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길, 황인숙, 고시조, 김영수, 유안진

2006.01.23 02:15

김동찬 조회 수:331 추천:6

*** 81

   그대 몹시 그리운 날
   내 이렇게 숲으로 되어
   마냥 싱싱하고 슬기로운 이야기를
   끝없이 바람결에다
   흔들고 선 숲으로 되어

   낮과 밤이 지나는 황홀한
   오솔길을
   그대에게 열어주는
   설레이는 가지 끝에
   결 고운 신비의 빛살
   잎새마다 반짝이는…

   꿈 속 깊은 데서도
   차마 못 사뢴 말씀
   이슬비 맞아 돋는 무지갯빛
   목청으로
   그대의 생각 골짜기
   푸른 숲으로 서고 싶네

         김호길 (1943 -   ) 「숲 · 이미지 」전문

 그 이미지 참 푸르다. 비행기 조종사로 세계를 누비던 김호길시인은 하늘환상곡 등으로 하늘 얘기를 우리에게 시로 들려주더니 지금은 국제 농업을 하는 농군으로 지내며 "싱싱하고 슬기로운" 땅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고 있다. 하늘로 땅으로 지구가 좁다고 다니다 보면  나이들 시간이 없을 것 같다. 더구나 최근 김 시인은 어린이 시조 운동에 열정을 쏟으며 어린이들의 마음과 가까이 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이슬비 맞아 돋는 무지갯빛 목청"으로, "생각 골짜기 푸른 숲으로" 우리 곁에 선다.
 
*** 82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황인숙 (1958 - ) 「말의 힘」전문 

여러 이유로, 요즘 마침표나 쉼표 등의 문장부호를 산문시에 생략하는 시인들이 많다. 
반면에 이 시에는 마침표가 유달리 많이 보인다. 기분 좋은 말의 힘을 하나 하나 생각해보고, 소리내보고, 느껴보라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인다. 
"비!"는 한 행으로 처리하고 느낌표까지 달았다. 물론 비를 강조하고 싶어서겠지만 이 시의 구조상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의 말들은 각각 기분 좋은 느낌을 주는 독립된 말이면서 "비!"와도 연결된다. 비가 느낌표의 모습으로 내린다. 비, 바로 그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 83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 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작자 미상(조선시대) 「나비야 청산가자」전문

'청산(靑山)'은 고시조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청산별곡」에 나오는 "살 리 살 리랏다, 靑山에 살 리랏다/머루랑 달래랑 먹고 靑山에 살 리랏다"란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청산은 그냥 푸른 산이 아니다. 속세의 번잡함으로부터 벗어나 때묻지  않은 자연이 숨쉬는 이상향이다. 그곳은 신선이나 죽은 자만이 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우리의 주변에 공기나 물처럼 존재하는 곳이다. 이 시에서도 화자는 나비도 부르고 범나비도 벗삼아 훨훨 청산으로 날아가려고 한다. 
화자는 '나비처럼' 그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비 그 자체가 된다. 그래서 가다가 날이 저물면 꽃이나 잎에서 잠도 자면서 쉬엄쉬엄 그곳으로 가려고 한다. 소박한 조상들의 자연 친화적인 세계관이 담겨있다.
청산으로부터 너무 멀어진 삶을 살고 있는 내 자신을 돌아보니, 옛 사람들의 풍류와 넉넉함이 그립다.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 분들의 뒤를 좇아 날아가는 꿈을 꾼다. 

*** 84

새는 지금 제 길을 날고 구름은 정처없다

저들은 상처없이 길을 내고 길을 접고

바람을 깨우지 마라
애먼 풍경이 운다

         김영수 (1947 -   ) 「山寺에서」전문 

새들과 구름은 스스로 길을 내고 또 접기도 한다. 누구 하나 다치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돌아갈 수 있는데도 굳이 외나무다리만 고집해서 상대방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독설로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저마다 잘났다고 소리치는 통에 시끄럽고 불쾌하다. 
하늘에만 길이 많은 것은 아닐 것이다. 없는 길도 때론 만들기도 하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함께 기대고 걸어간다면 좁은 길도 공유할 수 있다. 애먼 풍경을 울게 할까봐 바람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 조심 길을 간다면, 저 산사의 조용한 평화로움이 우리가 사는 이 동네에도 깃들지 않을까. 

*** 85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을 주웠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석존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 밑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 떨구면 세상은 어디든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 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아왔다는 듯, 그렇게 살라는 듯 ㅡ.

       유안진 (1941 -   ) 「다보탑을 줍다」전문 

 벌써 몇년전이다. 십원짜리 동전을 지하도 입구 눈에 잘 띠는 곳에 뿌려놓고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뜻밖에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 때는 몰랐었는데, 오호 통재라, 그것들이 다 다보탑이었구나. 다보탑뿐만 아니라 예수나 석가를 나도 모르게 차고 다녔을 성 싶다. 고개를 떨구니 다보탑도 되고 녹슨 천덕꾸러기가 되기도 하는 내 모습이 10원짜리 동전에 겹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