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 그리고 노우

2005.02.13 02:40

이성열 조회 수:344

"당신더러 누가 영어 배워 오래? 집에서 살림이나 잘 하면 되지!"
장기선 씨는 학원에 갔던 아내 영순을 차로 데려다 놓으면서 이렇게 한 마디 씹어 뱉었다.
"말 좀 할 줄 안다구 하두 무시하니까 나도 좀 배워야겠네요."
그녀는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한 마디 더 하면 이젠 아예 자동차를 한 대 사놓으라고 버티고 나올 판이었다. 그러니 정말 기가 막히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하긴 그도 아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하고 밖으로 나다니는 것도 아니니 한사코 나무랄 수만은 없다. 단지 자신을 귀찮게만 하지 않는다면 영어공부 아냐 더 한 걸 한다고 한들 누가 말리겠는가.
"당신 지금 그 잘난 말 배우러 다닌다고 사람을 얼마나 피곤하게 만드는 줄 알아?"
"아이구, 또 그 소리, 그러니 차를 사 줘요!"
"차를 사주면 운전이나 할 줄 알아?"
"그러니까 이제부터 닥치는 대로 배워야지요! 사고를 치든 말든-."
"배워 뭘 할 건데......염라대왕 앞에서 자격시험이라고 치른답디까?"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나도 배우면 못할 거 없다구요."
"흥, 불원간 집에서 학자 한 분 나오시겠군..."
"지금 누구 비꼬는 거예요? 그럼 내가 영어 학원에 안 가는 대신 남들처럼 매일 사우나다, 사교춤이다 한답시고 나다니면 당신 어쩔테요?"
이건 갈수록 태산이다. 아이가 이제 다 자라서 제 갈 길로 가고 할 일이 없어지니까  웬 할 일없이  뭘 배운다고 뒤늦게 사람을 귀찮게 하느냐 말이다. 배우려면 좀 조용히 남이 모르게 해도 되는걸 가지고 돈주고 학원엘 가서 배운다고 매번 데려 가라, 데려다 달라 성화니 이게 보통 귀찮은 일인가.
그가 직장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저녁밥은 이미 차려놓아 찬밥이 되어 있기 일쑤고, 자신은 아내를 데리고 학원인지 어디로 달려 가야하고...장씨는 그러는 아내가 못마땅해 무슨 방도를 취하든지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미국까지 와서 영어야 그 흔한 성인학교에 가서 배우면 되는 걸 가지고, 그런 곳은 시시하니까 사설학원에 가서 배워야  한자를 배워도 제대로 배우게된다는 발상부터가 틀려먹은 짓거리였다. 성인학교야 이웃에 있는 고등학교로 걸어가서 배우면 자신을 귀찮게 할 리도 없는 거였다.
그런데 이놈의 엘에이는 빌어먹을 사설학원이 도처에 깔려 있고 그곳에서 TV, 라디오에다 허구한 날 광고를 퍼부어 대니 자신의 아내 같은 귀가 옅은 어설픈 시청자들의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장씨가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모두  안일한 태도가 너무 문제였다. 이민 와서 오래되어 이제 밥 먹고 살만하니까 배들 부른 수작이었다. 그런 태도들 가지고 누가 뭐를 배웠다면, 장씨는 자신의 손에 장이라도 지지라면 지질 판이었다. 무슨 학교가 좋네 틀렸네, 또는 책이 좋네 나쁘네 하고 아내가 사들인 영어 책만 해도 한 타스는 좋게 넘었다. 새 책을 사면 그 서두 요령 말만 읽기에도 몇 주는 소비해야 될 판이었다.
영어를 웬 만큼 한다고 자신하는 장씨 자신은 영어를 그렇게 익히지 않았어도 성적만 괜찮았다. 그가 이민 올 때 가지고 온 영어 책은 단 두 권뿐이었다. 참고용 기초영어 한 권과 그리고 고등영어 문법책이 그것이다. 그는 자고 나면 그 두 권만을 열 번이고 닳도록 읽었다. 그래서 얼마 후엔 자연히 무슨 말하면 몇 페이지하고 스스로 외워질 정도였다. 그 실력 가지고 그는 직장도 구하고 별 불편 없이 미국생활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 시중에 유행하는 책들이 있어 들여다보면 기초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별 기상천외한 표현법들을 배우라고 강요하니 기초도 모르는 그들이 언제 그런 말을 쓰고 살아간단 말인가.  
그런 값진 경험과 느낌을 아내에게 말해 줄라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 그만 하시우! 지금 누가 그런 문법 책 가지구 들여다 보구 있수? 당신 같은 천재나 그렇게 했지 나 같은 바본 그렇게 못하겠수!" 하며 코방귀를 뀌어대고 듣질 않으려는 것이다. 한심하기 이를 데 없지만 세상일이 다 내 맘 같지 않으니 그게 문제였다. 하여간 아내는  당분간 계속 돈 들여 저 짓을 할 모양이었다.
이젠 여편네 기사 노릇 하느라 일 갔다 와서 자곤 하는 꿀 같은 잠은  다 틀려먹은 것이다.                                                              
"당신에게 온 거유."
장씨가 TV를 보며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편지를 점검하던 아내가 빨간 카드 하나를 불쑥 내밀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가 받아서 후딱 살펴보니 빨간 색이 있는 딱지였다.
"이거 쥬어리 통보 아냐?"
그는 편지를 받아 들고 심기가 틀린 듯 중얼댔다. "이런-쯧!"
말 그대로 빨간딱지 한 통을 받은 거였다.
"빌어먹을...... 구실을 적당히 써서 붙여 보냈는 대도......"
장씨가 투덜대듯 말끝을 흐렸다. 통보는 법원으로부터 날아온 배심원 하라는 최후 명령이었다.  서비스니까 말은 봉사인데, 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는 미국시민이면 마땅히 세금을 내야하듯 누구나 해야하는 준엄한 시민의 의무 중 하나였다. 그래서 좋은 말로 서비스지, 원래는 쥬어리듀티였다. 그러니까 법원은 경고의 뜻으로 그 통지서를 빨갛게 포장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잔뜩 겁을 먹게 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그래도 그 경고에 코방귀를 뀌기가 일쑤였다. 많은 이들은 그 통지를 받고는 곧장 쓰레기 통으로 던져 버리면 그만이었다. 얼마 전 신문보도에 의하면 시민 전체의 3분지2가 그런 식으로 신성한 의무를 비웃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 당국에서도 새해부터는 법을 보강하여 엄연한 법 제도를 비웃는 자들을 처벌하기로 방침을 정했다는 거였다.
배심원 의무를 거부할 경우, 2천 달러의 벌금을 내던가, 아니면 상당기간의 철창신세를 지던가  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인지 시민권자인 그에게도 여지없이 신년벽두부터 통지가 내달은 모양이었다.
전 같으면 예비통보에 '나는 영어 못합니다.' 라고 만 써서 보내도 액면 그대로 받아드려 일단 면제가 가능했었다. 사실 전문용어들이 난무하는 법정에서 장씨처럼 다 커서 이민 온 이민 1세들이야 그런 일을 감당한다는 게 무리가 아닐 수 없다고 그는 늘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장씨로선 작은 걱정거리가 될 만한 일이 생겼다. 그는 비즈니스로 연명하는 자영업자의 신세나, 일당을 벌어먹고 사는 막 노동자는 아니므로 배심원종사로 인해 수입에 지장이 있거나 하지는 않다. 그는 회사원이니 만치, 그 일로 출근을 못 하게 되어도 생계엔 아무 지장이 없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그런 보상제도 하나는 잘돼있었고, 그래서 한도 끝도 없이 그런 일에 끌려 다녀도 잔소리 하나 없이 봉급지급이 보장된다. 그래서 법원 당국에서도 시에 소재한 그런 유의 몇몇 회사 직원들을 특급으로 환영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런데 장씨의 뒤가 무린 것은 바로 말의 해득이 이들처럼 자신이 서질 않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살아 온 지는 10년도 훨씬 넘었어도, 그리고 남들은 자신이 그런 인상을 주어서인지 영어를  꽤 잘 한다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장씨 스스로는 그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신 쥬리 듀디 나가실려우?" 아내가 또 퉁명스레 물었다.
"왜 자꾸 묻는 건데?ü
"아니, 당신이 신경 쓰는 것 같아 그렇죠. 그 정도로 말만 잘하면 나가도 되지 뭘 그러우. 내가 그 정도면 얼씨구 나가서 줄줄 잘하는 말로 시원하게 연설이라도 하겠수"
여편네가 그만해도 한치건너 자기 일이 아니라고 말은 쉽게 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영주권자이고 말을 못해서 그렇지 말만 잘하면 시민권을 따서라도 그 정도야 얼마든지 나가서 하겠다는 거였다. 말도 못하는 주제에, 그리고 한국에 있는 재산 문제로 시민권 따기를 회피하면서도 그걸 빌미로 이렇게 남편에게 약을? 올렸다. 이건 꼭 강아지가 뭐 무서운 줄 모른다고 이곳에서 직장생활도 안 해본 주제에 큰 소리는 도맡아 하고 있었다.  
ü당신 왜 영어 잘하지 않수?é  
"왜? 내가 배심원 안 가서 집안이 안 돼는 일이라도 있나?"
"왜 그런 말을 허우! 나야 뭐 당신이 영어 잘 하니까 자랑스러워하는 말인데- ...ü
"그래, 남편  하나 잘 뒀다."
아내는 남편의 영어실력을 가지고 틈만 나면 물고 늘어졌다. 적어도 남편인 장씨 생각엔 그랬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곧 잘 영화를 보거나 TV를 볼 때는 정말 알고 싶어서 인지, 아니면 장씨에게 시험삼아 떠보자는 건지 지나간 말을 무슨 뜻이냐고 묻고는 해서 장씨를 당혹하게 만들곤 했다. 그러면 어물어물 둘러대서라도 넘기곤 했는데, 얼마 전엔 중국인 미국작가 에이미 탠이 썼다는 â엄마의 부엌이야기ä라는 영화를 보는 도중 여자들이 미용원에서 뭐라 지껄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내가 이렇게 묻는 거였다.
ü지금 저 딸이 한 말이 무슨 뜻 이유?é
장씨도 그 지나가 버린 말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모른다고 하기도 뭣하고 해서 그냥 우물거리는데 아내가,
ü왜 대답이 없수? 말이 말 같지 않우?é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도 홧김에,
ü누가 뭐 할 일없이 여자들 지껄이는 소리나 다 듣고 그래?é
ü아, 그럼 뭐 극장엔 잠자러와요?é
ü이 여편네가 누굴......é
하며 서로 투덜대고 주고받는 바람에 비싼 돈주고 영화보다가 기분만 잡치고 나온 적도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왕지사 배심원 소집통보를 받은 이상 나가서 잘 해내고 돌아와야 아내에게도 체면이 서게 되고, 오랜만에 시민 된 의무도 하게 되는 셈인데, 왠지 처음 나가는 직장처럼 뒤가 켕기는 느낌은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장씨가 이곳미국에 와서 살게 된 것도 어언 강산이 두 번 가까이 변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언어란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신비에 가까운 마술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물론 그가 이곳에 오래 살아서 말하고 알아듣고 생활하는 덴 지장이 없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생활범위 내에 국한된 능력이었다. 그 실력이란 게 솔직히 말하자면 겨우 밖에 나가 물건을 사고 얼마인가를 묻는 일, 또는 길을 잃었을 때 그걸 물어보는 일 등이 고작인 것이다.
하긴 직장이 외국직장이니 대화가 통하니까 봉급을 받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직장에서 쓰는 언어도 얼마를 지나게 되면 일정한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겨우 일에나 국한된 그런 암호가 되게 마련이다. 그러니 법원엘 가서 사건을 이야기하고, 듣고, 판단하는 일을 놓고 장씨가 마음이 가벼울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나는 말을 못하니까-' 하며 의무를 피하려는 태도를 소극적인 의무회피로 간주하기보다는 넓게 이해하려는 편이었다. 이렇게 모두들 '나하나 빠지면-' 하는 식으로 너도나도 시민의무를 회피하면 종국에 가선, 코리언들은 돈만 알았지 의무는 무시하는 민족으로 낙인찍히게 될 것은 자명한 노릇-이라고 인정은 하고 있어도, 막상 그 말이란 게 이토록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같이 이민을 사는 소수민족 중에서도 일본인들은 그런 의무를 철저하게 잘 지킨다는 평이 돌고 는 있지만, 그들의 그 짧은 혀로 굴리는 언어 실력으로 어떻게 감당해 내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여하튼 이번엔 벌금도 면해야 하고 속수무책으로 나가긴 해야겠는데, 스트레스가 벌써부터 먼지 쌓이듯 하는 기분은 면할 수가 없었다.

