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수, 김재진, 고재종, 박현덕, 김영랑

2006.01.23 02:22

김동찬 조회 수:486 추천:11

*** 86

빈대를 잡으려다 진짜로 초가를 태운 사람이 뒷집에 산다. 두고두고 동네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그 사람이 봄날 죽었다. 상여 나가기 전날 밤 술 마시고 윷 놓던 사람들 눈물 대신 웃음 참느라고 죽을 지경이다.

     이창수 (1970  -   ) 「好喪」전문 

 복받은 사람임에 틀림 없다. 비명횡사하지 않고 천수를 누리다 고향 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며 꽃피는 봄날에 떠나는 것이다. 고인은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를 태운 적도 있어서 상여 나가기 전날 밤까지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눈물 대신 웃음을 선사한다.  술마시고 윷을 놀면서 밤을 보내는 조객들의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전구알이 못 미치는 뒷뜰의 한 구석에는 봄꽃이 지고 있다. 빈대보다 못한 것을 잡기 위해 자신과 이웃을 죽이고 눈물과 증오만 가득 주고 떠나가는 사람들에 비해 고인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얼마나 즐거운가. 

*** 87

당신 만나러 가느라 서둘렀던 적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
도착하지 않은 당신을 기다린 적 있습니다.
멀리서 온 편지 뜯듯 손가락 떨리고
걸어오는 사람들이 다 당신처럼 보여
여기에요, 여기에요, 손짓한 적 있습니다.
차츰 어둠이 어깨 위로 쌓였지만 
오리라 믿었던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입니다.
어차피 삶 또한 그런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오지 않듯
인생은 지킬 수 없는 약속 같을 뿐
사랑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실망 위로 또다른 실망이 겹쳐지며
체념을 배웁니다.
 (하략)  

         김재진 (1955 -     )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분

잔인한 달이라는 4월이 가고 계절의 여왕 5월의 문턱입니다. 돌이켜보
면 4.3과 4.19 그리고 4.29 엘에이 폭동 또 최근의 중동과 룡천에 이르기
까지, 4월의 꽃향기 사이에는 피냄새가 묻어있습니다. 그 격동의 시간에 
당신은 왜 오지 않으셨는지요? 다시 당신을 만나기 위해 5월로 나갑니다.
"잦은 실망과 때늦은 후회,/부서진 사랑 때문에 겪는/아픔 또한 어득해
질 무렵/비로소 깨닫습니다./왜 기다렸던 사람이 오지 않았는지,/갈망하면
서도 왜 아무 것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지,/사랑은 기다린 만큼 더디 오
는 법/다시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나갑니다 ."(위 시의 하략된 나머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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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흐르고 흐를 것이 있어서 강은 
우리에게 늘 면면한 희망으로 흐르던가. 
삶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듯 
굽이굽이 굽이치다 끊기다 
다시 온몸을 세차게 뒤틀던 강은 거기 
아침 햇살에 샛노란 숭어가 튀어오르게도 
했었지. 무언가 다 놓쳐버리고 
문득 황황해하듯 홀로 강둑에 선 오늘, 
꼭 가뭄 때문만도 아니게 강은 자꾸 야위고 
저기 하상을 가득 채운 갈대숲의 
갈대잎은 시퍼렇게 치솟아오르며 
무어라 무어라고 마구 소리친다. 그러니까 
우리 정녕 강길을 따라 거닐며 
그 윤기나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던 
날들은 기어이, 기어이는 오지 않아서 
강물에 뱉은 쓴 약의 시간들은 저기 저렇게 
새까만 암죽으로 끓어서 강줄기를 막는 
것인가. 우리가 강으로 흐르고 
강이 우리에게로 흐르던 그 비밀한 자리에 
반짝반짝 부서지던 햇살의 조각들이여, 
삶은 강변 미루나무 잎새들의 파닥거림과 
저 모래톱에서 씹던 단물 빠진 수수깡 사이의 
이제 더는 안 들리는 물새의 노래와도 같더라. 
흐르는 강물, 큰 물이라도 좀 졌으면 
가슴 꽉 막힌 그 무엇을 시원하게 
쓸어버리며 흐를 강물이 시방 가르치는 건 
소소소 갈대 잎 우는 소리 가득한 세월이거니 
언뜻 스치는 바람 한자락에도 
심금 다잡을 수 없는 다잡을 수 없는 떨림이여! 
오늘도 강변에 고추멍석이 널리고 
작은 패랭이꽃이 흔들릴 때 
그나마 실낱 같은 흰줄기를 뚫으며 흐르는 
강물도 저렇게 그리움으로 야위었다는 것인가. 

     고재종 (1957 -  )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전문

고재종 시인은 흔히 농촌시인이라 불리운다. 김용택 시인과 마찬가지로 
농촌인 고향을 떠나지 않고 그 농촌의 사람과 풍경들을 주된 소재로 시를 
써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농촌시인이라 한정하고 싶지 않다. 우
리 모두의 고향이 농촌이 아니었던가. 그 산과 강, 땅이 아니었던가. 그는 
자연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뿌리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 시
인이다. 
농촌에 강이란 단순히 풍광 좋은 휴양지 같은 곳이 아니라 곡식을 기
름지게 만드는 삶의 원천이다. 그 강이 야위고 있다. 결국 농촌만 야위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도 병들고 허약해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
는가. 강변에 파닥이는 미루나무 잎새와 물새들의 노래, 그리고 그 아래로 
쏴아하고 흐르는 큰 물줄기에 대한 그리움으로, 강도 나도 야윈다. 

*** 89

송정리역 앞 1003번지 
맨몸으로 버티는 

방직공장 
그만 둔 
스물 넷 
언니가 산다 

밤마다 
환장하게 피어 
쪽방 밝힐 
자궁꽃 

      박현덕 (1967 - )「송정리 시편 1」 전문 

만개해있는 꽃이 처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시들 날이 얼마 남지 않
았다는 걸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방직공장을 그만 둔 스물 넷의 언니꽃이 밤마다 활짝 피어난다. 가장 
화려하고 행복해야 할 시기에 송정리역 앞 쪽방을 밝히는 자궁꽃이란다. 
아가씨나 여자가 아닌 언니라는 호칭에 묻어있는 따뜻한 시선이 화자가 
왜 환장하는 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 90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 1903 - 1950 ) 「모란이 피기까지는」전문

모란이 피기까지는 아직 봄이 온 것이 아니다. 모란이 지고 나면 봄이 
사라짐은 물론 내 한 해도 다 가고 만다. 시쳇말로 모란이 없는 세상은 
고무줄 없는 빤쓰란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는, 모란이 피어있
는 봄을 왜 기쁨이 아니고 슬픔의 계절이라고 했을까. 그리고 왜 그 슬픔
이 찬란하다고 했을까. 
인생의 봄, 청춘, 사랑도 아름답다. 그러나 결국 곧 사라지고 만다는 것
을 알기에 더욱 찬란하게 느껴진다. 모란도 그래서 그냥 모란이 아니다. 
유한한 인생을 살다가는 시인이 마음속에 담고 싶어 하는 지고한 아름다
움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