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처럼 입을 벌려봐

2004.09.06 02:18

김동찬 조회 수:67 추천:5

  대학교 2학년이 된 내 딸 수산이가 웃을 때 드러내는 가지런한 이빨이 보
기에 좋다. 연애할 적에 수시로 웃음을 터뜨리던 내 아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딸아이가 웃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즐거운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따라 웃는다. 그러다 어릴 적 유달리 많았던 그 아이의 충치와 치과에서 있
었던 일들이 생각나 한 번 더 미소짓게 된다.
  수산이는 충치도 많았고 치과 가기를 두려워하는 면에 있어서 누구와 견
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아이였다. 어린 아이들의 이빨 때문에 한, 두 번
고생해보지 않은 부모들은 없겠으나 내 딸은 유별나게 우리 부부를 힘들게
했다. 치과로 데려가는 것도 힘들지만, 수산이를 치과의자에 앉혀 입을 벌리
고 치료를 마치게 하는 데는 인내심과 협상능력 그리고 강압적인 협박이 늘
필요했다.
  수산이가 치과에서 울부짖고 발버둥을 치면 그 공포분위기가 다른 아이들
에게 전염돼 어린 환자들의 집단 치료 거부 농성 사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
다. 간신히 자신의 아이를 달래 치과에 데리고 왔을 다른 부모들과 치과의
사, 간호원 앞에서 나는 아이를 잘못 키운 대표적인 사례가 돼 당황스러웠
다. 나도 엄한 교육을 시키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내
어린 딸의 볼기짝을 때려주며 치료의자에 억지로 앉히곤 했지만 더욱 울어
대는 통에 치료가 잘 될 리 없었다.
  언젠가는 그런 수산이에게 치과 선생님이 "간호원, 여기 큰 주사 가져오세
요."하며 겁을 준 적이 있었다. 수산이는 울음을 그치기는커녕 혼신의 힘을
모아 치과 선생님의 손가락을 물어버렸다. 충치라 할지라도 어린 맹수의 일
격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나 보다. 선생님은 고통과 불쾌감, 그리고 항의 의
사를 "오늘은 안 되겠네요. 다음에 합시다."라는 짤막한 말에 담아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부부는 어지간하면 치과에 잘 가려하지 않게 되었다.
또 그 때는 낯선 미국으로 이민 와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이 더욱 중요하고
눈앞에 닥친 문제이기도 했다. 당연한 결과로 수산이의 이빨은 사탕과 충치
균의 놀이터가 되었고 수산이는 견딜 수 없는 치통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평온한 우리 가정이 또 한번 사나운 바람에 시달릴 시간이 왔다는 걸 우리
부부는 물론 수산이조차도 느끼게 되었다.
  수산이는 저소득 가정을 위한 미국 정부 지원 프로그램인 START에서
운영하는 유아원에 다니고 있었다. 정부의 보조를 받아 최소한의 치료비로
치료받을 수 있는 치과를 학교 담당 봉사관으로부터 소개받았다. 주소에 적
혀있는 치과의사 이름이 'Chang Jin Jun'이라고 씌여 있어서 한국 사람이라
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더니 그 동안 수산이도 자라 아주 말귀가 통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쁜 벌레가 이빨을 아프게 하니까 잡아내야 한다고 설득
해 치과에 데려오는 데까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빠의 말을 알아들었
다고 해도 여전히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새파랗게 질려 치과의자에
앉아있는 수산이는 여차하면 입을 열지 않거나 울음을 터트릴 태세였다. 엄
마 곁을 떠나 남의 집에 팔려온 가여운 한 마리 강아지처럼 떨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기대했던 대로, 경상도 억양이 담긴 한국말을 사용하는 전
형적인 한국 사람이었다. 금세 분위기를 파악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웃었다.
덩치가 큰 무서운 의사 선생님이 아니라 호리호리하고 자그마한 체구의 친
근한 모습으로 의사 선생님이 "수산아, 무섭니?"하면서 말을 건넸다.
