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할머니 세대의 표현법

2004.08.06 09:41

노기제 조회 수:162 추천:2

040704                      내   할머니세대의  표현법
                 노  기제
        도무지 따라가지 못할 속도의 변화속에 살고 있다.  시대 감각이 뒤쳐져 엉뚱한 오해를 사는 일도 생긴다.  옛날 할머니가  하시던 표현을 생각해내며 똑 같은 뉴앙스로 상황을 묘사했다가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오도가도 못하고 구석으로 몰린다. 말조심 하란다.
        어릴적 우리집엔 고종 사촌언니가 함께 살았다. 할머니의 외손녀다. 고모네 집안이 어려워 언니만 우리집에 얹혀 살게된 상황이었다. 당연히 할머니의 친손녀인 내가 집안의 귀염둥이가 돼야 하는데 귀염둥이는커녕  언니의 후광에 가려 존재조차 있는둥 마는둥 찬밥 신세였다.
        그건 언니의 미모가 특출났던 때문이다. 내가 봐도 언닌 이쁜 얼굴이다. 그 당시 남산 초등학교  6학년이던  언닌  공부도 잘했다. 공부로 따진다면 나도 언니만 못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얼굴이다.  언니만 못하단 표현도 필요하지 않은,  아예 비교를 할 수 없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 얼굴이 그 정도로 평가 받았던 시절이다.
        할머닌 언제나 언니만 품에 끼고 산다. 애비 일찍 죽고 에미마저 떨어져 외가댁에 얹혀사는 어린 것 신세가 너무 불쌍하단다. 먹는것, 입는것, 뭐든 언니가 우선이고 마치 공주마마 모시듯 차별대우가 심하다.
        그 땐, 나도 엄마 아빠 떨어져 할머니한테 옮겨 살던 시기다. 위로 오빠가 둘 있지만 엄마 아빠만큼 의지되는 존재는 아니다. 게다가 오빠들은 내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지도 못한다. 더구나  미모에 얽힌 차별이란걸 짐작인들 할 수 있겠나 말이다.  
        그 당시 문간방에는 공군아저씨가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어느날 저녁 집에 돌아온 공군아저씨가 언니에게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건넨다. 무슨 특별한 날도 아닌 것 같은데 선물이라니 당연히 궁금했다. 선물을 뜯는 언니의 손이 참 이쁘기도 했다. 넙적한 필통이 유행이던 때, 좁고 작은 필통이다. 앙증스럽고 이쁘다. 나도 갖고 싶었다. 이어지는 공군아저씨 왈, 희자 닮은 아주 이쁜 필통을 샀다나. 저런 멀대 같은 자식, 아니, 애가 둘인데 하나만 사오다니, 정신나간사람이네. 내 생각엔 진짜 정신병자처럼 보였다. 그 공군 아저씨가. 어떻게 그런 차별을 할 수 있는가고 초등학교  3학년 어린애가 어른들을 비판하는 모양새였다. 정말 한심한 사람들 이라고 깔보기까지 했다. 물론 내가 뒤 늦게 합류한 이유도 있다. 그렇다 해도 애들인데. 난 언니보다 세 살이나 어린앤데.
        그날밤, 할머니는 언니를 곁에 끼고 누워서 하는 말, 에구 우리 희자 사내놈들이 가만 놔 두겄나. 이마도 잘 생겼고, 눈썹은 영락없이 초생달 부쳐놨구, 쌍까풀 진 커단  눈이며 , 오똑한 코에다, 요 앵두 같은 입술이며 , 어떤놈이 채 갈지……….
        어린맘에도 이쁜여자는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다는말로 알아들었다. 사내놈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미모를 나도 갖고 싶었다. 내평생을 돌아보면 어느남자 하나 내게 추근덕 대는 일이 없었다. 내가 생각할 땐 여인의 미모를 칭찬하는 말로는 아주 최고의 표현이란 생각을 하며 살았다. 그래서 어느누구에게도 해 주지 않던 표현이다.
        지인의 아들 결혼식에서 그만 그 아끼던 말을 후하게 사용했다. 내 나이도 이젠 옛날 할머니 나이 정도가 가까왔고,  샘이 나서 한 번도 입밖에 내지 않던, 내가 그렇게  듣기를 갈망하던 말을 진짜 너그러운 마음으로 곁에 있는 중매쟁이에게 선심쓰듯 표현했다.  아니, 이댁 며느님 전직이 혹시 탈랜트? 저런 미모에 어디 사내놈들이 가만 놔 뒀겠나. 정말 굉장한 미모네. 이어지던 중매쟁이의 사실은 그래요 란 말을 내가 하는 칭찬에 동의한다는 뜻인줄만 알았다.
        세월은 흘러 50년이 지났으니 할머니 흉내를 내어 표현 해 본다면 큰 낭패가 날 수도 있다   그 옛날의 아이들과 요즘의 아이들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다르다.  요즘 세상에, 뛰어난  미모에, 나이 30이 가깝도록 혼자라면 그야말로 사내놈들이 가만 두질 않아서 온전치 못할 거란 현실을 난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당연히 온전하다고 믿고 아끼던 칭찬을 할머니 식으로 했다가  많은 사람들 얼굴이 파래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혼절할 만큼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이 세상. 무슨수로 쫓아 가며 살아야 할지, 조금은 걱정스럽기도 하다. 입 다물고 벙어리로 살 수도 없고. 결국 할머니가 표현했던 그 칭찬은 내 시대에선 욕이 됀다는 사실이다.  한 번 들어보고 싶은 그 표현을 다시는 칭찬의 도구로 삼을 수가 없게 된 현실이 내게는 낯 설다.




11:40AM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9 나 좀 살려줘요 노기제 2004.08.09 152
58 떼낄라 소라리스 미미박 2004.08.09 142
57 원색의 삶 오연희 2004.08.08 208
56 붓꽃 정용진 2004.08.08 83
55 단순한 사연 서 량 2005.08.28 42
» 내 할머니 세대의 표현법 노기제 2004.08.06 162
53 세월 홍인숙(그레이스) 2004.08.04 278
52 꽃길 그레이스 2004.08.04 195
51 미완(未完)의 전선 백선영 2004.08.05 115
50 서울, 그 가고픈 곳 홍인숙(그레이스) 2004.08.04 367
49 달팽이 백선영 2004.08.04 119
48 어느 여름날의 풍경 오연희 2004.08.05 151
47 조국 정용진 2004.08.08 45
46 백제의 미소 임성규 2004.08.02 196
45 떨쳐버릴 수 없는 친구 조정희 2004.09.25 191
44 내가 지나온 白色 공간 홍인숙 2004.08.02 170
43 안개 속의 바다 홍인숙 2004.08.02 238
42 짐을 싸는 마음 노기제 2004.08.06 145
41 한쪽 날개가 없는 나비 문인귀 2004.08.06 119
40 뉴포트 비치 -*피어에서- 이성열 2004.08.06 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