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파피의 전설

2004.07.31 19:14

홍미경 조회 수:105 추천:6

단편 소설- 골든 파피의 전설 노란 꽃잎 위에 날개를 접고 앉아있는 나비를 향해 막 손을 뻗으려는 순간, 누군가 난데없이 내 팔을 거칠게 잡아끌며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제발 좀 정신을 차려요!” 외치는 소리에 놀란 나비는 여린 황금빛 날개를 팔랑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세찬 파장을 일으켰다. 난파선이 파곡으로 잠기듯 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한순간 끊기면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어붙은 강을 뚫고 흐르는 세찬 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푸르스름한 안개 속에서 여자의 모습이 점차 또렷한 형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쪽으로 나와야겠어요. 나를 꼭 붙잡아요!” 분명히 한국말이었다. 내 동공이 그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한껏 부풀어갔다. 차창 안으로 상체를 밀어 넣은 여자가 피투성이가 된 내 어깨를 힘겹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녀가 힘을 줄 때마다 내 입에서는 신음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고통으로 참혹하게 일그러진 내 얼굴을 지켜보다 못한 여자는 차 옆의 잡목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내 어금니 깊이 물려주었다. “참아요. 살 수 있어요.”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나는 몸을 움직여 갔다. 몸이 조금씩 차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요!” 여자가 시뻘건 얼굴을 하고 외쳤다. 상체가 조금 빠져나오는 순간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차창 밖으로 몸을 던졌다. 중력을 받은 몸이 땅바닥으로 세차게 굴러 떨어질 때 어금니에 물렸던 나무토막이 으지직 부서져 나갔다. 여자는 얼른 나를 걷어잡아 일으켰다. 나는 여자에게 의지해 몸을 일으킨 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보았다. 험악한 산 중턱 굽이돌이에서 계곡으로 마냥 굴러 떨어진 차체는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나는 절름거리며 그녀가 이끄는 대로 몇 걸음을 움직여 보았지만 곧 주저앉아버렸다. 심한 내리막길이었다. 여자의 어깨가 내 겨드랑이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를 부축한 그녀의 몸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느껴졌다. 나는 고통의 끝을 향해 질질 끌려갔다. 고통은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시간도 공간도 사라진 안개 속에서는 모든 게 희미하기만 했다. 부딪히고, 뒹굴고, 또 일어서서 우리는 걸었다. 삶과 죽음이 함께 뒹굴었다. 고통의 절정에서 나는 그만 내가 끈질기게 붙들고 있는 그 끈을 놔버리고 싶었다. 얼어붙은 땅에 아무렇게나 누워 침묵 같은 안개 속에 가라앉아도 좋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여자의 존재는 막연하나마 나에게 어떤 의무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지 않는 한 나는 걸어야 했다.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눈앞에 통나무집이 나타났다. 집안의 침대에 나를 끌어다 눕힌 여자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녀의 움직임이 여전히 안개속의 영상처럼 일렁거렸다. 그녀가 내게 무어라고 말을 했지만 그 소리는 내 귓가에까지 오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낯 선 여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녀의 검고, 커다란 눈동자에서 쏟아지는 안광에 허둥대며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내밀며 내 어깨를 가만히 눌렀다. “아직 움직이지 마세요. 상처가 심한 것 같아요.” 여자의 음성이 시냇물 흐르는 소리처럼 맑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모습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외줄기 나무처럼 뭔가 위태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여기가 대체 어딥니까?” 동굴처럼 검게 패인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아침 산책길에 왠지 발길이 그 쪽으로 향했어요. 형편없이 구겨진 차 속에 사람이 있기에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말에 나는 차가 구르던 그 순간을 기억해 내었다. 그때 나는 추수감사절 연휴를 맞아 미 서부 캘리포니아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동서를 횡단하던 중이었다. 산맥은 해발 구천 피트나 되는 봉우리들로 이어져 있었지만 봉우리의 정상까지 길이 잘 닦여 있어서 나는 곧잘 한가한 날이면 차를 몰고 이곳을 찾곤 했다. 갑자기 피어오른 짙은 안개 때문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속도계는 계속 바닥을 가리켰다. 