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쳐버릴 수 없는 친구

2004.09.25 14:29

조정희 조회 수:191 추천:11

떨쳐버릴 수 없는 친구

너를 친구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가?
머리에 떠오르는 것도 싫고 찾아오는 것은 더더욱 싫은데
네가 내 친구라고?
숨이 붙어 호흡하며 사는 동안, 너는 눈을 뜨는 새벽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내 곁에서 항상 맴돌고 있으니 친구일 수밖에.
흔히들 네가 있는 한 살아있는 증거라고 해. 다시 말해서 내가
무덤속으로 들어가는 날에야나 너는 내 곁에서 없어진다고 말하지.  

내가 철없던 십대에도 너는 내 곁에 있었어.
내가 스무 살이었을 때도 너는 20대의 모양으로 나를 꼭 붙잡었지.
어떤 남자와 연애를 하고 시집을 갔더니 거기에도 있더군.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너는 더 집요한 모습으로 날 따라다녔어.

절대로 떨어지지 않고 어디고 어느 때건 붙어다니는 너라면,
차라리 친구로 여기기로 했다.
끝없이 미워하고 증오하기 보다는 그 편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에서.
사실은 네가 있기에 잠시라도 나를 돌아보는 눈을 갖게 되거든.
진정코 네가 있기에 가끔 낮아지는 내 자신을 보거든.
새벽부터 찾아오는 네가 있기에
나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할 수 밖에 없거든.

기도를 하면, 너는 힘없는 허수아비로 변하더라.  
기도를 하면, 너는 종이 호랑이에 지나지 않더라.
딴에는 아주 위협적인 모습을 하고 눈을 부릅뜬 채
황금 들판을 사수하고 있지만, 허수아비 누가 두려워하지?
다만 참새만이 지래 겁을 먹고 도망칠 뿐이지.
유사이래 허수아비의 총에 맞아 다리를 잃거나 날개가
부러진 참새는 없는데 말이야.

종이 호랑이로 변한 네가 아무리 망원렌즈가 장착된 최신식
장총을 소지하고 있어도 방아쇠를 당길 능력이 있겠어?
기도를 하고 아침을 열면 여러 모양으로 다가오던 네가
벌판의 허수아비, 밀림의 종이 호랑이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부터는 너는 확실히 내 생의 동반자, 친구가 되었지.
근심이란 이름으로, 염려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내가 살아있는 한 너는 내게 붙어있는 친구일 수밖에 없지.
학업을 끝내야하는 학창시절,
배우자와 직업을  잘 만나야 하는 청년기,
자녀을 키우고 성장시키면서도 줄곳 너는 따라다녔지.
결혼시키면 끝날건가?  웬걸 계속 이어지는 삶의 문제, 근심, 고통
등의 여러 이름으로 날 계속 괴롭히고 따라오는 거야.

그런 네게 집착하면 할수록 포박은 강력해지더라. 그런 중에 터득한것은  
끈질긴 네게 무심할수록 포박은 허술해진다는 사실이야.

아무리 강하게 묶은 포박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비, 바람에 소멸해버리는 것이 바로 너의 실체거든.
지금 아무리 크나큰 근심이 나를 포박하고 있어도,
나는 널 함께 길가는 허수아비로 여길거야.  
세월이 흐르면 너는 저절로 사라지고 마는 허수아비일테니.

이 가을에도 떨쳐버릴 수없는 친구와 함께 삭막한 들길을 간다.
기도를 잊지 않고.


조정희의 '사랑하며 살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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