며 웃으려고 하면 할 수록 이상하게 더 울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저씨 내외는 무척이나 부끄러워하시고, 또 내가 무서워 할 까봐 나를 잡아 당기셨지만, 왠지 난 그 아이가 무섭지도 징그럽지도 않고, 하얀 얼굴이 꼭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아 나까지 눈물이 핑 돌곤 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참 궁금한 것이 그 아이의 삶이다. 내가 대학교 졸업 할 때까지 그 아저씨 내외가 잘 돌보았지만, 아버님 사후 그들의 소식도 그 아이의 소식도 잘 알지 못하게 되었고 선산에 갈 때면 그들 생각이 나고, 내가 누렸던 풍족함들이 미안한 느낌으로 다가 온다. 그렇게 아버님과 내가 선산에 도착하면, 시골 어르신들이 오시어 안주상을 벌리시고 지난 이야기들을 나누시며 술잔을 권하기 사작하시면 나는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나와 뒤란으로 나가 감나무 밭으로 가곤했다. 걔네 엄마는 옷 더럽히면 어떻게 하시냐며 따라와 나를 말려도 막무가내로 감나무 밭에서 깡충거리며 꽃들을 꺾고 감들을 바라보며 뛰어 놀았었는데 왜 그리 재미가 있었는지....한번은 멀리서 올라 오시는 아버님을 보고 나는 신나서 뛰어가 "아빠! 다 빨갱이네!" 했다가 그런 말은 쓰면 안된다고 무척 야단 맞은 빨간 세상의 기억, 그 것이 내 유년의 감나무 밭이다. 그 때는 빨갱이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듣던 시절이라, 나도 몰래 빨갛다는 "빨강이네"를 자연 그렇게 발음했을 것이다. 물론 내가 그 때 어른의 빨강 이념과 아이의 빨강 이념의 차이를 이해 할 나이도 아니었지만, 여하튼 빨강이라는 말은 아무 때나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어렴풋이 알았으리라. 실은 빨강이라는 색갈이 우리 인생에서 상당히 조심해야 할 것이라는 걸 그 때 아주 확실히 배웠어야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빨강하면 피난시절 부산 대청동 언덕에서 바라보던 빨갛게 타오르던 국제 시장의 불, 지금도 지울 수 없는 붉디붉은 첫사랑, 화로 속에 감춰둔 불씨 같이 간간이 살아나 절로 부끄러워지는 새빨간 미움, 한번 찍으면 절대로 깨끗이 지워지지 않는 빨강 인주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쓰고 싶어 불꽃처럼 늘 타올라도 제대로 표현 할 수 없는 시뻘건 괴로움 등등.... 여하튼 빨강이라는 색은 꼭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늘 문제의 색갈인 것만은 확실하다. 동시에 우리 인생에서 없으면 결코 삶의 맛과 멋이 생기지 않는 귀한 색, 그래서 더 더욱 함부로 쓸 수 없는 색이 빨강색인 것 같다. 나는 그 때 감을 터는 사람들에게 늘 "감은 넉넉히 남겨 두어라" 이르시던 아버님이 참 못마땅하고 이해가 되지 않아서 "왜 그런가?"하고 물었었다. 그 때 아버님은 배고픈 새가 올 것이라고 하셨고, 나는 어렴풋이 그 곳은 새가 참 많은 곳인 줄만 알았었다. 한번도 배를 골치 않았던 내가 새나 사람이나 다 배고픈 시절이었다는 걸 어찌 알았으랴... 이즘이야 모두들 가을이면 아마가끼라 불리우는 단감들을 더 많이 먹지만, 나는 매해 가을이면 지금도 뾰쪽한 삼각 꼭지감들을 여러 상자 사다, 더러는 눈으로 먹기 위해 창가에 줄지어 세워두고서 쪼그라지도록 가을을 바라보고, 나머지 것들은 커다란 항아리에 사과 몇 알을 함께 넣어 한동안 놓아 두어 감들이 쪼그라들지도 떫지도 않게 잘 익혀둔다. (친구 시인에게서 홍시를 잘 만드는 이 비결을 배운 후에는 많은 감들을 잘 익히게 되었다.) 그 홍시들을 하나 하나 비닐 봉지에 넣어 냉동실에 보관했다 그 가을이 가고 겨울, 봄, 여름까지 내내 속이 헛헛하고 홍시가 그리운 날이면 한 알씩, 한 알씩 꺼내어 고운 접시에 놓고 해동하기를 기다리며 나의 기억들을 만난다. 여름 홍시에서 가을을 만나고, 그 가을에서 아버님의 깊은 마음을 만난다. 정작 가을이면 홍시를 심어 겨울, 봄, 여름동안 나의 감나무에서 홍시를 따먹으며 다시 올 가을을 준비하는 셈이다. 이제 나도 아버님의 나이, 내 유년의 감나무들을 보며 여태껏 내가 먹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먹었던 것은 누구의 밥이었을까 곰곰 생각해 본다. 누군가의 까치 밥이었을 빨간 홍시를 먹으며, 이 한해를 얼마나 감사 없이 살았는지 미안한 마음이 되어 나의 것을, 나를 누군가의 까치 밥으로 내놓고 살지 못했던 나를 들여다 본다. 내가 매달려 있는 삶의 나무를 다시 한번 휘 둘러 보게 된다. 내 가지에 열려있는 열매나 잎새, 혹은 몸통, 어느 것 하나도 선뜻 내 놓을 수 없었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 뿌리를 들여다 보며 반성한다. 웰빙(well being) 시대인 요즈음은 감보다 감잎 차를 더 많이 즐기는 시대라는데... 무엇 하나 버릴 것 없이 풍성히 키운 감나무로 누군가의 까치밥이 되기를 바래보며, 새파란 하늘에 까치 밥 몇 개 걸린 감나무 같은 11월 달력 속의 내 남은 날들을 짚어본다. 몽클, 몽클, 가슴에 붉은 인장을 찍는 홍시가 너도 다음 가을까지 누군가의 까치 밥으로 끝내 매달려 있어라 한다.
        홍시와 아버지 그리고 나 / 강학희 홍시는 해마다 그 해마다 더 붉고 싶어 꽃눈 꼬옥 감고 햇살, 바람, 안개, 이슬들을 애무하노라면 어느새 사르르 몽그라지는 속살 단물 흥건한 붉은 가슴이다 그 잘 익은 홍시는 튼실히 자라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보내진 뜻대로 쓰이길 바래는 내 아버지의 마음, 나는 아직도 그 밭에서 자라는 유년의 감나무 오늘도 잘 익은 홍시 까만 젖꼭지 떼고 흐믈어져 끝내 매달렸다 누군가의 달디단 살이 되었다 붉은 인장을 찍는데... 나는, 나는 더 붉고 싶다 붉고 싶다 끝내 꼭지를 놓지않는 새파란 땡감, 해마다 그 해마다 더 붉고 싶어 홍시는 물러가는데 왜 가을은 나를 익히지 못하는가 무르지 못하고 얼굴만 붉은 떫어 탱탱한 부끄러움아, 아- 내 가을아. -2004년 시월 초 하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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