며칠이 금방 지나고 소집날짜가 되었다. 장씨는 통지서에 써 있는 주소대로 정부 청사들이 몰려있는 LA다운타운으로 향했다. 다운타운 하면 으레 자동차 주차 문제가 골머리를 썩히고 있다는 사실도 하나의 기우(╤úΘ╪)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다행히도 배심원들을 위하여 당국이 커다란 주차시설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주차장 건물이 아예 정부의 재산인지, 아니면 개인 재산을 전용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런 대로 불편함은 없었다.
단지 자동차의 키를 차에다 그대로 두고 가라는 종업원의 말이 좀 못마땅하기는 해도 그런 대로 견디는 수뿐이 다른 방도가 없다.
사람들은 배심원 의무를 위하여 구름처럼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5층은 됨직한 주차시설이 순식간에 자동차로 빼곡이 들어찼고, 그로부터 뱉어 놓은 사람들의 행렬이 법원으로 향한 길을 가득 메웠다.
법원 건물에 도착해서 화살표가 가르치는 대로 사람들을 따라 가보니 커다란 대기실이 나왔다.
그곳에는 이미 일찍 나와 도착한 사람들로 만원버스의 형국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곳은 인종 전시장을 방불했다.
로스앤젤레스가 국제적인 대 도시인 만큼 인종의 종류도 다양했다.
분포로 보면 흑인들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다음이 백인들, 맥시코인, 아시안, 인디안, 크게 이렇게 분류되었지만, 겉으로 분류가 불가능한 국가별로 분류한다면, 아마도 세계인 중에 빠진 종족은 없을 성싶었다. 동양인들도 더러는 보이는데, 그 중에 간혹 한국인들도 섞여 있는 듯 했다.
얼마 후 법원서기로 보이는 뚱뚱한 흑인여성이 사람들 앞에 서서 육성으로 외치고 있다.
  "오늘 나온 사람 중에 만일 자신이 배심원으로 봉사하게 되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되는 사람은 10층에 있는 상담자에게로 지금 당장 가시라! 그리고 그 나머지는 다시 우리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자리에서 대기하라!"
대략 이런 요지의 말이었다.
장씨는 순간적으로 자신도 상담원에게 가서 언어문제를 핑계로 면제를 요구해 볼 까 생각하다가 아내생각을 하고는 곧 포기했다. 면제를 그렇게 쉽게 해 주지도 않겠지만, 왠지 어슬렁대며 그냥 돌아간다 해도 아내의 눈치로부터 영 자유로울 것 같지가 않았다.  

