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인물조명Ⅱ


"언젠가 꼭 돌아올 아름다운 그 날들을 부끄럽게 맞이하지 않기 위하여, 진실로 아름다운 그 날의 시 한 편을 꼭 쓰기 위하여" 시를 쓴다는 곽재구 시인은 우리가 흔히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삶들을 아름답게 형상화해서 새롭게 바라보는 현실과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며 시인의 문학정신이 담긴 시들을 살펴본다.  
곽재구 시인은 1954년 광주 출생해서 중앙일보 신춘문예(1981년)에 시 <사평역으로> 당선으로 등단했고, 1982년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1∼87년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2001년부터 시작해서 현재 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신동엽창작기금(1996) 동서문학상(1997) 등 수상했으며 시집으로는 [사평역에서(1983)], [전장포아리랑(1985)]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가 있고,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과 동화집 [아기참새 찌꾸], [낙타풀의 사랑],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등이 있다.


   겨울날

   겨우내 우리들은 산을 털어
   토끼를 몰고 개울 얼음을 깨
   잠든 피리를 잡아 소주추렴을 하였다
   곱은 손으로 성솔까지를 꺽어들고
   숯막의 낮은 추녀와 쌓인 눈이
   맞닿을 때까지 고함을 지르며
   날카로운 얼음조각이 뒹구는 개울까에서
   발에 동상이 드는 줄도 모르고
   산 너머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을의 겨울꿈들은 언제나
   서편 하늘에 붉은 노을로 걸리고
   그 겨우내 우리는 한 페이지의
   새마을 잡지도 읽지 않았다
   뱉어도 뱉어도 줄창 쏟아지는
   하늘의 젖빛 가래
   가짓대를 삶은 물에
   동상이 든 손발을 적셔주면서
   어머님은 낡은 옷고름에 눈물을 찍어 올리고
   감옥소에 갇힌 동생에게서도
   소를 팔아 변호사를 사러 간 아버지에게서도
   편지 한 통 눈발 속에 넘어오지 않았다

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 농촌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곽재구 시인의 이런 감성이 묻어날 수 있는 근원은 가난이라는 원 관념에 한 폭의 시골풍경이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눈 덮인 산과 시냇물이 흐르는 개울가, 꿈이 많았던 것은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의지가 눈 덮인 시골마을의 적막을 깨고 내리는 눈처럼 한없이 고함을 지르게 한다. 전국이 새마을 운동으로 한창 진행되어 농촌이 새롭게 개발되었던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처해진 환경은 먼 타지의 이야기로 들린다. 창창한 앞날에 대해 친구들과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지만 현실은 비관적 방관으로 가래를 끓게 한다. 젊음을 병들게 하고 동상이 걸린 화자의 몸으로 비유된 현실을 어머니가 쓰다듬어주며 눈물을 찍어내는 사랑으로 치유한다.  
독재 정치와 탄압으로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대의 혼란은 모세혈관이 파괴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불의와 맞서보지만 허울만 좋은 육법전서의 잣대로 심판하며 위정자들의 입맛에 맞춰 재단하듯 판결하던 시대, 잘못도 없이 잡힌 우리의 아들, 딸들을 위해 석방시키려고 팔방으로 뛰어 다니지만 힘없고 비빌 언덕 없는 서민의 응어리진 가슴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눈물 밖에 없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그린 지나간 우리 과거의 초상화이다.      

   땅끝에 와서

   황사바람 이는 땅끝에 와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보다 먼저
   한 송이 꽃을 바치고 싶었다
   반편인 내가 반편인 너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히죽 웃으면서
   묵묵히 쏟아지는 모래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너는 결국 아무런 말도 없고
   다시는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바위 앞에서
   남은 북쪽 땅끝을 보여주겠다고 외치고 싶었다
   해안선을 따라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아우성 소리 끊임없이 일어서고
   엉겨 붙은 돌따개비 끝없는 주검 앞에서
   사랑보다도 실존보다도 던져 오는
   뜨거운 껴안음 하나를 묵도하고 싶었다
   더 지껄여 무엇하리 부끄러운 반편의 봄
   구두 벗고 물살에 서 있으니
   두 눈에 푸르른 강물 고여 온다
   언제 다시 이 바다에서 우리 참됨을 얘기하리
   언제 다시 이 땅끝에서 우리 껴 안아 함께 노래하리
   뒹굴다가 뒹굴다가 다투어 피어나는 불빛 진달래 되리