한동안 산길을 올랐을 때서야 산봉우리들이 운무에 잠긴 다도해의 섬처럼 점점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씩 주행 속도를 올렸다. 안개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두세 시간이면 산 정상을 통과해서 해가 지기 전에 산 뒤쪽의 도시까지 충분히 도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서였다. 노인의 마른손에 솟아오른 힘줄처럼 낡고, 헐거우면서도 질긴 모습으로 세월을 버티고 있는 시에라네바다의 산봉우리를 보며 길이 구부러진 곳을 막 지나쳤을 때였다. 산으로부터 굴러 떨어져 길을 막고 있는 바위덩어리를 본 순간 온 몸에 강한 전류가 흘렀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급히 핸들을 꺾었다. 차가 강하게 휘청거렸다. 시간은 잠깐 정지되어 버렸다. 신음소리를 뱉으며 눈을 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주변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팽팽히 당겨져 있다. 온몸이 욱신욱신 쑤셔댔다. 나는 다리를 조금 움직여보았다. 왼쪽 다리가 전혀 꼼짝하지 않았다. 안전벨트를 풀고, 차의 문을 힘주어 밀었다. 심하게 찌그러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깨진 차창 밖으로 목을 빼내어 두리번거리며 계곡의 위를 올려보았다. 몸이 성하다 해도 온통 잡목으로 뒤덮인 저 계곡을 타고 오르기는 힘들 것이었다. 어디선가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밤이 되자 바람은 흉기처럼 더욱 사납게 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미친 듯이 흔들리며 휘청거렸다. 나는 체온을 잃지 않기 위해 몸을 한껏 웅크렸다. 어느 순간 졸음이 참을 수 없이 밀려왔다. 정신이 점차 혼미해져 갔다. 심한 갈증에 잠이 깨었다. 하늘 꼭대기에 구멍처럼 박혀 있는 해를 쳐다보니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모든 것은 절망적이었다. 짧은 겨울 해는 산허리를 향해 쑥쑥 내려갔다.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시야에 있던 나무들의 형체가 서서히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이 밤을 또 넘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달라붙어 있는 죽음이 불현듯 가깝게 느껴졌다. 완전히 어두워진 골짜기를 바람은 미친 소리를 내며 휘굴러 다녔다. 떨려오는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다시 잠이 밀려 왔다. 지난밤처럼 잠들면 몸이 얼어 버릴 거라는 걱정도 들지 않았다. 잠이 들면 오한도, 저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겠지. 나는 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 끝에 죽음이 있더라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 여자가 짧게 외치며 창으로 다가섰다. 그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든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잿빛 하늘에서 목화송이 같은 함박눈이 펄펄 난무하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한참 동안 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그녀가 돌아서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곧 바로 통행이 차단될 텐데......” 여자는 한숨을 푹 내쉬고 난 뒤 내가 누워있는 침대 발치에 걸터앉았다. 그 아래로 여자의 흔들리는 다리가 보였다. “일단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이곳에서 꼼짝도 할 수 없어요. 이곳으로 들어오는 길이 아래에서부터 곧장 차단되기 때문이거든요. 골짜기에 쌓인 눈이 녹아내리는 삼사월까지 말이에요.” 문득 지난겨울, 산으로 오르다 입구에 쳐 있는 바리게이트 때문에 되돌아 간 것이 생각났다. 바리게이트 옆 안내판에는 눈으로 인해 통행이 전면 차단됨을 알리는 경고문이 쓰여 있었다. 머릿속에서 와글와글 개구리 울음 소리가 들렸다. 어지럼증이 일었다. 알 수 없는 숙제 하나를 껴안은 사람처럼 마음이 갑갑해져 왔다. “샛길이라도 없단 말이오? 걸어서 나가는 길도?” 나도 모르게 목소리의 끝이 갈라져 올라갔다. “그 부러진 다리로 어떻게 이곳을 걸어 내려가요? 길을 잃고 헤매다 얼어 죽을 수도 있어요.” “차가 있는 부근에 내 휴대폰이 떨어져 있을 텐데...” “설령 그걸 찾더라도 이곳에서는 쓸 수가 없어요. 터지질 않거든요.” 그녀의 입술 양 끝이 내려가며 자조적인 웃음이 실렸다. 나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의 실종 기사를 다룰 신문사 동료들이 생각났다. 그 소식은 나를 특파원으로 보낸 서울의 본사에까지 곧 전해질 터였다. 삼, 사개월간의 공백이 내게 가져다 줄 파장을 가늠해 보았지만 마구 엉킨 실타래를 앞에 놓고 있는 것처럼 체념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창으로 오후의 해가 깊숙이 들어와 한쪽 벽에 조명등처럼 걸려있다.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원룸 형의 공간에는 내가 누워있는 침대 외에도 푸른 색 큰 체크무늬의 헝겊 소파가 놓여있고, 부엌 쪽으로 의자 두 개가 딸린 작은 나무 식탁이 있다. 한쪽 벽에는 이젤이 기대어져 있고 그 위에 액자가 없는 그림이 한 점 붙어있다. 