배심원 신분카드를 지급 받은 후 대기실에 앉아 약  5분 정도를 기다리니, 다시 이번에는 깨끗하게 잘 생긴 흑인청년이 나와 배심원 의무에 관한 일정 및 제반 준수사항을 말하였다. 말하자면 오리엔테이션 시간이었다.
"-매일 출두 시간은 8시 45분이고, 점심 시간은 12시부터 1시 반까지이며, 4 시에서 5 시 사이에는 집으로 갈 수 있다. 자동차 주차는 안심해도 좋으며, 열쇠는 차에다 두고 내려라. 만일 긴급한 사정이 발생할 경우, 법원으로 전화를 꼭 걸어야 한다.-" 등등의 공지사항이 끝나고 나자, 이번에는 곧바로 그의 소개로 법원 간부로 있다는 아주 건장하게 생긴 백인신사 한 명이 등장되었다.
그 때부터 그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장씨를 포함한 배심원 후보 모두는 귀를 모으고 그의 연설을 들었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이 배심원 자격으로 이곳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이다. 우리 법원으로 볼 때 지금은 어느 때보다 더 배심원들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도시 범죄는 나날이 늘고, 법원 업무는 어느 때보다 가중되고 있다-"
연설이 조금 지나자 장씨는 늘 버릇처럼 그가 하는 말들을 건성 흘려듣고 있었다. 미국에 오래 살다 보니 이제는 알아듣는 말보다 못 알아듣고 무심히 흘려 버리는 말이 많고, 차라리 그게 버릇이 되어 갔다. TV에서 뉴스를 듣거나, 오늘처럼 연설을 들을 때면 으레 몇 마디를 듣다가 의식이 깜박하고 외출을 다녀온다. 그야말로 한 귀로는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는 행태가 버릇처럼 돼 버린다.
그러니까 이들의 말을 100% 다 못 알아듣는 것도 필연적이고, 점점 그게 버릇이 되다시피 한다. 열 마디를 알아듣다가도 한 마디를 흘려 버리면, 그 문장에 담긴 분명한 뜻을 놓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그 연유를 생각해 보았다. 이제 자신도 모르게 다가오는 나이 탓인가?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집중력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매려는 노력 끝에 겨우 그 연설의 맥락을 대충 이렇게 잡아갔다.
"-여러분의 배심원 의무가 우리법원의 전통이 되어 온 것은 약 9백여 년 전부터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양심, 즉 착한 심성으로 살아가게 마련이므로, 보통 사람들인 당신들 같은 배심원들의 양심적 판단이 가장 정확한 판단이라는 신념에 나는 지지를 보내고 싶다.
그것도 배심원 전원의 만장일치의 판결일 때, 그 판결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공정한 판결이 되는 것이다. 물론 언젠가 미디어의 촉각을 곤두세우는 스타 판결 때와 같은 유명인사들에 대한 경우는 예외이지만, 대체적으로 배심원 제도는 이 지구상 어느 제도와 비교해도 가장 합리적인 제도임에 의심에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이 우리 사법제도를 담당해 가는 일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재판에 임해 주기 바란다.-"
  9백 여 년이라-, 장씨는 혼자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웃기는 인민재판 식의 배심원 제도의 개혁은 불가능한 게 아닐까?
9백 여 년씩이나 해온 오랜 전통을 어떻게 바꾸어 보려고 꿈이나 꾸겠는가?
장기선 씨는 간혹 러시아의 <톨스토이>나 <도스또옙스키>의 소설에서나 읽어 본 기억이 있는 배심원 제도를 보고 이해하는 중에 많은 회의를 가지고 비판으로 일관해 온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 비판은 몇 해 전 매스 미디어가 온통 떠들썩했던 모 축구선수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자신의 아내였던 사람을, 그것도 하나도 아닌 친구까지를 합하여 둘씩이나 무자비하게 도륙(╙⌡╫└)을 내어 죽인 게 손바닥을 보듯 뻔한 사실임에도, 돈의 위력에 의해 무죄평결로 결말이 지어지다니-.
그래서 배심원 재판은 전문성이 결여된 재판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도대체 장씨처럼 공장에 가서 시키는 일이나 하고, 집안에서 살림이나 돌보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무슨 전문적 법을 안다고 귀중한 사람들의 생사여탈(▀µ▐▌µ¿≈¼)을 하는 재판에 관여하란 말인가? 물론 장씨가 배심원 제도가 탐탁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그의 잔뼈가 굵어지고 경험해온 고국의 사법제도에 잔뜩 길들여져 온 탓도 없지는 않다.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판사 3인이 배석하여 논고와 변론을 주고받은 끝에 판사가 대쪽처럼 내린다는 판결이 장씨처럼 보통상식을 가진 이들에겐 얼마나 효율적이며 간결해 보이는가?
하지만 판사 검사도 다 이권에 개입할 여지가 없지 않은 인간들이고 보면, 그들 소수에게만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이 소위 선진제국 사법제도가 주장하는 그럴듯한 근거이고 보면, 그 같은 보통사람은 어느 장단이 더 맞는 건지 이도 저도 마땅찮아 혼란만 거듭 될 뿐이다.
어쨌거나 세상에선 실정법이 현실 법이니 만치, 그도 이렇게 배심원이라고 여러 군상들과 같이 나와 앉아 있긴 있다만, 지금 경험하듯이 정말 비효율적이고 모순인 이 제도 때문에, 국력이 될 막대한 재정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대기실을 떠들썩하게 박수소리가 울려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연설이 끝나고 강사가 사라진 다음, 마이크를 통한 법원서기의 공지사항은 계속 전해지고 있었다.
  고용된 회사에서 얼마 동안 임금을 중단하지 않고 지급하느냐에 따라 그 배심원 후보들을 분류하는 모양이었다. 장씨가 나가는 회사에서는 무제한으로 임금을 지급하고 있으므로, 그는 무제한 지급 범주의 사람들 틈에 끼어 줄을 서다가 한 동양여성을 만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다가,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말이 오가게 됐다.
한국여성이었다. 키가 훤칠하고 눈매가 위로 치켜 올라간 모습이 일본 <카부끼>여성을 연상시키는 인상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깨끗이 감아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 청량 단정 감을 동시에 자아내게 했다. 사투리 말씨로 보아 경상도 출신이 분명했다. 자연스레 기선 씨는 그녀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다.
  "쥬어리 듀티 많이 나와 보셨나요?"
  "처음이에요. 전에는 무시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경고 장이 왔데요. 나오지 않는 사람은 감옥에 보내겠다구요."
  "그래요? 법이 보강되었다더니..."
  "그런가 봐요." 그녀가 수긍을 했다.
  무제한 임금 지급 조에서 등록을 마치고 그는 하릴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가서 옆에 앉았다.
이제부터 말 그대로 무작정 기다리기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이미 사람들은 각기 신문에 얼굴을 박고 그날 새로 나온 뉴스에 코를 박고 몰입하는가 하면, 준비해 가지고 온 책을 읽는 사람, 대기실 뒤에 설치 된 TV를 보는 사람,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서로 사귀어 잡담에 열을 올리는 사람, 이렇듯 기다림에 익숙한 이곳 사람들의 모습은 여러 가지 각색이었다. 장씨가 말했다.
  "무제한 임금 지급 조에 등록이 되었으니 혹시 몇 달씩 끄는 재판을 맡게 되는 건 아닙니까? 언젠가 풋볼스타 심슨 재판 때처럼......,그 땐 열 달도 넘게 끌었죠, 아마......"
"설마 그럴 리야 있겠어요? 하지만 거짓등록을 할 수도 없쟎아요?"
"그렇지요, 거짓말을 하면 처벌을 받는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과연 당국이 이 많은 개개인이 어디에서 호구지책을 삼고 있는지를 확인할 리는 만 무였다. 그래도 아까 강사의 말처럼 보통 사람들이란 자신의 양심에 충실하게 마련이다. 이런 점을 착안한 게 바로 배심원 제도라는 것이다.
"실례지만 직장인이신 모양인데 무슨 일을 하시나요?"
"선생이에요."
"아, 예-. 저는 전기회사에서 일합니다."
"에디슨 캄파니요?"
"아, 예-."
서로는 자기소개가 있은 후 잠시 침묵을 흘렸다.
이 때 마이크에서, "메이 아이 해브 아텐션!(주목해 달라!)" 하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곧 이어서 다음부터 호명하는 이들은 대답하라고 하더니, 이름들을 호명해 대기 시작했다.
이곳 미국이 인종 전시장이라고 한다지만, 특히 그 이름을 들어보면 곧 실감을 하게 한다. 세계 각국의 이름들이 다 모였으므로 호명자인 법원 서기조차도 실수로 잘못 호명하기가 일쑤였다. 그야말로 기기묘묘한 소리의 이름도 다 있다는 데에 너나없이 모두는 실소를 금치 못한다.
잠시 후엔 옆에 앉은 여선생의 이름이 호명되었고, 그녀가 손을 들고 대답했다. 그제야 기선 씨는 그녀의 성이 <손>이라는 걸 알았다.
대략 40여 명의 이름이 호명된 후에, 그들은 5층에 있는 법정 503호로 가서 보고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으며, 손 선생도 재킷과 가방 등 소지품을 주워 들고 그들을 따라 갔다. 약간의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에게 기선 씨는, "좋은 시간 되세요!" 라는 의미 없는 말을 던졌다. 하지만 그도 덩달아 약간의 긴장감이 들었다. 벌써 옆 사람들을 불러대는 걸 보니 말처럼 무작정 기다림의 일과만은 아닌 성싶었다.