대한민국 최남단은 제주 마라도이고, 육지로부터 땅끝은 전라남도 해남의 땅끝 마을이다.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한 땅끝 마을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사재끝이란 곳에 샘이 있는데, 이 샘물은 우리나라 북단에 위치해 있는 백두산의 천지물이 스며들어 우리나라 산맥을 타고 백두산의 정기를 나눠준 뒤 최종 종착역인 이곳 토말 사재끝 샘에서 다시 용솟음친다고 한다. 여행사에서는 이곳을 문화기행 코스로 잡고 있다.  
김춘수의 시가 순수서정으로 시가 문학적 의의만을 추구하는 세계를 지향했다면 김수영의 시는 문학이 가지고 있는 사회성의 측면과 현실성을 강조하면서 한국 현대시의 두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곽재구 시인은 김수영 시의 경향으로 서정과 사회적 상황을 전개하면서 천착하고 있다. <땅끝에 와서>의 말하는 '사랑하는 너'는 '우리'라는 것과 '한민족'이라는 함축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동토의 땅 북녘은 말이 없고 북한의 땅끝과 하나되는 통일된 모국을 보여주려는 민족성이 담겨져 있다. 돌따개비는 서로 모여 산다. 홍합이나 전복의 등에 붙어있지만 결국 모체는 어울려 함께 하는, 다도해가 섬이지만 바다 밑은 결국 땅과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특이한 것은 반편인 너와 나, 그리고 반편의 봄과 대조적으로 돌따개비는 암수한몸이라는 사실이다. 이 시의 주체는 자연을 통해 체제와 이념을 배제하고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진달래의 뜨거운 불빛처럼 남쪽과 북쪽의 땅이 하나인데 왜 사람들은 하나가 되지 않는지 통일의 염원이 담겨져 있다.
바다의 선착장에는 모두 18개의 가로등이 서 있었고 시인은 그 가로등들에게 각각의 번호와 이름들을 붙여 주고는 아침이거나 저녁이거나 눈이 오거나 바람 불거나 꽃이 지거나 가리지 않고 가로등 사이를 걸으며 그 번호와 이름들에 걸맞은 시를 생각하고 잠시 주저앉아 음악을 듣다가 또 시 생각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시인의 무한한 사랑의 힘이 전달됩니다.  


   沙平驛(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 이야기가 <沙平驛에서>에서 가난한 냄새가 흠뻑 배어 있다. 막차와 그믐이 그렇고, 손이 얼어 청색 손바닥을 불에 쬐고 있는 것이 그렇다. 모처럼 굴비와 사과를 사들고 귀향할 수 있는 짧은 행복을 위하여 몸으로 말을 해야하는 침묵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남루한 현실, 힘겨운 현실을 노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인간적인 것은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사랑' 때문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현실과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그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어쩌면 더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사람을/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물 먹은 풀꽃 한 송이/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바닥에서도 아름답게> 부분. <沙平驛에서>라는 시가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시인의 길에 들어서 현실에 대한 고뇌를 설명하면서 사랑의 편지를 쓰는 와중에도 용접공인 동생이 건네는 때묻은 만 원권 지폐 한 장과 팔 년 만에 졸업하는 대학과 어머니가 사 들고 오는 봉지쌀에 묻은 가난을 외면할 수 없는 시인의 톱밥 같은 그리움의 서정에 눈물을 던져 얼어있는 마음을 녹여주고 있다.


   전장포 아리랑

   아리랑 전장포 앞 바다에
   웬 눈물 방울 이리 많은지
   각이도 송이도 지나 안마도 가면서
   반짝이는 반짝이는 우리나라 눈물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우리나라 사랑 보았네
   재원도 부남도 지나 낙월도 흐르면서
   한 오천 년 떠밀려 이 바다에 쫓기운
   자그맣고 슬픈 우리나라 사랑들 보았네
   꼬막 껍질 속 누운 초록 하늘
   못나고 뒤엉킨 보리밭길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멸치 덤장 산마이 그물 너머
   바람만 불어도 징징 울음 나고
   손가락만 스쳐도 울음이 베어나올
   서러운 우리나라 앉은뱅이 섬들 보았네
   아리랑 전장포 앞 바다에
   웬 설움 이리 많은지
   아리랑 아리랑 나리꽃 꺾어 섬그늘에 띄우면서