그림 속에서 나비 같기도 하고, 꽃 같기도 한 것이 나풀거렸다. 그 사이 여자는 차 한 잔을 갖고 와서 침대 옆에 놓여있는 간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그녀의 핏기 마른 손에 드러나 있는 푸른 정맥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궁금증이 점차 증폭되어 갔다. 하얗게 눈 덮인 시에라네바다 산은 수묵화처럼 보였다. 흰 눈 위에 죽은 듯 침묵하고 있는 관목들. 산속의 통나무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여자의 하루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처음 얼마간은 꼼짝 없이 방안에만 갇혀있었으나 다리가 조금씩 회복되자 나는 종종 집 앞 마당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작은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여자가 그림을 그리는 걸 바라보곤 했다. 늘 그 산이 그 산이고, 그곳에 서 있는 나무나 하늘은 같았지만 그것들은 그녀의 그림을 통해 매번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여자가 검지로 스케치북 위의 목탄을 조심스레 문대기 시작했다. 여자의 손가락이 닿은 곳마다 그림의 밑 선이 뭉개지며 그림 속의 산에 짙고 옅은 음영이 생겨났다. 나는 그녀의 곁에서 스케치북을 들추어보다가 그 그림들이 모두 곡선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쭉 뻗은 나무조차 자세히 들여다보면 곡선으로 그려낸 것이었다. “전부 곡선뿐이군요?” 여자는 입 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움직임이 좋잖아요.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 말예요.” “저는 강하게 뻗친 직선에서도 생동감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가령 몬드리안의 컴포지션이나 담벼락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볼 때처럼 말입니다.” “포스터를 보면 꼭 새로 산 신발을 처음 신은 기분이 들어서 뭔가 어색하고 익숙지 않아요. 강해보이는 것은 왠지 불안해요.” 여자가 일어서며 그림 도구를 주섬주섬 챙겨들었다. 나는 이젤을 접어서 한 쪽 손에 든 채 절름거리며 여자의 뒤를 따라갔다. 한 점 바람에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여자의 뒷모습에 가슴속으로부터 휙 삭풍이 불어댔다. 가녀린 저 어깨에 의지해서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꿈처럼 여겨졌다. 다리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나는 집 옆의 헛간에서 연장을 꺼내어 며칠에 걸쳐 통나무집을 수리 했다. 녹슬어 덜렁거리는 물받이에 못을 박고, 벌어져 바람이 숭숭 들어오던 창틈을 고쳐 놓은 날 저녁, 여자는 모처럼 푸짐한 저녁상을 차린 뒤 부엌 옆에 붙은 창고로 들어서며 나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창고의 선반 위에는 붉은 와인 몇 병과 포장이 뜯긴 말보로 담배가 한 갑 있었다. 나는 빨간 테두리의 담배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피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웬 겁니까?” “아버지 거예요. “그럼 와인도?” “네, 하지만 저도 가끔은 마셔요. 반잔에도 곧잘 취해버리지만요.” 그녀는 붉은 와인 한 병을 꺼내들었고, 나는 담배를 집어 들고서 그곳을 나왔다.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촛대에는 처음으로 불이 밝혀졌다. 불빛에 그녀의 얼굴이 모처럼 붉은 색을 띄웠다. 그녀는 와인이 살짝 출렁거리게 잔을 조금씩 기울였다. 여자는 흔들거리는 붉은 와인을 들여다보며, 검게 칠해진 창을 내다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내가 붉은 와인이 담겨진 글라스의 잔을 조금 치켜들자 그녀도 볼웃음을 지으며 내 잔에 자기의 것을 퉁소리가 나도록 부딪쳤다.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할 것 같군요.” “제가 전생에 그쪽 은혜를 입었나 보죠.”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아! 유진이에요. 김유진.” “성진혁입니다. …유진 씨.” 그녀의 검은 두 눈이 날 바라보았다. 커다랗게 열려진 동공 속에 내가 머물러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몸 안에서 솟구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황황히 그녀의 시선으로부터 얼굴을 돌렸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느낌이 태어나고 있었다. 나는 벽에 붙은 그림을 바라보았다. 온통 황금색 물결로 덮여 있는 그림 속에는 검푸른 나무가 드문드문 서있는 것 외에는 꽃 같기도 하고, 나비 같기도 한 것들이 서로 엉켜 그녀 특유의 곡선으로 화판 가득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묘하게 내 시선을 잡아끌었었다. 그녀가 이상하리만큼 나를 잡아끄는 것처럼. “저건 무슨 꽃입니까?” “파피라고 해요. 캘리포니아 주의 꽃이죠.” 그녀는 내 시선을 따라 그림을 바라보았다. “캘리포니아 주의 꽃이라, 무슨 이유라도?” “황금을 찾아 서쪽으로 대륙 횡단해 오던 서부 개척자들이 이 산을 넘지 못하고 모두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 산의 추위를 견디지 못했나 봐요. 마흔 몇 명이라던가, 아이랑 여자들도 꽤 있었다든대. 그들이 떼죽음 당한 자리에 피어난 것이 저 파피래요. 