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린 그림

2004.09.11 13:02

김동찬 조회 수:71 추천:6

  재작년에 졸저를 하나 출판했더니 친구 몇이서 조촐한 축하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 자리에는 내 고향친구인 정규수도 있었다. 그는 일인극 <품바>의 거지 역을 비롯해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배역을 잘 소화해 내는 연극인으로 이름이 꽤 알려져 있다.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가는 중에, 정규수는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화제로 올렸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어린 정 군은 기차역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내 고향 농촌마을에서 기차역은 주변에 흔히 보이는 건물이 아니고 먼 도시로 연결되는 출입구답게 이국적 풍모로 서 있었다. 깨끗하게 단장된 플랫폼이나 대합실, 철로도 그렇지만 가끔씩 들어오는 육중한 기차는 언제 보아도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선생님들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계셨는지 미술시간이나 미술대회 때 학생들을 기차역으로 데리고 가곤 했다. 정 군은 기차철로를 반듯하게 그리려고 자를 대서 줄을 긋고 있었다. 그 때 내 선친이 그 옆을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고 한 마디 건넸다.
  "자를 대지 말고 그냥 그리거라. 자를 대고 그리면 자가 그려준 것이지 네가 그린 그림이 아니잖냐. 비툴비툴 해도 네가 그린 그림이 좋은 거란다."
정규수는 자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지 않고 내가 그림을 그려야한다는 말씀이 그 후로도 잊혀지지 않아 지금까지 자신을 다스리는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리고 늘 내가 그린 그림, 내 목소리, 내 색깔이 담긴 연극을 지향하게 됐다고 했다.
  이미 몇 십 년 전에 시골마을에서 이처럼 창작 예술의 중요한 기본 원칙을 깨닫고, 알기 쉽게 설명을 하실 수 있었던 내 선친이 자랑스럽고 한편 그리웠다. 또 그런 아버지를 내게 상기시켜준 친구가 고마웠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노인네의 잔소리 정도로 흘려버리고 말 수 있는 이야기를 평생 가슴에 새겼다는 사실이 정규수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이런 예술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이 그에게 연극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싹수로 일찍부터 자리잡았구나 하고 느꼈다.
  음악에 관련된 이와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아프리카 선교사가 그곳의 원주민들에게 기타를 가르쳐볼려고 했다. 몇 번 시범을 보이고 함께 노래도 불렀다. 그런데 불과 며칠 후에 그 곳 아이들이 제법 음에 맞춰 기타를 쳤다. 선교사가 놀라서, 전에 기타를 만져본 적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기타는커녕 도레미파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이었다.
  그 선교사는 그 뒤로 악기를 다루고 음악을 즐기기 위해서는 악보나 음악에 대한 기초지식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을 버렸다. 사람이면 누구나 천부적으로 절대 음감이라는 걸 갖고 태어난다. 그 천부의 음감을 스스로 발전시켜나가면 훌륭한 음악이 된다. 그런데 악보 속에 음을 한정시켜 교육하다 보니 음악이 더욱 어려워지고 폭이 좁아졌다. 음악에 대한 지식이 소리를 즐긴다는 음악의 본질로부터 오히려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존의 관행이나 잣대를 버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을 그린 화가로는 세잔느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가 그린 사과는 눈에 보이는 사과라기보다는 마음으로 보는 사과다. 외양보다는 본질을 그리려다 보니, 그가 그린 사과는 맛이 없고 거칠어 보여 생경스럽다. 그러나 세잔느의 사과는 아담과 뉴튼의 사과에 이어, 세상을 바꾼 세 개의 사과 중의 하나로 꼽힌다. 세잔느를 비롯한 입체파 화가들의 운동이 미래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으로 발전하면서 현대 예술, 사상,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전 시대 화가들을 따라, 세잔느가 곱고 맛있게 생긴 사과만을 그려냈다면 그건 이발소에나 걸렸다가 잊혀져버렸을 것이다.
  나는 자신의 색깔을 가진 연극인 정규수로부터, 정규수에게 가르침을 준 우리 선친으로부터, 세계를 바꾼 사과를 그려낸 세잔느로부터 배운다. 획일화된 규범보다도 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것에 더욱 가치를 두는 사회가 역동적인 희망과 미래를 갖게 된다. 또 그들은 한결같이 글을 쓰고 있는 내게 말한다. 잣대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내 스스로 그린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고.    

           <열린시학> 2004년 봄호 권두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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