말벗이었던 손 선생이 떠나자, 그 자리에 백인 노인 하나가 엉거주춤 와서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래서 장씨도 건성으로, "굿모닝!" 하며 대꾸했다.
머리가 백발이고 살결이 고와서 깨끗한 인상을 주는 60전 후의 노신사였다. 노타이에 회색 양복을 입고 구두는 카우보이의 부츠를 신고 있었다. 그가 장씨에게 미소하며,
"당신 전에도 여기 나온 적이 있소?" 하고 물었다.
장씨는, ü물론이지요!" 라고 대답했다. 노신사가 액면 그대로 맞받았다.
ü나도 이번이 여섯 번째나 돼요. 하지만 내가 막상 재판 심리에 뽑혀 본 건 겨우 한 번 뿐이야. 그들은 나 같은 사람을 싫어하거든. 나는 전직이 <셰리프>이었으니까 웬만한 법은 알고 있고-, 그들은 나를 뽑기를 꺼려하지. 그들이 원하는 배심원들은 좀 감정적으로 좌우되는 사람들만 뽑거든. 즉 자신들의 호소에 쉽게 감동될 수 있는 단순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머리를 쓸 줄 아는 논리적인 사람들을 그들이 제일 원치 않거든. 내가 딱 한 번 뽑힌 적이 있는데, 그것도 내가 마지막으로 더 이상 다른 배심원 후보가 없었기 때문이었지."
장씨는 그가 갑자기 많이 쏟아 놓는 말에 그만 정신이 없었지만, 차차 가닥을 잡으며 듣기 시작했다.
"당신은 어때? 배심원에 선발된 적이 있소?" 노인이 물었다.
"아, 아-아니오. 나도 없어요."
장씨는 약간 당황하며 얼버무렸다. 배심원 경험이 없다고 하면 백인 노인에게 풋내기라는 인상을 줄까 봐 거짓말을 했던 그는 자신이 뱉은 말 때문에 당황해야 했다. 거짓말도 앞 뒤 논리를 맞추려면 머리가 좋아야 한다더니..., 장씨는 언뜻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것 봐요, 당신도 스마트한 사람이라 그들이 뽑으려 하질 않는 거야. 나는 다 안다고. 그러니 이렇게 한도 없이 기다리다가 하릴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거지."
"맞아요! 이건 너무 낭비예요.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동원돼서 많은 시간을 빈둥거리며 놀고 비생산적인 일과로 소일하다니, 나는 이 시스템을 이해할 수 없어요."
사실 이 많은 사람들에게 고용주는 일도 시키지 못하며 급료를 주어야 한다. 또 당국은 당국대로 이들에게 단 돈 5 달라 이지만 일당을 지불해야 되고, 자동차 <거리> 보상도 해야 된다. 이로 인해 단지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주위에 산재한 식당, 또는 작은 상점들밖에 없다. 때가 되면 이들은 구름처럼 밖으로 몰려 나가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
"개선을 해야 되지... 정부의 비효율이 너무 많아. 하지만 이 제도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게 가장 민주적이라는 거야......,그래야 해, 배심원 선발제도를 제한하도록 개선해야지. 퍼렘터리 챌린지(Peremptory Challenge)가 너무 시간과 사람을 낭비하고 있어."
노신사는 이렇게 간단없이 중얼거렸다. 장씨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안되었으므로 얼떨결에 이렇게 물었다.
"그게 뭐요?"
"당신은 배심원에 처음 나온 게 아니라면서 그걸 몰라?" 노인이 갑자기 면박을 주더니,
"변호사들이 배심원을 자기의 식성에 맞도록 고르는 작업을 하는 거야. 즉 배심원 선별작업이지. 그런데 그게 너무 시간을 끌 뿐 아니라, 법정과 배심원들을 지치게 한단 말이야."
장씨는 도대체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듯 하다가도 몰랐으므로, 딴청을 피우기 위하여 준비해온 책에다가 시선을 박고 대꾸를 중단했다.
역시 그는 자신이 이 사회에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다시 절감했다. 이 능력으로 어떻게 배심원에 뽑혀 그 일을 담당해 낼지 내심 걱정이 없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용기 백배해서 대처해 가는 수뿐이 없었다. 따져보면 이곳에 이민 온 후로  어떤 일은 그렇지 않았던가? 이제까지 무슨 일이 닥치던 다 빠른 눈치로만 살아온 게 사실이었다.
처음 성인학교에 나가 다닐 때도 그랬고, 또 직장을 구했을 때도 그랬다. 불완전한 의사소통에서 오는 시행착오로 얼마나 웃지 못할 난센스를 저지르며 계속 살아오고 있는가.
그야말로 얼간이 코미디언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성인학교에서는 <메모리얼> 공휴일에 정상수업이 있는 줄 알고 텅 빈 학교 교정에 나가 헤 메이던 일이며, 직장에서 상관이 마이크로 자신을 부르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화가 난 그가 씩씩거리며 달려와 왜 불러도 대답이 없는가? 고 따지며 대들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지 않는가.
장기선 씨는 어렸을 때 어학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영어 실력이 우수했다는 것만 믿었던 그는, 늘 미국 가서 반년만 지나가 봐라- 10년 이상 배운 영어, 그 까짓 애들도 하는 말을 왜 못해 못 살겠나? 하는 식으로 기고만장했던 때도 있었다.
이민 와서 처음에는 어떻게든 이들이 총알처럼 쏴 대는 말만 알아들으면 당장 살 판이라도 날 것 같은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과연 이들의 말하고 듣는 걸 제대로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매사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여유만 늘어 그럭저럭 하며 살아가고 있나.
물론 이해력이야 처음보다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긴 연설이나 대화를 듣다가 집중력 부족으로 한 두 마디를 놓치고 나면 전체 뜻의 맥락을 못 잡고 헤매게 마련이다. 더구나 상대방이 생판 모르는 분야의 화제를 끄집어내어 말하고자 할 때는, 아예 초장부터 말뜻의 갈피는커녕 아는 단어 한 두 마디도 못 잡아내고 포기해 버리는 수도 있다.
또 영어로 표현해야 하는 건 어떤가? 죽을 때까지도 면치 못할 <부로큰> 영어실력, 그야말로 넘어지는 혀에 망가지는 대화가 아니고 무언가.
언어 장벽이란 개인의 피나는 노력부족에서도 기인한다.
그러나 과연 노력만으로 그 높은 장애를 완전 뛰어 넘을 수 있을는지 장씨는 늘 의문이 가곤 했다. 언어 문제에는 신의 비밀이 들어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이가 어리고 철이 없을수록 언어 해득력은 높고, 반대로 나이가 많고 지혜가 높을 수록 그 능력은 떨어지는 모양이다.