황금빛 파피.” “꼭 나비처럼 생겼군요.” “나도 저 팔랑거리는 잎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나비 떼를 떠올렸지요. 막 날개 짓을 시작하려는 나비의 몸짓말예요. 저 꽃은 자생력이 유난히 강해서 사막이건 갈라진 아스팔트의 틈이건 상관없이 비집고 나와요.” 취기가 근시근실 올라왔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내가 물었다. “나비에 숨어있는 뜻을 아세요?” 그녀는 조금 생각을 하다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자유, 아닌가요?” “그건 일상적인 개념의 자유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자유에는 책임이 강요되지만 나비의 자유는 책임을 동반하지 않습니다. 조금 위험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저건... 직접 그리신 겁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린 뒤 혼자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이 산을 내려가다가 파피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언덕을 보았어요.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죠. 이런 건조한 땅에 그렇게 많은 꽃이 피어날 수 있다는 게 말예요. 그 꽃잎이 마치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것을 본 순간, 알 수없는 희열이 올랐어요. 그때부터 환생을 믿게 되었죠.” 마치 파피꽃에 취한 듯 어지러이 눈을 깜빡이며 그녀가 내게 물었다. “죽음 뒤를 생각해 본 적 있어요?” “흙으로 돌아가지 않을 까요?.” “그 흙이 바로 비밀을 푸는 열쇠예요. 흙은 꽃이나 생물의 자양분이 되잖아요. 언젠가 우리는 그 자양분을 흡수한 꽃이나 다른 생명체로 환생하게 되는 거죠. 아, 참 신기해요... 계속되는 생의 비밀 말예요.” 세뇌 당하듯, 나는 얼토당토않게 생각되었던 그녀의 이야기에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유진 씨의 말처럼 환생이란 게 정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주술에라도 걸린 듯 죽은 엄마가 이 세상 어딘가에 환생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죽음이 너무나 또렷이 되살아났다. 집 뒤의 동산에서 신선초를 캐고 있는 엄마의 곁에 뒹굴뒹굴 누워 토끼풀을 뜯으며 장난을 치고 있는 어린 나. 곁에는 옆집 소들이 고삐가 묶인 채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다. 어디선가 컹컹, 개 짖는 소리. 나는 몸을 조금 일으켰다. 노루 한 마리가 묶여 있는 소들의 사이를 뚫고 쏜살같이 달려 산 위로 사라졌다. 그 뒤를 개 몇 마리가 사납게 짖어대며 쫓아간다. 엄마가 야야, 소가 놀라것다 하며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는 순간 옆집 소, 순둥이가 큰 눈을 휘둥거리며 앞발을 쳐들어 몸을 심하게 뒤틀어댔다. 파란 하늘에 검은 금속 한 조각이 튀어 오른다. 그건 순둥이의 고삐를 잡고 있던 쇠로 만든 정이었다. 엄마의 정수리에 그대로 꽂히는 금속 조각.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엄마. 움퍽움퍽 솟구치는 붉은 피.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내달리는 나. 대문 옆에 피어있는 수숫빛 맨드라미. 눈앞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보았을 때, 그것도 어처구니없게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다면, 그 누군가가 가장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상흔은 일생을 갖고 가야할 것이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유진 씨의 말이 위로가 되는 군요.” 벽난로의 불꽃이 조금 사그라지자 나는 일어나서 불씨가 꺼져가는 벽난로 속에 낮에 쪼개 놓았던 장작 몇 개를 더 밀어 넣었다. 나무로부터 나온 잿빛 연기가 둥근 연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리는 푸른 체크무늬의 소파로 자리를 옮겨 몸을 나란히 하고 앉아 무언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시간이 이대로 멈추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밤이 충분히 깊어갔을 때 그녀의 머리가 갑자기 내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불타올라 가는 장작불이 그녀의 얼굴 위에서 그림자로 춤을 추었다. 나를 빤히 들여다보던 유진의 검은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동그란 눈을 치켜뜰 것만 같았다. 손바닥에 그녀의 얼굴의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그녀의 입술도 뜨거울 것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우리가 누워있는 작은 공간에 둥그런 보름달이 거침없이 들어와 있었다. 며칠 동안 잠을 못잔 탓인 지 그녀는 숨소리조차 없이 깊은 잠이 들었다. 나도 일찌감치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몸만 뒤척이고 있었다. 겨울바람에 창문이 덜컥덜컥 소리를 냈다. 창밖의 나무가 몸을 비틀며 바람에 견디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몸을 벌떡 일으키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침대가 삐걱댔다. 