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미국 샤핑몰

2004.08.09 10:06

오연희 조회 수:273 추천:1

난 12년 전 상사 주재원 가족으로 미국에 왔다.  나의 가족이 살아갈 아리죠나의 시골동네엔 고층건물이 거의 없어 건물들이 모두 땅에 딱 들어붙어 있는 것 같았고, 대부분의 집들은 너무도 크고 넓었다. 사람 그림자도 저녁무렵이 되어서야 볼수 있으니 외딴곳에 뚝 떨어진것 같은 쓸쓸함에 우울증이 걸릴 지경이었다. 그런 어느날 우리가족은 미국 온지 삼개월만에 대망의 LA 한인타운에 입성했다.

한인타운으로 들어서는 길에 차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한국말이 어찌나 반갑던지 차에서 내려 “한국 분 이시죠?” 하면서 다가갔다.  그랬더니 ‘원 별 이상한 사람 다 있네’ 하는 듯한 떨떠름한 표정에 참으로 섭섭하고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눈에 쏙쏙 들어오는 한국어 간판을 보니 어찌나 반갑고 푸근하던지 아이들과 함께 환호를 질러대며 흥분했었다. 한국위성방송 광고를 통해서 듣던 한국 슈퍼마켓, 식당 그리고 전자대리점 등등 정말 없는 것이 없었다.  제품 카달로그를 아리죠나까지 보내주던 그 유명한 주방용품점인 XX전기라는 곳에 들렸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가볍고 잘 깨지지 않는다는 코닝그릇을 입맛데로 골랐다.  그리고 조금 비싸지만 꼭 필요한 화장품도 사고 오밀조밀한 장식품도 고르면서 돈 쓰는 즐거움과 소유의 기쁨을 만끽한 신나는 샤핑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영양크림을 한번 사용해보니 유분이 적어선지 건성피부인 내 얼굴에 맞지 않아서 바로 잘 넣어서 보관해 두었다.  사실 그 화장품이 좀 싼거 였으면 그냥 핸드크림 대용으로 하고 말았을 텐데 돈도 돈이지만 건성피부에 맞는 화장품이 당장 필요했다. 그리고 미국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지라 미국 마켓에 있는 화장품에 대해서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꿔야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물건 한번 바꾸려면 그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던지 그때의 불편했던 기분이 잊혀지지 않아 많이 망설였다. 상점 주인의 싫어하는 모습이 역력히 보이면 정말 죄인처럼 기가 죽어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던 일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이곳은 미국땅이니 어디 한번 부딪혀 보자는 마음이 들어 큰맘 먹고 다시 다섯 시간을 운전해서 그 xx전기를 찾아갔다. 두근거리는 가슴 간신히 눌러가며 “얼굴에 안 맞아서요...” 기들어가는 목소리로 바꿔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도대체 사람이 말을 하는데 대꾸를 안하는거였다.  한참 뜸을 들이다가는 그 언짢아하는 얼굴로 “저어기 ” 하면서 반대쪽 나이든 아줌마를 가리키는 거였다. 나는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화장품을 챙겨서 가리키는 쪽으로 갔다. 그 아줌마는 나와 눈길도 마주치기 싫은지 쳐다보지도 않고 매니져라는 남자분을 불렀다.  자기들끼리 수근수근 하더니 돈은 내줄 수 없고 다른 물건으로 바꿔가라는 거였다. 나는 어찌나 겁이 나던지 다른 화장품으로 바꿔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별로 사고 싶은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코닝 그릇 쪽으로 가서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정신 없이 쑤셔 넣어선 급하게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 후 그렇게 세일광고를 대단하게 때려도 난 그곳에 가본적이 없다.

몇 주전 나의 가정에 교회손님을 초대한 적이 있었는데, 오시는 분들이 돈을 모아 선물을 사왔다. 예쁜 도자기 그릇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뚜껑이 아주 약간 벗겨져 있었다.  그냥 쓸까 하다가 장식을 하던 사용을 하던 아무래도 마음이 찜찜해서 그 그릇을 바꾸기로 했다.  하지만 어디서 샀는지도 모르고 영수증도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릇 뒤에 Robinson's May 라는 표시가 보였다. 안바꿔주면 그만이니까 가서 말이라도 한번 건네보자는 생각으로 집 근처에 있는 Robinson's May에 갔다.

먼저 내가 바꿀려는 물건과 같은 것이 있나 없나 열심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매장안을 다 둘러봐도 같은 물건은 찾을 수가 없었다.  포기하려다가 그냥 말이라도 한번 해보지 뭐 하고는 계산대 앞에 갔다.  모습이 고운 미국 할머니가 살포시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선물을 받았는데 영수증도 없고 이렇게 약간 벗겨졌으니 어쩌면 좋으냐며 몇 마디 떠듬거렸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너무도 안타깝다는 표정으로“같은 물건이 없어서 정말 미안하다.” 며 예상도 못했던 대답이 할머니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너의 크래딧 카드에다가 돈을 넣어 주겠다는 거였다. 그리곤 넌 정말 beautiful skin 을 가졌구나 하면서 칭찬까지 해주는 바람에 난 그 할머니에게 반하고 말았다. 아니, 미국의 리펀시스템과 삶의 여유가 느껴지던 종업원의 태도에 반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정말 미국 샤핑몰은 좀 멍청한게 아닐까? 난 그 후에 그 멍청한 Robinson's May Card를 발급 받아선 웬만한 물건은 그곳에서 구입한다. 주말엔 세일도 엄청 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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