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집

2006.02.15 19:32

정해정 조회 수:284 추천:8

  나는 사기로 만든 아주 조그만 장식용 <집>입니다.
  크기는 어린아이 주먹 만 하구요. 앞가슴은 구멍이 뽕뽕 뚫렸는데 속은 텅 비어 가볍습니다. 태어난 곳은 서울의 변두리 어느 수출공장입니다. 함께 태어난 친구들이 소곤거립니다.

  "얘들아 우리들은 모두 다른 나라로 팔려간데-" 라고요.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간절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느님! 기왕에 팔려 가는 신세라면 크고, 부자나라라는 미국으로 보내주세요. 네?"
  공장아가씨 순이 언니는 내 몸에 색칠을 합니다. 머리는 진한 자주색. 몸  둥이는 초록색. 가슴에 뽕뽕 뚫린 구멍은 창문이랍니다. 창틀을 그릴 때는 가느다란 붓에 까만 물감을 찍어 조심스럽게 네모난 칸들을 만듭니다. 그러면서 순이 언니는 혼잣말을 합니다.
  "아이구 앙증맞아라. 고거 우리 방 텔레비죤 위에 올려놓았으면 딱 좋겠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로 그렇게 될까봐 가슴이 두근두근 합니다. 나는 부자 나라인 미국으로 가고 싶었으니까요. 순이 언니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를 얇은 종이에 돌돌 말면서 내 몸을 다독거립니다.
  아까 그 말은 그냥 해 본말이었나 봅니다.
  "잘 가 아-"
  순이 언니는 웃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씩 상자에 누었어요. 그런데 하느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는지 내가 누운 상자에 '미국 행' 이라는 도장이 꽝! 찍혔습니다.

  그 후 몇 날을 기다려 배에 차곡차곡 실렸지요. 뱃속 깜깜한 상자 속은, 파란 하늘도, 넘실거리는 바다의 물결도, 눈부신 햇님도. 아무것도 볼 수없이 그냥 깜깜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도착할 크고 화려한 나라에 대한 동경과 멋있는 세상에 대한 꿈에 이런 것쯤이야 대수냐고... 오히려 가슴은 터질 듯 부풀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날들을 갑갑한 상자 속에서 살았을까요.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했던 날이 왔습니다. 여기가 어딜까?
  나는 상자에서 나와 겹겹이 두른 종이 옷을 벗고 화려한 백화점 유리진열장 위에 놓여졌습니다. 그야말로 눈이 부십니다.
  "나는 장난감이 아니라 장식품이야. 부잣집 화려한 거실 황금 촛대 아래 놓여질지도 몰라. 아니면 근사한 장식장 속 수정으로 만든 교회 옆에 나란히 서 있을 수도 있어. 그래 결코 나는 장난감이 아니라 장식품이지. 암. 장식품  이고 말고..."생각만 해도 황홀합니다.
  나는 가슴이 또다시 설레기 시작하면서 부잣집으로 팔려 가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백화점이 가장 복잡한 오후시간에 어떤 여자가 나를 번쩍 들었습니다. 현기증이 잠깐 일었어요. 몸집이 푸짐하게 생긴 흑인 아줌마였습니다.
  예쁘게 화장을 한 언니가 은색 긴 손톱으로 계산대를 꼭꼭  찍자 아줌마는 나를 들고 자동차를 탑니다. 나는 여전히 가슴은 두근거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현관문을 들어선 아줌마는 나를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전화기 옆에 놓았어요. 새빨간 뷰겐빌랴가 창을 기어오르며 불꽃같이 넘실거렸습니다.
  아줌마는 곱슬머리 토니 와 두 식구가 삽니다. 두 사람은 검은 얼굴에 커다란 눈이 무척 순하게 보입니다. 큰 부자는 아니라도 마음이 편하게 사는 집입니다. 아줌마는 큰 병원 간호사랍니다. 이 집에서 나도 덩달아 편합니다.