순간, 한 줄기의 서늘한 공포가 등을 쓸고 지나갔다. 나는 몸을 일으켜 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모습이 달빛에 훤히 드러났다. 그녀의 심하게 비틀린 몸과 앙 다물린 입에서 하얀 거품이 일었다. 아, 간질? 순간적으로 언젠가 보았던, 질척한 시장 바닥에 쓰러져 거품을 물던 여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허둥댔다. 뻣뻣하게 굳어 뒤틀리고 있는 그녀의 작은 몸을 부둥켜안고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동안 몸을 뒤틀던 그녀가 잠잠해져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그녀의 작은 어깨가 조금씩 들먹이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긴 머리칼 틈으로 보이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물기를 담고 있었다. 나는 그 작은 어깨를 와락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의 등에서 앙상한 뼈가 만져졌다. 오랜 시간동안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잠든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그녀가 그대로 죽어버릴 것 같아 불안하게 서성대기도 하며, 하루를 보냈다. 해가 산을 완전히 넘어가고 어둠이 찾아왔다. 어딘가에서 풀벌레가 요란한 소리로 울어 댔다. 클램 차우더 캔을 따서 수프를 만들어 놓은 뒤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의 입술이 마른 빵 껍질처럼 보푸라기 져 있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핀으로 고정시키며 순순히 식탁으로 와서 앉아 스프를 몇 번인가 떠먹고는 식욕이 없는 듯 종이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우리는 벽난로 앞 소파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보이지 않는 엷은 긴장이 나와 그녀 사이에 당겨져 갔다. 어색해진 나는 볼멘 듯 화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왜 이런데 혼자 와 있습니까, 몸도 건강치 않은 것 같은데... 부모님은?” 내 말에 그녀는 시선을 식탁의 사각 진 모서리에 고정시켰다. “다 돌아가셨어요.” 그 순간, 나는 내 얼굴 표정을 그녀에게 숨기고 싶었다. “어제, 많이 놀랐죠? 요즘은 거의 괜찮았는데...... ” 담담한 말투였지만 그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오래 됐습니까?” 사각 모서리에서 눈을 떼지 않는 채 그녀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초등학교 때 시작했어요.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순식간에 검은 보자기가 나를 덮어 씌었죠. 참을 수 없이 몸이 뒤틀려 왔어요. 병원으로 가서 뇌파 검사를 했는데 기형 핏줄이 있다고 했어요. 내 뇌 속에요. 워낙 예민한 곳이라 수술도 못하고 줄곧 약을 먹었죠. 가끔은 약을 먹었는데도 발작이 올 때가 있어요.” 나는 그녀의 손을 그러쥐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지만 그 속에 내가 고여 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애써 나를 외면하려고 하는, 나를 응시하려고 하지 않는 그녀가 느껴졌다. 그녀의 시선이 사각모서리로 되돌아갔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쫓아 그 모서리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그녀의 눈길을 따라갔다. 그 눈동자가 다시 창가 너머에 있는 어두움을 응시했다. 나는 그녀에게만 보이는, 내게는 보이지 않는 그 곳을 주시했다. 그 지독한 어둠속에서는 뭔지 알 수 없는 야생동물의 소리들과, 바람결에 셀 수도 없이 몸을 요동치는 꽃잎의 속삭임과 기다란 가지를 서로 부딪쳐대며 우는 나무들의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그녀는 깊은 그녀만의 동굴로 빠져든 것처럼 보였고, 나는 그런 그녀를 한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위로가 내 머릿속에는 그것 밖에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산 속에서 혼자 도대체 얼마나 지낸 겁니까…당신 혼자서….”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줄곧... 겨울을 이곳에서 나곤 했어요.” “사고로 돌아가신 건가요?” “그런 셈이죠. 폭동 때였으니까.” “어떡하다가...”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얼핏 스며 돌았다. “내가 미대에 진학하던 해였으니 벌써 오 년이 되어가네요. 저녁을 먹고 식구들이 모여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어요. 티브이 화면에 흑인들이 상점들을 불 지르고 약탈하는 장면이 계속 나왔어요. 폭동이 난 거래요. 흑인 운전자를 가혹하게 구타했던 경관들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흑인들이 들고 있어났다는 거죠. 우리가 불안한 마음으로 티브이를 보고 있을 때 전화가 왔어요. 아버지 가게의 종업원이었죠. 폭도들이 아버지의 가게 주변으로 몰려오고 있다고 했어요.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아버지는 어림도 없다, 한마디로 자르시며 차의 시동을 거셨지요. 