장씨가 가져 온 책에다 머리를 박고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을 때, 5층 법정으로 불려 갔던 손 선생이 되돌아 왔다. 그녀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돌아 왔을 땐, 옆자리는 백인 노신사가 앉아 있고 바로 장씨의 앞자리가 비어있기에 그녀가 거기 앉았다.
  "벌써 끝난 거요?" 장씨가 물었고,
  "그냥 내려가라고 하데요." 손 선생의 대답이었다.
  "그들이 너를 원치 않지? 그것 봐요, 당신은 스마트하기 때문이야!"
옆에 앉은 백인 노인이 자기의 해석을 덧붙였다. 그녀가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했고, 장씨는 그녀가 돌아온 이유를 확실히는 몰랐지만 더 이상 묻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냥 일반적 화제로 돌려 이렇게 물었다.  
"그의 말뜻은 다른 게 아니고......,어떻게 생각하세요, 배심원 제도?"
장씨의 갑작스런 질문에 그녀가 아무런 준비도 되질 않은 듯 망설였다.
"글쎄요......갑자기 뭐라 할지... 어리둥절하네요."
"난..., 못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배심원들 전문성이 모자라요.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이 법에 대해 뭘 압니까?"
그녀가 묵묵부답 말이 없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심슨 재판 보세요. 어디 합리성이라곤 찾아보기 어렵질 않아요? 그때 재판이 끝나고 배심원 중에 입심 깨나 센 여자 하나는, 글쎄 그가 평소 아내를 구타한 것은 구타 사건을 따로 심의하면 몰라도 살인 사건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주장을 하던데, 이게 중구난방이 아니고 뭐예요. 전문가가 아닌 배심원들의 주장이 결국 그래요. 그건 바로 1+1=2라는 단순논리인데, 어디 복잡한 사람 사는 일이 그렇게 단순하기만 한가요? 법에서 그럼 정황판단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건데, 그렇다면 뭐 하러 1년씩이나 끌면서 정황 및 증거조사를 하며 애를 씁니까?...
그 재판이 만일 백인 동네에서 백인 배심원들로 구성된 상황하에 행해졌다면 분명 살인죄로 유죄가 되었겠고, 지금 그는 영창에 가서나 평생 살아야 할 팔자일거요. 그런 사람들이 돈이 있으면 죄의 대가는 안 치르고 버젓이 골프만 치러 다니니, 이게 무슨 재판입니까?......이 것도 법이라니까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지만, 아무래도 이 제도는 맞질 않는 거 같아요,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거대한 사회에선......제 생각엔-."
이렇게 말한 장씨는 자신의 주장이 자신이 생각해도 퍽 그럴 듯 했다. 자신이 무슨 변호사라도 되었으면 퍽 유능한 변호사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
하지만 이런 곳에서 한국인을 만나고 마음놓고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처지가 돼서인지, 그는 그 동안 못다 한 말들을 이렇게 장황하게 쏟아 놓았다. 그 선생이라는 여자도 그의 말을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이곳에서 살면서 어설픈 말 때문에 참고 살아야 하는 답답한 심정을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으니, 다 이해한다는 태도였다. 그래서인지 이제 그녀도 입을 열었다.  
"어디 사람 사는 사회 치고 완벽한 곳이 있나요? 그래서 배심원 없는 한국 같은 곳에는 또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이 졸속 재판으로 억울하게 죄도 없이 희생을 당하는 수가 많습니까? 잘못된 재판 때문에 일생을 망치고 죽기도 하잖아요."  
"그렇지요. 그렇지만 이 곳도 크게 나을게 없다고 생각해요."
"하여간 이곳 법제도가 그러니 현실에 적응해서 살아야지요. 아까 연설한 사람의 말처럼 9백여 년이나 계승해온 이들의 법을 좀 불합리하다고 지금 고치겠어요?"

백인 노인은 장씨와 손 선생이 외국말로 이야기하니까 그 뜻을 몰라 끼어 들지는 못하고, 답답한 듯 이 쪽 저 쪽 눈치만 살피며 연회색 눈알만 굴리고 있다.
그때 다시 마이크에서, "메이 아이 해브 아텐션 플리스!" 라는 소리가 나왔다.  점심때가 가까운 11시 반이었다. 산만하게 떠들던 사람들이 긴장을 보태며 조용해지고, 밖에 있던 사람들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법원 서기는 다시 사람들의 명단을 줄줄이 부르기 시작했다. 거의 30여 명의 사람들이 호명된 뒤에, "키 챙!" 하는 장씨 이름을 호명하는 소리가 명백하게 들렸다. 그는 다소 긴장된 음성으로 대답을 하고, 다음 통보사항을 듣기 위하여 귀를 기울였다.
이름이 다 호명된 뒤에 마이크에서는, 지금 부른 사람들은 점심시간이 끝난 오후 1시 30분까지 4층에 있는 402호실 법정에 출두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점심시간이라는 듯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씨도 손 선생을 따라 대기실 밖으로 향했다.
  "식사 후엔 못 뵙겠네요, 들어가시면-." 손 선생이 말했다.
  "어쨌든 다음에 봅시다!"
손 선생께 인사를 건네고 그는 법정 건물 밖으로 나왔다.
점심시간은 넉넉하게 1시간 반이나 되었다. 건물 9층에 <뷔페>식당이 있다는 표시가 있었지만, 그는 무작정 밖으로 나와서 걷기로 하였다.