  내가 이 집에 온 다음날 토니 의 열 살이 되는 생일 파티가 있었습니다. 이 집은 식구는 적지만 자주 손님을 초대해 웃음이 가실 날이 없답니다.
  아!아! 내가 그렇게도 원했던 부자나라, 비록 저택은 아니지만 늘 웃음과 행복이 고인 집 창가에서 마음 편하게 살게 되다니... 얼마나 행운이냐. 슬슬 지나가는 바람마저도 달고 향기롭기만 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요.
  나는 나도 모르게 날이 갈수록 행복한 마음이 점점 무디어만 갑니다.
  착한 아줌마와 토니 에게 고마운 마음마저도 잊어버리고 내가 잘났기 때문에 행복한 것은 당연하다는 마음이 솟아났어요. 어이없게도 흑인 집 창가  보다는 백인 집 창가가 내겐 더 어울린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요.

  마당에 안개가 나지막하게 깔린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습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토니 아줌마가 나를 들고 입으로 먼지를 후-- 불더니 백화점에서 올 때처럼 다시 포장을 해요. 그때와 다른 것은 분홍색 리본을 새로 달았답니다. 나를 들고 토니 와 함께 자동차를 탔습니다. 자동차 안에서 토니 는 나를 보고 작은 소리로 "미안해..."했습니다.
  어느 집 현관 앞에서 딩동! 벨을 눌렀습니다. 현관문이 열리자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웃음과 함께 쏟아져 나왔습니다. 아줌마는 그 댁 주인보고 말합니다.
  "호세 생일 축하해요. 전에 우리 집에 왔을 때 호세 가 갖고 싶어했던 것 여기요.
  호세 는 멕시코에서 온 토니 의 친구랍니다.
  나는 그 날로 개구장이 호세 의 장난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장난감이 아니라 장식품이라고 소리소리 쳐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는 호세 의 장난감 상자 속에서 뒤죽박죽 부대끼며 살다가 또다시 운명이 바뀌는 날이 왔습니다. 호세 가 백인친구 스티브를 자기 집으로 대리고  온 날 이었습니다
  스티브 는 주근깨가 까뭇까뭇 덮인 얼굴에, 금발머리는 아무렇게나 뒤로 묶어 꽁지머리를 하고있어요. 스티브는 주의가 산만하고 거칠어서 어쩐지 정이 안가는 아이입니다.
  스티브 는 그 날 호세 의 방에서 놀다가 장난감 권총 한 개와 나를 슬쩍 가방 속에 낳고 갑니다. 호세 의 집에서 스티브 의 집은 세 블럭 떨어진 가까운 이웃입니다.  

  스티브 의 집은 온갖 잡동사니가 쓰레기 더미처럼 싸여 발 디딜 틈도 없습니다.
  나는 스티브네 쓰레기통 같은 방에서 또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덜렁이 호세 는 아마 나와 권총이 없어진 줄조차도 모를 겁니다.
  그런데 이 집은 내가 살았던 집중에서 제일 큰 집 인데 이상하게도 썰렁한 공기에 웃음이 없네요. 스티브 아빠는 집에서 거의 볼 수가 없고, 스티브 엄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에 취해 신경질만 부립니다. 스티브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만 합니다. 아빠는 스티브의 친 아빠가 아니랍니다.

  바람이 세게 부는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아래층에서 스티브 아빠랑 엄마가 크게 싸움이 붙었습니다. 와장창, 우장창 살림이 부서지고, 유리창이 깨지는데 스티브는 못 들은 척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만 합니다.
  바로 그 때였습니다. 성이 잔뜩 난 아빠가 갑자기 스티브 방문을 열어 젖혔습니다. 깜짝 놀란 스티브가 돌아다보니 아빠는 꼭 실성한 사람처럼 얼굴이 노랗게 되어 잡히는 대로 물건을 창 밖으로 집어 던집니다.
  핏발 선 눈이 나 있는 곳으로 향한 순간 나는 무서워 눈을 딱 감아 버렸습니다. 순간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가 했더니 창 밖 길바닥으로 동댕이쳐 쳤습니다.    