작가의 말을 인용해서 시의 배경과 정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바다를 만난 이후 바다는 내게 정서적인 혹은 정신적인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처음 이 바다에 들어섰을 때, 저물 무렵으로 한없이 펼쳐진 개펄 위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저녁 노을들이 해 지는 쪽, 해 뜨는 쪽을 가리지 않고 하늘 전체를 꽃밭으로 만들어 놓고, 꽃밭들은 개펄 위에도 찬란히 펼쳐져 있었다. 개펄 위에는 여기저기 작은 물웅덩이들이 고여 있고 그 웅덩이들 위에 노을들은 수없이 많은 꽃밭들을 이루어 놓았다. 보리새우 새끼들이나 망둥이 새끼들이 조분조분 숨을 쉬고 있는 그곳...... 지상 위의 꽃밭인 그곳. 그곳의 방파제 위에 엎드렸다. 수평선을 넘어가는 마지막 햇살이 등을 따뜻하게 두드려줄 때 내 허름한 영혼 또한 이 바다의 꽃핀 개펄 위에서 한 마리의 금빛 보리새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요.
내가 왜 문학을 하는가. 내가 지닌 가장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그때 나는 기차여행 중이었고 창 밖에는 시퍼런 물감 같은 어둠이 풀어져 있었다. 외삼촌의 무릎 위에 앉아 나는 그 어둠을 바라보았지요. 그때 나는 버려지는 중이었다. 무슨 천사의 집이거나 아니면 아주 촌수가 낮은 어떤 친척집에 잠시 위탁되어야 할 형편이었다. 그때 외삼촌이 내게 과자 한 봉지를 사 주었다.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 안에는 색색의 별사탕들이 들어있었다. 초록색, 분홍색, 하늘색, 흰색, 노란색의 별사탕들을 바라보며 불안하기만 한 어린 영혼의 마음이 한없이 따뜻해졌다. 내게 희망이 있다면 언젠가 나는 색색의 별사탕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별사탕이 지닌 꿈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어린 영혼은 별사탕 한 봉지를 가슴에 안고 여행의 목적지가 어디인 줄도 모른 채 푹 잠이 들었다."
슬픈 과거를 지니면서도 우리나라의 자연과 땅을 사랑하고 있는 시인은 슬픔조차 기쁨으로 바꾸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흑백논리로 편가르고 서로 남의 탓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믿음이 없는 세상에 순결한 구도자와 같은 시인의 정신이 깃들여 있다.  


   서울 세노야

   오 년만의 연락에도
   시 쓰는 동무들 모이지 않아
   깊게 술 마신 밤
   어기어차 노 저어 상도동 산 1번지
   강형철네 포구로 간다
   휘몰이 밤물길 젓고 또 저어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마지막 물굽이
   자주달개비꽃 빼어 닮은 형철이 각시는
   술살 보러 새로 두시 밤물길 눈 비비며 가는데
   세노야
   멸치잡아 그물 온방내 던져봐도
   멸치꼬랑지만한 금빛 시 한 줄 서울의
   가을바다에 걸리지 않고
   세노야
   달은 떠서 산 넘어 가는데
   우리 갈 길 아득하고

