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꿈

2004.09.06 02:25

김동찬 조회 수:42 추천:2

  아내가 꿈 얘길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잠에서 깨어나면서 비몽사몽간에 떠오른 느낌을 나에게 들려준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 남편과 아이들마저 멀리 떠나버리고 나 혼자만 남겨져 있는 거야. 수 년 동안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잠을 자다가 깨어난 것 같은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하다 못해 절망감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렸어."
  어린 아이 때 꾸던 꿈을 아직도 애들처럼 꾸느냐고 핀잔을 주면서 웃고 말았지만 사실은 나 또한 그런 느낌에 빠질 때가 종종 있다. 어릴 적에 잠에서 깨어나다가, 어머니가 옆에 안 보이면 세상으로부터 뚝 떨어져 홀로 남겨져 있는 것 같아서 서럽게 울던 그런 기분...
  부모님마저 돌아가시고 내 아이들이 대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정도로 어른이 된 지금도 내가 그런 꿈을 꾸고, 그런 느낌에 빠진다는 건 한편 창피하기도 하다. 하지만 튼튼하게 잘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던 주위의 정든 사람들이 나를 남겨놓고 언젠가는 영영 내 곁을 떠나버릴 거라는 운명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두렵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어릴 적에 가졌던 막연한 무서움은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오신 어머니로 금방 해결될 수 있었지만, 어른이 되면서 부모님과 형님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경험을 가진 후로는 그리 쉽게 해결될 수 없는 고통과 막막함이 산처럼 나를 가로막고 서 있곤 한다.
  그런 아픔을 가질 때마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인생의 순간순간들이 내 곁을 떠나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내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 작고 초라한 '나'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런 아픔을 겪으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사라져 갈 것인가. 나와 관계를 갖고 있는, 각자에겐 또 다른 '나'들인 저들은 또 누구인가. 어차피 헤어질 나와 너인데 왜 '너'의 상실이 '나'의 아픔이 되는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만 늘어간다. 아직 어느 것 하나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내 고통과 숙제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나의 방식을 찾아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철학으로, 혹은 사업으로, 또 어떤 이는 신에게 의지해서 풀어 나가려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나는 나와 관계를 갖고 있는 세계와 다른 사람에 대해 글을 쓰면서 나를 들여다보고 정리해보게 되었다. 이 글 쓰는 작업이 뚜렷한 해답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손을 놓고 운명을 바라만 보고 있지 않고 그 운명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뭔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글을 쓰는 동안은 떠나간 어머니도 내 곁에 와서 내 등을 토닥여주고, 아버지도 웃음을 지으신다. 나는 영혼을 불러내는 심령술사가 되었으며, 깊은 상처도 아물게 하는 내 마음을 다스리는 의사가 되었다.
  내 글이 독자의 가슴에 감동을 건네주었을 때 나는 독자의 가슴속에 나를 나무처럼 심어놓았다고 생각한다. 작가와 독자가 나누는 감동은 정신적인 일체감을 제공한다. 비록 어머니는 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독자들은 나에게 남아있으며 또 나는 독자들에게 남아있어서 외로움과 두려움의 시간을 함께 견뎌내기도 한다.
  야릿야릿한 아가씨였던 아내는 이제 40대의 확실한 아줌마가 되었다. 얼굴엔 잔주름도 생기고, 손도 거칠고, 몸도 처녀적에 비해 많이 불었다. 상치쌈에 실컷 점심을 먹고 소파에 누워 아내는 낮잠을 퍼질러 자며 잠꼬대까지 한다. '또 개꿈을 꾸나 보다' 하고 귀를 기울이니 뜻밖에도 아내는 "엄..마!" 한다. 아내에게도 남편인 내가 옆에서 도와줄 수 없는 나름대로의 힘든 시간이 있는 것이다. 한 때 문학소녀였던 아내에게 글을 쓰라고 권해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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