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속 세대차이

2007.09.10 02:12

김동찬 조회 수:363

   신발장에 울긋불긋한 새 운동화가 놓여있다. 대학생인 아들이 새 신발을 산 모양이다. 아들은 후배들에게 기타를 가르쳐 번 돈으로 스스로 신발을 산다. 신발에 한해서 독립을 한 셈이다. 자립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내게 신발을 사달라고 했다가는 무슨 신발을 그렇게 많이 사느냐고 잔소리나 들을 게 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아들은 고등학생 때 몇 차례 신발 때문에 나로부터 야단을 맞았고 핀잔도 들었다. 아들은 친구들 사이에 유행하는 새로운 운동화, 특이한 테니스화, 편리한 농구화를 하나씩 사더니 어느 날 열 켤레가 넘는 신발로 자신의 신발장을 채우고 있었다. 아들이 필리핀 독재자의 아내였던 이멜다처럼 이상한 낭비벽과 편집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슬그머니 걱정스러워졌다.
   내가 민감하게 여기자, 아내는 이 문제를 들고 청소년 상담 전문가를 찾아갔다. 그 정도는 미국에 사는 아이들에게 평범하고 정상적이라는 전문가의 답변을 들었다. 윗도리가 바뀔 때마다 거기 어울리는 바지를 선택하는 것처럼, 옷에 어울리는 신발을 고를 수 있도록 요즘 청소년들은 여러 켤레 신발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가 그렇다니 안심이 되긴 했지만 아들이 많은 신발을 갖고 있는 것이 내게는 아직도 곱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나는 주로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고 그나마도 밑창에 구멍이 날 정도가 돼야 부모님이 새 신발을 사주셨다. 처음으로 운동화를 얻어 신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지금도 새 운동화의 냄새를 기억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친구들이 신발에 대한 그런 비슷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어서 가끔 신발이 화제로 오르기도 한다. 한 친구가 섬마을에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공부를 꽤 잘했던 그 아이는 학교 대표로 뽑혀 학력 경시대회에 참가하게 됐다. 시험 전날, 할머니가 오랫동안 모아온 돈으로 시험 잘 보고 오라고 운동화를 사주셨는데 그게 자기가 갖게 된 첫 운동화였다. 그 신발을 신고 학교 대표로 시험 보러 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며 마음이 들떠 잠을 설쳤다.
    친구는 배와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인솔 선생님과 함께 대회장소인 육지의 한 초등학교를 찾아갔다. 미리 시험지를 내고 나가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마지막 종이 울리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답안을 작성했다. 그런데 시험을 마치고 나가보니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아침에 신고 나온 그 새 운동화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발에 맞지도 않은 다 떨어진 헌 운동화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의 선생님은 돌아가는 길에 영화를 한 편 보여주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고 친구는 새 운동화를 잃어버린 슬픔과 할머니에 대한 미안함에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아직까지도 그 때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리다고 했다.
   산업화 초기였던 60년대에 시골에서 나처럼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도시에서라도 산업화 이전에 살았던 분들은 이와 같은 아픈 기억을 한, 두개씩 갖고 있으리라 믿는다. 비슷비슷한 검정 고무신들은 칼로 새기고 돋보기로 태워서 표식을 해놓아도 바뀌고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대부분 한 켤레의 신발로 사철을 지내던 시절에 신발을 잃어버리고 느끼게 되는 허탈감이 지금 시대에 자동차를 잃어버린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면 그리 지나친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검정 고무신에 이어서 신게 된 운동화, 그리고 가죽으로 된 외국 상표 운동화와 구두를 바꿔 신으며 나도 풍요로워지는 시대를 따라 어른이 됐다. 하지만 아직도 신발은 한, 두 켤레면 족하고 더 이상 갖고 있는 것은 사치요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신발을 넥타이나 옷에 붙이는 장식품 정도로 여기는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궁상맞게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내게 신발은 그야말로 ‘신고 다니는 발’이다. 한 쌍의 발이 있으니 그 발을 보호해줄 한 켤레의 신발이 있으면 충분하다. 그러나 용도에 따라 두어 켤레 여분이 있으면 연탄창고에 연탄을 가득 채워두고 겨울을 맞던 옛날 사람들처럼 뱃속이 든든하다.
   내 초등학교 동창회 사이트에 올려진 6학년 1반 단체 사진을 보니 담임선생님을 가운데 모시고 여학생들이 맨 앞줄을 차지하고 앉아 있다. 두 손을 무릎에 얹고 가지런히 모아진 예쁜 여자 아이들의 발에 신겨진 검정 고무신이 여럿 눈에 들어온다.
   그 사진 속 여학생들이 이제는 모두 어른이 돼 가죽으로 된 고급 신발을 열 켤레씩이나 갖고 있는 아이들 때문에 나처럼 걱정을 하고 말다툼을 벌일 것 같다. 아니, 새 운동화를 잃어버린 슬픈 기억을 갖고 있어서 자기가 어렸을 때 못 신었던 몫까지 실컷 신으라고 자식들에게 앞장서서 유행하는 신발을 사다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며 혼자 웃어본다.

<에세이 21> 2007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