서울의 상도동 산 1번지를 아세요? 지금은 많이 변했겠지만 봉천동, 사당동 일대의 판자촌 등 일명 말하는 달동네의 모습, 도시계획 위원회에서 느닷없이 닥치는 철거를 당하는 아픔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시를 썼을 시대의 모습으로 회상해 보면 시인은 아는 지인들을 만나 회포를 풀지 못하고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하고 나와 어두워진 밤을 보면서 밤을 바다로 여기며 화자는 의태어 '어기어차'는 찾아갈 목적지가 있어 신명나듯 서슴없이 밤길에 나섭니다. 늦은 밤 찾아간 친구네 집,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만 중요한 것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어지러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고자 글을 쓰는 시인의 길은 멀고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될 반짝이는 시가 나오지 않는 괴로움을 안타까워한다. 서정적인 감상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포기하지 않는 심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서울 세노야>를 비롯 80년대를 노래한 시들은 현실에서 억압받는 삶에 대하여 서정적으로 풍경을 그릴 수 있는 것이 시에 나타난 외면이라면 내면에는 자각적 비판 의식으로 강한 현실 비판과 분노를 끌어내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따라서 80년대를 노래했던 시들은 그저 분노에 찬 절규와 외침이 많았는데 시인은 일과성으로 끝나버리기도 쉬운 부분을 경계하며 아름다운 시어들을 통해 그의 분노를 분명하게 담고 있다.  
시인의 시를 다룰 때 여러 시들 속에 숨겨져 있는 공통점을 찾으려 애를 쓴다. 그것이 시인의 시정신과 사상이라는데 합일되기 때문으로 위의 시 5편을 살펴볼 때 공통점은 기행시이면서 자연의 서정을 통해 감상에 그치지 않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으로 천착하고 있다. <겨울날>을 통해 어머니와 자식간의 사랑, 가족의 사랑으로 힘들고 어려운 가난을 이겨내려고 했고, <땅끝에서>를 통해 남과 북의 인위적 분단은 자유주의와 민주화된 반편의 봄을 부끄러워하고 통일이 되기를 사랑으로 갈망한다. <沙平驛에서>에서는 떠나는 길에 톱밥을 태우며 따뜻한 불빛에 모여 선물보따리가 없어도, 굶주리는 가난이 계속될지라도 막차를 타고 가족에게로 향하는 모습을 그리며 <전장포 아리랑>에서는 모국의 사랑은 일엽편주의 섬들이 돌따개비처럼 모여 '우리'라는 공동체를 이루며 더불어 살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서울세노야>을 통해 오밤중에도 불쑥 찾아갈 수 있는 곳은 바로 근원적 사랑이 내포되어 있고 그 교감 위의 문학의 사랑이 피어나는 것이라고 본다. 사랑은 그 어떤 역경과 고난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라는 것은 그의 시를 통해 깨닫게 해준다. 끝으로 곽재구 시인의 시적 원천의 바탕이 된 짧은 경험을 보면서 더 깊이 살펴보지 못한 애석함을 가지고있다. 시인에게 시를 통해 변함 없는 인간애를 담아 승화된 시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어두운 삶에게도 희망의 빛으로 용기를 줄 수 있는 글을 써주기 바란다.

"타고르의 시들은 그 자체가 꿈결로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시에 나오는 달빛과 강물, 나룻배와 어린 소년의 노래, 엄마의 자장가, 라마야나 이야기와 챔파꽃 향기...... 그런 모두가 떨리는 꽃 이파리처럼 가슴에 닿아왔다. 지상에 시가 있어서 행복했고 타고르가 있어서 지상 위의 어떤 길이건 끝없이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눈을 떠 처음 쓴 시의 한 줄을 타고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바람이 슬쩍 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면, 이것 좀 봐, 그가 왔어, 타고르의 혼이 내 곁을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간 거야, 라고 생각했다. 밤하늘에 뜬 무수한 별들이 그의 빛나는 눈빛이라고 내가 쓴 허름한 시들은 그의 형형한 눈빛의 체에 걸러져 단 한 줄도 지상에 남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의 성긴 체에도 걸러지지 않고 남은 시를 꼭 써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깊었다. 이봐, 타고르… 지금 얼른 내게 와요 내 시 좀 봐줘요...... .
어릴 적 비닐봉지 안의 빛나던 별사탕들처럼 어떤 두렵고 쓸쓸한 영혼들에게도 따뜻함과 아름다움으로 남는 시. 삶이 너무 비참하고 굴욕적이어서 더 이상 존재라는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한심한 시간들 속에서도 먼 포구 마을의 불빛들처럼 가슴 안으로 안겨오는 그런 시. 그리운 그 시들을 나는 지금 여전히 꿈꾸고 있는 것이다.
지상에 언제부터 시가 있었을까요. 왜 내가 시를 쓰게 되었을까요. 왜 시를 쓰는 시간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까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단 한 가지, 내가 당신들을 사랑하고 당신들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그 시간들이 지상 위에 지속되는 한 시는 우리들 마음 안에 영원한 집이 되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