LA의 겨울은 춥지가 않다. 하늘이 맑은 날 한 낮이 되었을 땐, 차라리 따뜻한 봄이나 가을날씨를 연상케 할 정도로 쾌적하고 이상적인 기온을 유지할 때가 많다.
그는 활개를 펴고 법원건물을 나와 다운타운 동쪽으로 활기차게 걷기 시작했다. 길거리는 생각만큼 불결하거나 위험하지 않았다. 차라리 잘 정돈된 가로수며, 적지 않은 조형공간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히 도시를 즐길 수 있도록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특수한 분위기가 사람들을 활보하게 하지 못하고 차안에 가두어 버릴 뿐이라서 도시가 텅 비어 있을 뿐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간혹 구걸을 하는 거지들이 보이긴 했지만, 그들이 행인을 무섭게 하거나 귀찮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미국은 거지들도 특성이 있는 듯 싶었다. 행인들이 던져주는 돈은 받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들도 어디까지나 민주시민답게 행인들의 자유의사에 맞기는 태도였다. 달랠 때는 마치 맡긴 돈을 달래듯 당당했고, 주지 않아도 크게 마음 쓰지 않아 보였다.
동쪽으로 세 불럭을 걸어가 LA시청 건물을 지나니, 지하도<몰> 이라고 쓴 사인과 함께 그 밑으로 구르는 에스컬레이터가 사람들을 삼키고 있다. 장씨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 틈에 끼어 구르는 체인에다 발을 디뎌 놓는다. 에스컬레이터는 순식간에 그를 지하로 실어다 놓았고, 거기에선 잔치라도 벌어진 듯, 사람들이 활기차게 떠들고 먹고, 여기저기 벌려 놓은 테이블에 앉아서 즐기고 있다.
지하 몰에는 식당들 뿐 아니라, 잡화상, 우체국, 약국 등, 제법 다운타운에서 일하는 도시민들을 겨냥한 편리한 상지대를 구성하고 있다.
장씨는 식당을 이곳 저곳 기웃거리다가 일본식이라고 한문으로 써 있는 음식 진열대로 가서 대강 메뉴를 훑어 본 다음, 테리야끼 한 접시를 주문했다.
차례를 기다려 음식값을 지불하는데 돈을 받던 아주머니가 돌연, "한국 분이시죠?" 하는 바람에,  "아, 네!" 했더니,
"필요한 것 있으시면 더 달라고 하세요." 라며 친절을 베푼다.
그러나 장씨는 사람들이 바쁘게 줄줄이 늘어서 있어 더 이상 말은 못하고 음식을 들고 밖으로 나와 빈 테이블을 찾아서 앉았다.
이곳에서 일본식 식당을 경영하는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생각은 행여 하지를 못했었다. 메뉴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몫이 좋아서인지, 음식값이 다소 비싼 편인데도 고객들이 계속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리고도 그 아주머니의 친절함이라니...
장씨는 즐거운 마음이 되어 점심식사를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곳에는 식당 체인으로 업소들이 줄잡아 열 군데는 되는 성싶다. 중국식, 일본식, 멕시칸 식, 그리고 햄버거 체인인 <빅 보이>,<칼-스>, <버거 킹,> 또한 샐러드 및 샌드위치 점, 등등 없는 것이 없다. 앞으로 배심원을 하는 동안, 하루에 한 군데 씩 이곳에서 식당을 섭렵하면 두 주 정도의 점심은 수월찮게 해결될 것이었다. 옆자리에도 역시 가슴에 배심원 신분증을 단 여자 둘이 식사를 하며 정담을 나누고 있다.

점심을 다 마치고 나서 장씨는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노상으로 올라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서 근처에 있는 공원 같기도 하고 빈 터 같기 도 한 넓지 않은 공터로 들어갔다. 그 곳엔 시계탑이 있고 주위를 빙 둘러 벤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그는 햇볕이 화려하게 비치는 벤치에 가서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꽤 나이들이 먹어 뵈는 <팜트리>며 <시카모어> 등의 나무들이 장씨를 내려다보고 있다.
계절은 겨울이건만, 왠지 장씨에겐 가을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엘에이 날씨도 포근해서 그렇겠지만, 어쩌면 자신 처지가 인생의 가을을 맞고 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그에겐 가을도 이미 만추였다.
세상에 태어나서 가을을 맞는 동안 반에 가까운 세월을 타국인 미국에서 이민생활로 영위하는 셈이었다. 자신이 살면서 이곳에 또 찾아와서 이렇게 앉아 있게 될 기회는 앞으로 몇 번이나 될까?
산다는 것은 참으로 짧은 순간 순간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이곳에 들러 앉아서 이렇게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있다 간다지만, 그것은 아마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평생 일대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게 되는 짧은 찰나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에 비하면 저렇게 서 있는 나무들은 몇 백년을 족히 살아 왔을 나무일 테고, 그들은 장씨처럼 이곳을 들러 앉았다 가는 덧없는 짧은 생명의 인간 몇 세대를 훌쩍 내려다보며 가련하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장씨가 지나 간 후에도 나무는 몇 십 년, 아니 몇 백년을 저렇게 살아 있을지도 모르며, 다음세대에 어느 날 엔간 여기에 또 찾아 온 인간들을 맞아 하염없이 저렇게 내려다 볼 것이다.
얼마 전 TV에서 장씨는 옛날 영화 한 편을 보면서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화면에는 텍사스의 넓은 하늘이 있었고, 듬성듬성 구름이 떠 있었으며, 주위엔 나무들이 있었다. 아마도 그 하늘과 나무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있을 테지만, 그곳에서 젊음과 사랑을 구가하던 인간(배우)들은 지금쯤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 그를 서글프게 만들었었다.
그가 벤치에 무료하게 앉아 있자니 굶주린 도시의 비둘기들이 그의 앞에 하나 둘 모여들어 혹시 먹을거리나 던질까 해서인지 기웃거렸다. 그들의 수명은 얼마나 되는지, 이미 어떤 놈은 늙어서 추레하고, 어떤 놈은 무슨 일로 한 쪽 발가락을 잃어서 뒤뚱거리며 걸었다.

점심시간이 다 지나서 서둘러 법원건물 4층으로 돌아오니, 402호실 앞 복도에는 대략 50여 명의 호명된 예비 배심원들이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더러는 앉아 있고, 더러는 벽에 기댄 채 서서 읽을 거리를 읽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다.
정각 1시 반이 되었을 때, 법정 문이 열리고 유니폼을 입은 <맥시칸>으로 보이는 단단한 체격의 경호원이 복도로 나와서 또 사람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호명을 다 마친 후, 그는 법정 문을 활짝 열고 예비배심원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마치 큰고래가 먹이를 삼키듯 사람들은 순식간에 문만 닫으면 있는 것 같지도 않던 큰 법정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경호원이 시키는 대로 방청석 우편 긴 의자에 우르르 몰려 앉기 시작했다.
법정은 스무 평 남짓한 방이었고, 앞 정면에 판사 석과, 그 옆으로 증언대, 배심원 석, 그리고 반대편에는 법원서기, 경찰, 속기사들의 자리가 가지런히 마련되어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쌍방 변호사들이 넓은 탁자를 놓고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배심원 후보들이 들어서자 마치 지지를 부탁하는 공직에 출마한 후보자처럼 공손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하였다.
음각으로 새겨진 캘리포니아를 상징하는 문장이 박혀 있는 고급 참나무 벽 앞 판사 석에는 하얀 머리를 올백으로 빗어 넘긴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백인 판사가 뒷문으로 들어와 막 착석하고 있다. 그는 근엄해 보이면서도 인자한 풍모를 지니고 있다.
그가 자리에 앉자 경호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예비배심원들을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손짓하였다. 그는 선서하듯 바른손들을 쳐들게 하고 경고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각자 이 법원에 소송이 걸려 있는 사건에 대하여 재판 배심원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기에 당신의 자격과 능력에 관한 모든 질의에 정확하고 진실하게 대답할 것을, 그렇지 못할 경우 위증죄로서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동의하는가?-"
이렇게 읽어 내려가자 그들이 입을 모아, "예-스!"하는 바람에 장씨도 그들과 섞여 함께 동의한 걸로 되었고, 그들은 다 같이 자리에 착석했다.