아버지를 혼자 보낼 수 없던 나와 엄마는 함께 차에 탔어요. 아버지는 화난 음성으로 내게 집으로 들어가라고 소릴 질렀지만 나도 고집을 부렸어요. 우리가 가게에 도착했을 때 벌써 옆 건물은 화염에 휩싸여 있더군요. 아버지는 미친 듯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가셨어요. 그리고 은행도 믿지 못해 가게 금고 속에 꽁꽁 감춰두었던 현금을 가방에 쓸어 담은 뒤, 차로 돌아오셨지요. 아버지가 엄마와 내게 자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차의 시동을 거는 순간이었어요. 남미계로 보이는 남자 몇이 다가오더니…….” 그녀는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이 허공에 붙들린 사람처럼 한동안 눈도 껌벅이지 않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아버지의 머리에 총을... 쏘았어요. 그리고 또 한 번...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렸어요. 그들은 거의 초주검이 된 나를 보더니 저희들끼리 뭐라고 수군대고는 아버지의 가방만 챙겨 들고 그냥 갔어요. 쓰러진 아버지의 눈 한쪽이 없어 졌어요. 검붉은 피가 푹푹 솟아올랐어요. 그것으로 모두... 끝이에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상처 입은 새 한 마리처럼 그녀가 품에 달랑 들어왔다. 불규칙적으로 뛰는 그녀의 심장이 느껴졌다. “끔찍했어요. 그때 함께 죽었어야 했는데... 혼자 살아남았다는 게... 견디기 힘들어요. 여기만 오면 엄마랑 아버지의 숨결이 느껴져요. 아버지가 직접 지으신 집이거든요. 은퇴하면 와서 살겠다고 하셨는데... 이곳에서 겨울을 지내고 나면...그래도...세상 밖으로 나갈 용기가 조금은 생겨나요.” 나는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업보가 있어서 이 여자는 그렇게 모진 주검들을 곁에서 보아야 했을까, 그녀는 나와 동질의 아픔을 견디고 있었던 거다. 하루 스물 네 시간을 깨어 있는가하면 아무 곳에서나 쓰러져 정신을 놓아버리기도 하는 여자. 겨우 뭔가를 먹었다고 내심 좋아하면 곧 화장실로 달려가 모두 토해버리는 여자. 식탁 위에 놓여있는 의문투성이의 알약 병들. 나는 눈을 들어 그녀를 천천히 쳐다보았다. 내 시선을 의식한 그녀는 얼굴에 힘없는 미소를 조금 지어보일 뿐이었다. 겨울 산속에서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은 우리는 자리를 벽난로 앞에 있는 소파로 옮겨 마지막 남은 와인의 병뚜껑을 땄다. 벽난로에서는 주홍색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고, 취기가 조금 오른 듯 그녀의 얼굴도 발그레 달아올랐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물을 걷잡을 수 없듯이 내 정신은 온통 그녀에게로 쏠려 가고 있었다. “사랑을 해 본 적 있나요?” 내 말에는 대답을 않은 채 그녀는 가만히 내 눈을 응시하고 있기만 했다. “난 왠지 유진 씨가 그런 것 전혀 모르는 사람 같기만 해요.” “사랑? 그건 너무 흔한 말이에요. 누군가 내 귓가에 속삭였던 것도 같고, 나도 그런 말을 누군가에게 고백했던 것도 같아요. 가끔 내가 뱉어 냈던 말들, 무덤도 없이 공기 중에 떠돌던 그것들이 내 생각 속으로 들어 와요.” 어두운 창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내 시선이 쫓고 있다. 우리는 함께 어둠을 한동안 응시했다. 그 어둠 건너에서 일어나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문득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번인가 사귀어 본 여자들은 있었지만 서른 살이 다 되도록 한 번도 결혼까지 생각하며 만난 여자는 내게 없었다. 하지만 이 여자만큼은 내 둥지에 담아 조심스레 평생 보호해 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군요.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있나요?” 그녀는 말없이 내 눈을 응시했지만 나는 그녀의 눈 속에 내가 담겨 있지 않음을 알았다. 뭔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눈동자는 어딘가를 쫓아가고 있었다. 잠시 뒤, 그녀는 나직한 음성이긴 했지만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는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해요. 숲과 나무를 흔드는 바람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 소리, 그런 것을 그릴 때, 누군가 그걸 알아준다면, 정지된 평면적인 그림이 아닌 살아있는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 숲이 되고, 나무가 되고, 그 나무에 부는 바람이 된다면, 나는 그때 그림을 통해서 환생하는 거죠.” 혼자 중얼거리듯 말을 끝낸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이 약간 휘청거렸다. 그녀는 소파 등걸에 있던 얇은 담요를 어깨에 둘렀다. “밖에 나가려고요? 추울 텐데...” “술이 조금 오르는 것 같아서요. 금방 들어올게요.” 문 닫히는 소리가 난 뒤, 나는 잔에 반쯤 남아있는 와인을 한꺼번에 모두 마셔버렸다. 알 수 없는 갈증이 몸을 태웠다. 벽난로의 불길이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나는 하얗게 재가 되어가는 나무를 바라보다가 장작 몇 개를 더 벽난로 속으로 집어넣은 뒤 그녀를 찾아 앞마당으로 나왔다. 어둠 탓인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렸다. 두 번, 세 번, 점점 내 목소리가 커져갔다.