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도 영글어 갑니다

2005.11.23 11:29

정찬열 조회 수:154 추천:3

K 형,
광주를 생각하면 월드컵 4강의 순간이 떠오릅니다. 마침내 한국축구가 4강에 진출하던 날, 전국에서 500만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는 그 날. 뉴욕, 워싱톤, 시카고, L.A를 비롯한 이곳 오렌지카운티 등, 미국에 사는 수많은 동포도 거리를 누비며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젊은이들은 차에 태극기를 달고 시가를 질주하고, 미국시내가 한동안 온통 한국의 어느 도시 한복판인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습니다. 남의 땅에서 언제나 조심스럽고 다소 주눅이 들어 지내오던 우리들이 이처럼 큰 소리로 마음껏 외치고, 남의 하늘아래 자랑스럽게 우리 국기를 휘날릴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다 후련했습니다.  이곳 L.A 타임스 신문도 ' It's a Korean Cinderella Story'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4강 진출을 크게 보도하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K 형, 18년 전 제가 미국 온 다음해에 태어난 딸 수지가 어느새 고등학교 3학년, 아들 승이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이 녀석들에게 미국과의 시합을 앞두고 어느 쪽을 응원하겠냐고 물었더니 한국을 응원하겠다고 대답하더군요. 다른 아이들은 어쩌나 싶어 내가 교장으로 있는 우리 남부한국학교 학생들 120명을 대상으로 같은 질문을 해 보았더니 90%가 한국을 응원하겠다고 답변해서 약간은 놀랐습니다.
터어키와의 경기가 있던 날, 이곳 L.A 프로축구구단 갤럭시의 티모시 르위키 사장이 우리 동포들의 응원을 위해 L.A명물인 스테이플스 실내경기장을 무료로 빌려주었습니다. "미국이 8강에 오르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한국이 포르트갈을 눌러준 결과"가 아니냐며 한 번 사용료가 20만 달러나 하는 실내체육관을 선뜻 빌려준 것입니다.
그날 새벽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새벽 한 시에 집을 나서 응원을 갔었습니다. 2만명을 수용하는 체육관은 붉은 색으로 넘실거렸고 뜨거운 응원의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새벽 네 시 반, 이윽고 경기가 시작되자 나보다도 더 열심히 응원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번 월드컵으로 우리 2세들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흐뭇했습니다.
한국팀 경기가 있는 날마다 시간차도 아랑곳 않고 새벽잠을 떨치고 합동 응원장에 나와 붉은 옷을 입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를 목이 쉬도록 외치며 응원을 하던 그 많은 동포들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조국이란 무엇인가, 핏줄이란 게 무언가.
월드컵의 열기는 여기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올해 29번째 열린 한인축제에 황선홍 선수가 그랜드마셜로 참가했습니다. 제임스 한 L.A시장과 나란히 카 퍼레이드를 벌이는 황선수를 연호하는 소리가 L.A하늘을 뒤덮었으며, 황선수의 사인을 받기위해 청소년들은 새벽 4시부터 신문사 앞에 줄을 서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또 최근에 L.A붉은악마 클럽이 11세-14세의 한인청소년을 대상으로 축구클럽 '레드 스타'를 창단했습니다. 흑인, 백인, 라틴계등 각 지역 컴뮤니티 팀과 겨룰 이들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축구공 하나가 세상을 바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믿음, 꿈은 이루어진다는 신바람 하나가 지구촌 한인 모두에게 세상을 살 맛 나는 곳으로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K 형,  남의 땅, 낯선 하늘아래 태극기가 물결치던 여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매일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싶던 그 뜨겁던 열기는 식지 않고, 4천 7백만 한국인, 그리고 6백5십만 해외동포가 한 마음으로 '대-한민국'을 연호하던 그 소리도 아직 귀에 쟁쟁합니다.
붙잡아 메어두고픈 여름은 가고, 이제 가을이 깊어갑니다. 뜨거운 햇살이 과일을 달게 익히고 곡식을 여물게 하듯이, 월드컵의 열기로 한 여름을 달구었던 올 가을은 더욱 풍성할 것 같습니다. 소슬한 바람소리에 우리들의 꿈도 함께 영글어 갑니다.

                                                          10-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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