그때 판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모두들 안녕하십니까? 배심원으로 이렇게 봉사해 주시는데 대하여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각자가 신성한 시민의 의무와 아울러 우리 사법제도에서 아주 중요한 몫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나나 마찬가지로 중요한 재판관의 위치에 있게 되는 겁니다. 단지 내가 입은 검정 가운이 준비되지 않아서 여러분에게 일일이 입혀줄 수는 없지만, 여러분의 역할은 바로 나의 역할과 다른 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 자부심을 가지고 이제부터 있게될 재판에 임해 주길 바랍니다."
장씨는 처음 경험이니 만큼 바싹 긴장해서 판사의 한마디 한마디를 하나도 놓치지 않을 양으로 주의해서 듣고 있다.
그의 말은 분명한 편이었으나 가끔씩 <악센트>에 따라 목소리가 높낮이로 흔들리는 바람에 이해하기에 어려운 점이 없지도 않았다.
판사의 훈시가 계속되었다.
  "이번 사건은 원고인 가필드 씨가 피고인 XX보험회사에 대하여 생명보험금의 지불을 놓고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로서, 내 생각에 약 10일 가량의 심사기간을 요하는 재판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배심원 선정에 들어가겠습니다."
법원 분위기가 쥐 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판사의 말이 끝나자, 왼편에 앉아 있던 법원 서기가 명단을 들고 일어서며, 이름을 하나 씩 호명했다.
처음 호명이 있자 방청석에서 머리가 하얗게 센 백인 할아버지가 대답과 함께 벌떡 일어서서 오른쪽의 배심원 석 1번 자리로 가서 앉았다.
다시 두 번째 이름이 불려졌다. 이번에는 <멕시칸>으로 소년처럼 보이는 젊은이가 자리를 차고 일어나 2번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세 번 째 호명된 이름이 바로 장기선 씨였다. 그도 기세 좋게 크게 대답을 하고 다음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러나 역시 그가 그렇게 기세가 좋았느냐 하면-, 사실은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초조와 긴장감으로 가슴이 몹시 울렁대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들이야말로 새로운 일일뿐만 아니라, 바로 이들 말의 정확한 이해와 해석, 그리고 표현을 필요로 하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장씨 자신과 같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민 온 사람까지를 불러다 놓고 법이라며 강제로 이런 중책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니 그는 나라에서 하라는 대로 순순히 따를 도리밖에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
장씨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도 호명은 계속되었고, 일 차로 15명의 후보들이 마련된 배심원 석을 모조리 채우고 있다.
재판에 필요한 정 배심원 12명에 대기 배심원 1-2명이 더 필요한 모양이었지만, 방청석엔 아직도 20여 명이 넘는 후보들이 대기하고 있다.
배심원 선정과정에서 양측 변호인들에 의해 합당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사람들은 다 축출되고 새 후보들이 다시 올라와 최종 14명이 선발될 것이다. 배심원 석은 이제까지 앉아 있던 방청석보다 월등 높게 위치하고 있어서 법원 구조가 수월하게 눈 아래로 들어 왔다.
배심원 자리 맞은 편으로 서기와 경호원 석, 그리고 한 가운데는 재판과정에서 하는 모든 말들을 기록하는 법원 속기사, 그 맞은 편에 원고 측 변호사와 원고, 그리고 피고 측 변호사가 모두들 참을성을 가지고 배심원 후보들의 자리이동을 지켜보고 있다.
원고는 백인 여자로서 약 50 전후의 나이로 보였는데,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시종 미소를 띄우며 앉아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배석한 변호사는 40대의 백인 남자로 말쑥한 감색 싱글에 날카로운 인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도면밀한 표정으로 옆에 앉아 있는 원고와 기회가 달 때마다 무언가를 귀속으로 상의하곤 했다.
그에 비해 피고 측 변호사는 50대의 뚱뚱한 백인 중년 신사로 덤덤한 표정을 하고 배심원들을 하나 씩 하나 씩 지켜보고 있다.

배심원 후보의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후보가 앉은 순서에 따라 벽에 미리 준비해 걸어놓은 목차대로 자기이름과 거주지역, 직업, 결혼여부와 배우자의 직업, 그리고 배심원 경험 유무 등을 사실대로 열거하고 나면, 판사가 재판의 공정한 심사를 위한 사항 등을 추가로 질문하는, 그런 순서의 반복이 후보 각자에게 차례로 진행되었다.
공무원으로 관청에 다니다가 은퇴했다는 첫 번째 백인 노인을 거쳐, 소포 배달 회사에서 배달 트럭 운전사로 일한다는 맥시칸 젊은이 다음, 장기선 씨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는 벽에 붙어 있는 목차대로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키 챙, 로스앤젤레스 시에 살고 있으며, 자신은 전기회사에서 전기공원으로 일하고 있고, 결혼했고, 아내는 식당에서 주방 <쿡>보조로 일하며, 하나 뿐인 아들은 군에 가 있고, 배심원엔 한 번도 선발 된 적이 없음(이 말을 해야 할 땐 신성한 시민 된 의무를 게을리 한 것 같아 약간 미안한 감이 들었다).  그는 대강 이런 식으로 보고했고, 여기까지는 그래도 잘 한 것 같았으나, 다음에 기여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발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장씨의 자기소개 진술이 끝나고, 판사는 그에게, "당신은 보험회사나 원고 측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요?" 하고 물었을 때, 영어의 '-Yes, -No'사용의 생활화에 아직도 미숙한 그는 그만, "예스!" 하고는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러자 근엄한 표정의 판사는 장기선 씨에게, "어떻게 관계가 있습니까?" 하고 재차 물었다.
판사가 그냥 다음 질문으로 순순히 넘어 가길 기대했던 장씨는, 그만 뭔가가 잘못 되었음을 직감하고, 다시 "노오우!" 하고 소리쳤다.
그랬더니 배심원 후보들 간에는, 킥-킥-하며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하는 작은 소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장씨가 당황해 하자, 다시 판사가, "오우케이, 그러면 당신이 이 사건을 심사함에 있어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심사할 수 있겠지요?" 하고 물었다.
다시 장씨가 "노오우!" 하는 바람에 이번엔 사람들이 못 참겠다는 듯 모두 합세해서, 와르르  웃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Yes, No' 대답에 혼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이제 당혹 감으로 얼굴이 숨길 수 없게 새빨개졌다.
판사도 오히려 난처한 표정이 되어 다시 침착하게  장씨에게 말했다.
"미스터 챙? 당신 이곳 미국에 살고 있는지 얼마나 되었소?"
장씨는 이번에는 신중을 다하느라 조금을 머뭇거리다, "20 년입니다." 하고 공순하게 말했다.
"20년이면 내 생각엔 당신이 충분히 이 일을 해 낼 수 있다고 봐요. 단지 좀 진정을 하고 다시 바르게 대답해 봐요." 하고는 조금 전 질문을 다시 반복했다. 그제야 장씨는, "예스!"하며 바른 대답을 하고 다음 사람으로 순서가 넘어 갔다.