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손전등을 들고 나온 나는 집 주변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가슴에서 심장이 덜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집 앞 마당 한 구석, 그녀가 가끔 앉아서 계곡을 바라보던 작은 바위 앞으로 갔을 때였다. 바위가 손전등 빛에 달랑 들어왔을 때 내 몸이 갑자기 굳어왔다. 너럭바위에 뿌려진 선홍색 피! 불길한 예감으로 온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핏자국을 따라 손전등의 빛을 움직여 보았다. 핏자국은 바위 밑쪽의 계곡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 비탈길을 내려갔다. 그곳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녀가 엎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를 와락, 잡아 일으켰다. 그녀의 머리와 얼굴이 피투성이다. 얼른 코에 손가락을 대어보았다. 아무런 숨결도 느껴지지 않았다. 목의 혈관과 봉곳이 솟아있는 왼쪽 가슴에서도 그녀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눈물도 울음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안고 일어섰다. 몸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어떻게 집안으로 들어왔는지 기억이 없다.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허둥대며 침대시트를 두 손으로 거칠게 부욱, 찢었다. 어떻게든 피를 막아보려 했지만 그녀의 머리를 감은 하얀 천은 곧 핏물로 붉게 물들여져 갔다. 아,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멍청히 서서 머릿속으로 집밖으로 나간 그녀의 행적을 뒤쫓아 갔다. 너럭바위를 떠올린 순간 검은 보자기가 펼쳐졌다. 간질 발작? 나도 모르는 신음소리가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발작을 하다가 바위에 머리를? 피를 철철 흘리며 계곡으로 구르고 있는 그녀. 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짐승의 울음소리를 닮은 오열이 터져 나왔다. 나는 무너지듯 침대 곁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눈을, 그 커다란 눈을 감고 있다. 두 손이 그녀의 얼굴을 더듬고 있다. 마른 얼굴에 유난히 도도라진 콧날을 지나 입술. 그녀의 얼굴에 내 얼굴을 포갠 채 내 손은 그녀의 손을 찾고 있다. 조금 전까지 꼼지락 거렸던 그 손가락, 내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을 벌리며 비집고 들어갔다. 슬픔이 파장을 일으키며 복받쳤다. 그때였다. 무엇인가 내 손바닥으로부터 움직임이 느껴졌다. 나는 얼굴을 조금 들어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얼핏 그녀가 칠흑 같은 검은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가 눈을 다시 뜰 것 같아 며칠을 꼼짝 못하고 그녀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에 엎드린 채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뭔가 깨알 같은 것들이 그녀의 얼굴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까이 들여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이가 윽물려왔다. 벌레였다. 그것들을 떨어내며 몸이 심하게 우들거려왔다. 제기럴! 그녀가 죽었다니...... 나는 헛간에서 삽을 챙겨 나와 너럭바위 앞에 섰다. 그곳은 그녀가 이젤을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곤 했던 곳이다. 온 힘을 주어 삽을 굳은 땅위에 꽂았다. 갈색 흙은 추운 겨울 내 얼은 채다. 단단하게 굳어버린 대지 속으로 나는 삽을 밀어 넣었다. 등이 땀에 젖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계속 삽질을 해서 땅을 파내려 갔다. 삽을 언 땅에 꽂을 때마다 가슴 한 부분도 함께 저며지듯 아려왔다. 다시 삽을 힘껏 밀어 넣었을 때, 삽날이 심하게 옆으로 미끄러져 버렸다. 커다란 돌 때문이었다. 나는 삽자루를 옆으로 던져놓은 뒤, 헛간에서 곡괭이를 들고 나와 다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곡괭이를 휘두를 때마다 며칠 동안 씻지 못한 몸에 누런 흙먼지가 더께처럼 들러붙어 갔다. 마침내 돌이 구덩이 밖으로 던져졌다. 나는 다시 삽질을 계속했다. 구덩이는 점점 깊고 넓게 파져갔다. 구덩이가 허리께만큼 깊어졌을 때, 나는 내 몸을 그 바닥에 반드시 뉘어 그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구덩이는 내가 눕고도 남을 만큼 넉넉하게 파여 있었다. 나는 일어나 삽을 구덩이 밖으로 던져 놓은 뒤 구부리고 앉아 바닥의 잔돌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맨손바닥으로 구덩이 바닥의 울퉁불퉁한 면이 평평해지도록 한동안 쓸어 주고는 구덩이 밖으로 나왔다. 나는 손등으로 땀을 쓰윽 문지르고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흐린 하늘 탓인지 바싹 말라붙은 잡목은 산과 골짜기를 더욱 을씨년스러워 보이게 했다. 나는 윗도리의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성냥을 그었다. 바람이 채 살아나지도 못한 불꽃을 꺼뜨렸다. 나는 손바닥으로 바람을 가리며 다시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 숨을 크게 부풀린 뒤 천천히 내쉬었다. 