  "뭐가 무서워. 나는 수산이 하나도 안 아프게 할거야. 자, 약속. 절대로 안
아플 거야. 그리고 수산이 이빨 아프게 하는 벌레를 다 잡아버릴 거야. 그러
면 수산이 이빨 다 나을 거야. 벌레 땜에 이빨 아프지?"
  수산이는 의사 선생님을 못 미더워하는 눈치였으나 안 아프게 한다는 말
에 조금은 안도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거 뭔지 알아? 이건 이빨 세는 건데 손톱도 셀 수 있는 거야.
손톱 이리 줘봐. 수산이 손톱 몇 갠가 세 보자. 하나, 둘... 열 개네. 자 이빨
도 세 보자. 근데 입 크게 벌릴 수 있어? 악어처럼 입을 크게 벌려봐. 그래
야 선생님이 벌레를 다 잡을 수 있지."
  그의 친화력은 놀라운 것이어서 수산이는 날카로운 송곳처럼 생긴 치과
연장을 보고도 겁내지 않고 악어처럼 입을 크게 벌렸다. 선생님은 이빨을 세
고 간호원에게 영어로 몇 번째 이빨이 어떤 치료를 요하는지 받아 적게 했
다.
  선생님은 또 쉭쉭 바람 소리를 내는 도구들도 수산이 손등에 대 보이며
아프지 않고 벌레를 빨아들이거나 쫓아내는 거라는 걸 확인시키고 이빨에
대고 몇 번 왔다갔다하게 하더니 그날의 치료를 마쳤다.
  "치료는 하루에 마칠 수도 있지만 두 번 더 오게 하겠습니다. 치과는 평생
다녀야 할 곳인데, 어렸을 적에 겁나는 곳이라는 생각이 박히면 치과를 멀리
하게 되고 그러면 나중에 더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 날은 상견례만 하고 본격적인 치료는 다음에 하자는 말씀이었다. 전
선생님의 짧은 얘기는 의사의 소견으로만 단순하게 들리지 않았다. 눈앞의
돈벌이에 급급하지 않고 어린 환자에게 다가올 먼 미래의 건강과 행복까지
도 염두에 두는, 철저한 직업의식과 철학이 느껴졌다. 나는 좋은 설교를 듣
는 신도처럼 감동하고 그의 말에 담겨있는 정신을 마음에 아로새겼다.
  치과를 나서기 전, 수산에게는 의젓하게 치료를 참 잘 받았다는 칭찬이
부어졌다. 선생님은 보물섬의 해적들이 갖고 있었음직한, 뚜껑이 둥그런 나
무 상자를 열어 거기 가득 담긴 작은 장난감들 중 하나를 상으로 주었다. 그
리고 다른 아이들보다 더 착하다는 이유로 하나를 더 골라 가질 수 있게 했
다. 딸기코와 수염이 달린 플라스틱 안경테나 조그만 인형 같은 비싸지 않은
장난감들이었지만 수산이의 기쁨은 대단한 것이었다. 철부지 아이에서 그 무
서운 치과치료도 잘 받는 '큰 언니'가 되었다는 자각에 스스로도 대견스러웠
는지 그 장난감을 전리품인 양 의기양양하게 들어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 수산이는 나에게 "아빠, 우리 언제 또 치과 오는 거야?"라
는 질문을 던졌다. 내 귀를 의심했다. 이제 치과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자신만만해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술에라도 홀린 기분이 들었다.
  다음 두 번의 치료는 이빨의 숫자만 세고 끝나지 않았다. 마취주사를 놓
고, 이빨을 뽑고, 신경치료를 하고 충치를 갈고 때우는 등의 많은 치료를 하
는 동안 수산이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이후로도 치과에 가지 않겠다고 하
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상으로 장난감을 받았다.
  수산이는 치과를 무서워하지 않게 된 '언니'가 되었고, 위태롭게 자리를
잡고 있던 젖니들은 모두 새로운 간니로 바뀌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대학에
다니는 진짜 '큰 언니'가 된 수산이는 머잖아 결혼을 하고 아줌마가 될 것이
다. 그리고 또 자기를 닮은 딸을 낳을 것이고 그 딸 때문에 치과에서 곤역을
치를 것이다.
  수산이가 자기 딸을 치과에 데리고 갔을 때, 전 선생님처럼 훌륭한 치과
의사를 만나게 되면 좋겠다. 그러면 그 아이는 치과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
고. 입을 악어처럼 크게 벌리고 치료받을 것이다. 수산이의 딸은 제 엄마처
럼, 제 외할머니처럼 건강한 치아를 가지고 활짝 웃는 대학생이 되리라. 나
는 내 딸의 딸이 웃는 걸 보고 즐거워하다가 오래 전에 사라진 제 엄마의
썩은 젖니들이 얼마나 보기 흉했던지 얘기해주며 함께 웃음꽃을 피울 것이
다.

    <에세이 21> 200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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