이렇게 해서 장씨에게 1차의 고비가 지나가고, 다른 14명의 순서가 끝났을 때, 이제부터 후보 하나 하나에 대한 원고 측 변호사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원고 측 변호사는 40대의 비교적 젊은 변호사로, 이제까지 장씨가 지니고 있는 변호사에 대한 선입관을 조금도 배반하지 않는 그런 유의 인물로 보였다. 그는 달변이었고, 날카로워 보였으며, 또한 집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장기선 씨의 차례가 되자, 그의 언어문제를 가지고 마치 범죄자 다루듯 잔인하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장씨에게 이렇게 물었다.
  "미스터 챙, 안녕하세요? 우선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은- 내가 이렇게 하는 말을 당신은 몇 프로나 이해할 수 있습니까?"
장씨는 조금 전 자신이 실수를 한 점에 비추어 그가 그렇게 묻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내심으론 상한 자존심 때문에 배알이 뒤틀려 오기 시작했다. 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거의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변호사가,
"오우케이-, 그러면 당신은 배심원으로서 다른 배심원들과도 자유자재로 의견을 교환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고,
  "노력을 하겠습니다." 장씨의 대답이었다.
  "좋습니다."
하더니 그는 다시 예리한 혀로 장씨를 향해 질문의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당신은 Bad Fate Insurance Practice 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질문에 그만 장기선 씨는 그 나마의 말문조차도 딱 막히고 말았다.
그는 아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만을 고집할 따름이었다.
그가 묻는 질문이 무엇인지, 그로선 난생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었기 때문에 영어 자체를 의심도 해 보기에 이르렀다. 혹시 저 사람이 영어가 아닌 불어나 독일어를 구사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는 변호사만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아예 한 참을 묵묵부답 했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건 변호사인 듯 했다.
  "오우케이, 미스터 챙, 그건 그렇고요, 그러면 당신은 Underwriting을 해 본 적은 있습니까?"
아 이건, 갈수록 태산이라 더니-.
장씨는 도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작은 단서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이건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쯤 그는 뭔가 대답은 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 뜻도 모르면서 그냥 감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자신 없이, "노우!" 라고 대답했다.
변호사는 의기 양양해져서 더욱 열을 올리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Punitive Damage 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이 모두는 보험에 관한 법정 용어 인 듯 했으나, 장씨로서는 하나도 알 길이 없었다. 변호사가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장씨는 도저히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자포자기에 빠져 절망하고 있을 때, 법정 어디에선가 또, 킥-하며 웃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 때 그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판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어물어물 영어 단어를 늘어놓았다.
"저-<유어아너!>(법정에서 판사를 부르는 이 호칭도 장씨에겐 하기가 어렵고 쑥스러워 얼마나 마음속으로 훈련을 거듭했는지 모른다) 미안합니다만, 저는 정말 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저를 이 배심원으로부터 면제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다시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고, 판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 미스터 챙을 이 배심원 명단에서 면제해 주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는 양 측 변호사들을 내려다보았다.
피고 측 변호사가 먼저 고개를 끄떡했고, 이어서 원고 측 변호사도 선 채로 승인한다는 눈짓을 보냈다. 판사가 곧 장씨에게,
"미스터 챙, 당신은 면제 됐습니다. 아래층 대기실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그는 이렇게 온갖 망신을 다 당한 후에 간신히 그 자리를 모면하였다. 하지만 판사의 말대로 그가 배심원 의무 자체를 면제받은 건 아니었다. 단지 이 케이스에서만은 면제를 해 준다는 거였다.

그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꼬리를 빼듯 법정 밖으로 서둘러 나왔다.
그는 처음으로 집에 있는 아내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미국시민권자 임을 후회했다. 차라리 아내처럼 영주권자라면 이런 수모를 당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가 뭐 특별히 잘 못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사실 뭐 부끄러울 것도 없는데 왜 그는 이렇게 뭐가 부끄러운가? 수치심으로 얼굴은 물론 전신까지 달아올라 앞이 다 보이질 않을 정도였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얼른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도, 그래서 말이 서툰 것도 죄가 되는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그로서는 배심원에 대한 아무런 노력이나 경험, 준비과정이 없었으니 무엇을 더 기대하겠는가?
왜 법정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동정해 주지는 않고, 킬킬대며 웃기만 하는가? 왜 그들은 내 입장이 돼주질 못하는가?
판사도 그랬다. 면제를 해 주려면 완전히 해 줘서 집으로 가게 해야지, 또 대기실에 가서 기다리라는 건 뭔가. 이 의무가 다 하는 2주 동안 몇 번이고 재판 케이스에 끌려 다니며 이 수모를 겪으라는 말인가.
그는 엘리베이터를 피해 천천히 계단으로 내려오며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마음을 추슬렀다.
층계를 내려 대기실 앞까지는 간신히 왔으나 다시 그 안으로 들어 갈 기분이 내키질 않았다. 분명 대기실에는 같은 한국 여성인 손 선생이 앉아 있을 테고, 지금 이 심정으론 어느 누구와도 대면하기가 싫었다.
그는 발길을 돌려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시계를 보았다. 어느 듯 오후 4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냥 집으로 가 버릴까 하고 생각하다가 또 다시 아내의 얼굴을 떠 올렸다.
아내를 대면하기조차도 부끄러울 것만 같았다. 그는 20년이란 세월을 이곳에 살아왔다. 그런데도 배심원 의무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면 아내는 속도 모르고 자신을 얼마나 비웃을 것인가? 더구나 자신이 못하는 영어 때문에 그 동안 남편인 장씨로부터 수모를 당하며 살아오고 있다고 느껴왔던 그녀로선 내심 복수라도 해낸 고소한 기분이 될 지도 모른다. 살아갈수록 부부라 해도 서로의 허점을 이해를 해 주기는커녕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약점을 잡아 무기로 삼는다는 걸 그는 모르는 바 아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까지 무엇이 잘못이었나? 왜 그는 이토록 치가 떨리는 수치심으로 수모를 당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어디에도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자신처럼 낯선 땅으로 이민 온 처지의 이민자가 서툰 말, 서툰 이해로 어떻게 배심원 같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는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가?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장씨 자신에 있는지도 몰랐다. 왜 그는 â너 자신을 알라!ä는 쉬운 경구를 몰랐나? 그렇게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지고,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알고 애당초 아무런  허영심이나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오히려 아무 것도 괴로울 게 없을 것이다.
자신의 생긴 그대로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 되는 일이었다. 얼간이면 얼간이처럼, 그리고 바보면 바보인 대로 -. 그런데도 그들이 웃는다면, 문제는 웃는 그들에게 있으면 있지, 솔직했던 그에겐 잘못이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정직한 자신의 모습만 보여주면 되는 거였다.
장씨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이런 상념에 빠저 있을 때, 사람들이 우르르 화장실로 들어왔다. 배심원의 하루 일과가 끝났던 것이다.
그가 밖으로 나와 보니, 대기실엔 이미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텅 비어있고 모두는 밖으로 몰려 나가고 없었다. 그도 그들을 따라 건물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으로 향하며 그는 내일 다시 돌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