입으로부터 푸른 연기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잠깐 동안 시야에서 머뭇거리다가 곧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다시 한 번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뱉어진 연기가 허공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나는 그 담배 연기가 아주 없어진 게 아니고 공기 중에 혼령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순간 들숨을 타고 다시 내 속으로 들어올 거라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눈앞이 희뿌옇게 변해갔다. 그래, 너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길 좋아했었다.‘생명을 가진 것들은 모두 환생한다고 믿어요. 혼으로든, 무기질로든 말이죠!’그녀의 말소리에서는 늘 맑은,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며칠 동안 불이 꺼져 있던 실내 공기는 을씨년스러울 만큼 차가웠다. 나는 곧장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 곁으로 갔다. 깊은 잠에 빠진 듯 누워있는 그녀를 한동안 내려 보고 있으니 견딜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녀의 죽음을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한 생명이, 내게 소중해진 한 목숨이 이렇게 갑자기 사라져간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파리 한 마리가 날개 소리를 내며 앉았다. 나는 손을 휘저어 파리를 쫓아냈다. 약간의 냄새가 그녀의 몸 위에 붙기 시작했다. 나는 뜨거운 물에 헹궈 낸 타월로 그녀의 몸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핏기 마른 얼굴, 귓불 그리고 꼼지락 거리던 작은 손가락 사이사이를 닦아내다가 그녀의 시선이 자주 머물던 그 창을 바라본다. 짙은 어둠이 그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녀가 바라보던 식탁의 사각모서리,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에 조용한 춤을 추고 있는 커튼, 창 너머에 있는 그녀가 사랑하던 것들. 계곡 위에 비스듬히 서있는 한 그루의 나무. 지붕을 두드리던 빗방울 소리. 나는 다시 그녀의 살 위를 조심스럽게 닦아내려간다. 그녀를 저 얼어있는, 겨울마다 매서운 추위로 얼어있을 저 땅 아래로 묻기 전, 그녀의 살결과 그 속에 숨어있는 모든 것이 녹아내려가기 전, 나는 정성을 다해 그녀의 모든 걸 훔쳐 내려간다. 깨끗이 닦여진 그녀의 몸에서 사향처럼 복사꽃 향기가 언뜻 느껴진다. 그녀의 뺨에 내 얼굴을 가만히 대어본다.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요동치는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열기에 나는 그만 그 꽃을 향해 손을 뻗는다. 꽃망울이 터지며 수줍게 열려가는 꽃잎. 나는 한 마리의 노랑나비가 되어 그 꽃 속으로 날아들었다. 오월이 가까워 오면서 산은 초록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연두 빛 어린 풀은 날마다 쑥쑥, 제 키를 키워갔고 말라붙은 듯 보였던 관목에서도 싹이 텄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에서는 언뜻 꽃냄새가 실려 있기도 했다. 나는 골든 파피가 그려진 그녀의 그림 한 점만을 달랑 들고서 그 곳을 나왔다. 그곳에 머무른 지 여섯 달 만이었다. 내리막길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자동차 한 대가 산길을 오르는 것이 보였다. 구부러진 산길을 막 돌아내려갈 때였다. 나는 나비라고 생각을 했다. 눈앞의 낮은 구릉에 수천, 수만의 나비 떼가 작은 황금색 날개를 파득거리고 있었다. 가슴으로 뜨거운 바람이 훅, 불었다. 심장을 태울 듯 달구어진 바람이었다. 그곳을 향해 내달렸다. 다가서서 보니 하늘거리던 것은 나비가 아니었다. 아니 나비라고 해도 좋았다. 갓 태어난 어린 파피꽃이 황금색으로 무리 지어 바람의 결을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황금색 물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파피꽃들이 샛말간 모습으로 나를 반기는 듯 했다. 순간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리를 꺾고 고개를 뒤젖히며 웃고 또 웃었다. 들여다볼수록 파피는 그녀를 닮았다. 어느 날인가 대지를 거슬러 부는 바람은 그녀가 누워 있는 그곳에도 파피꽃의 홀씨를 날리겠지. 흙이 되어버린 그녀가 파피꽃의 뿌리가 되고, 줄기가 되어 마침내 꽃으로 피어나겠지. 그 꽃이 퍼뜨린 홀씨는 이 산, 저 산에 지천으로 피어 산을 황금색으로 빛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오면 굳어진 땅속에서 동면을 하고 있다가 봄 어느 날에 한 떼의 식구를 불려 툭툭 그 꽃망울을 다시 터뜨릴 것이다. 가슴을 시커멓게 태우던 그리움을 밀어내고 환희가 차오르고 있었다. 소설을 끝내며 삶은 밤 속에서 몸이 동그랗게 말린 채 쪄죽은 밤벌레를 보았을 때, 활어 횟집에서 살이 저며진 채 숨을 헐떡거리는 광어를 보았을 때, 나는 환생을 원했다. 예쁜 꽃 틈에 숨어 자라는 잡초의 뿌리를 손에 거머잡고서,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피해 집안으로 피난 온 개미떼들에게 스프레이를 뿌리며, 나는 또 환생을 원했다. 미안하다, 다음 생에서는 네가 나를 먹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