  아구구구! 불행 중 다행으로 잔디밭이라 몸은 부서지지 않았는데 지붕이 약간 떨어져 나갔습니다.
  나는 그 날 부터 내가 집이면서 집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답니다.
  춥고 깜깜한 밤에는 바람이 흙먼지만 밀쳐 보냈습니다. 눈에 불을 켠 집 없는 고양이가 지나가다가 나를 앞발로 건드리면 어찌나 무서운지 몸을 떨며 막 울었어요.
  먼동이 틀 무렵 산책 나온 강아지란 놈이 나를 향해 뒷다리를 들고 오줌을 지익 갈기고 가니 내 신세가 서럽고, 자존심이 상해 울고 또 울었답니다. 그럴 때 나는 토니 아줌마가 그립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했지요.

  그러던 어느 새벽이었습니다. 마라톤을 하는 어느 청년이 나를 번쩍 들더니 쓰레기통 에 확 던지고 뛰어갑니다.  
  세상에!! 이런 더러운 곳이 또 있을까요. 금방 숨이 끊길 것 같은 습기 찬 악취가 나를 짓누르고, 더러운 쓰레기에 범벅이 돼 울음도 나오지 않네요. 차라리 바람이 먼지를 쓸어 보내고, 강아지가 오줌을 갈기더라도 길바닥에서 뒹굴다가 누군가의 발길에 채어 산산조각이 나서 죽어버렸으면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만 간절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경에서도 아스라하니 고향생각이 납니다. 가난하지만 순이 언니네 집, 온 식구가 오순도순 모여 앉은 따뜻한 방. 그 방 텔레비죤 위에 내가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애초에 미국에 보내달라는 기도는 괜히 했나봅니다.
  바로 이때였습니다. 쓰레기통 안으로 커다랗고 시커먼 손이 쑤욱 들어왔습니다. 나는 겁이 나서 숨을 죽이고 있는데 시커먼 손은 이것저것 쓰레기를 뒤적거리더니 찌그러진 맥주깡통 두 개와 나를 집어 검정 색 비닐 백 속에 넣고 어디론가 갑니다. 그때 나는 아물아물 정신을 잃었답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나는 살며시 눈이 떠졌어요.
  봄인가? 햇볕이 따뜻하고 나른한 날입니다.
  어느 집 앞 잔디밭에서 널 부러져 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곁에는 나와 비슷한 물건들이 뒹굴고 있네요.

  이가 듬성듬성 빠진 때묻은 빗. 밑창이 없는 운동화. 알맹이가 다 닳은 립스틱 등등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들이 함께 뒹굴고 있습니다. 될 대로 되라 하면서요. 이것이 미국사람들의 <거라지 세일>이랍니다.
  이 빠진 빗이 약간 쇤 소리로 말합니다.
  "난 이래 뵈어도 권총 찬 바지 뒷 주머니에 꽂혀 다녔어. 내 주인은 멕시코 사람인데 경찰관 이었다구."
  이에 질세라 밑창 없는 운동화가 받습니다.
  "난 말야. 베버리 힐즈 어느 부자 집 백인남자가 새벽에 조깅할 때 제일 편한 신발이라고 애용했던 운동화란 말야. 뭐 명품이라나? "
  " 뭐. 별것도 아니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헐리웃의 유명한 나이트 클럽에서 춤추는 댄서의 입술에 수시로 키스를 한 몸이란 말야."
  알맹이 없는 립스틱의 카랑카랑한 말입니다.
  "흐흥- 뭐라구? 다들 좋아하시네. 시의원 입 속을 한번만이라도 들락날락 해본 것들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솔이 다 닳은 칫솔이 거만하게 뱉습니다.
  저마다 화려했던 과거를 자랑하며 지껄이는 신세 한탄입니다.
  그러자 또 누군가 옆에서 말합니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우리도, 꼭 필요한 누구에겐가 뽑혀만 간다면 한번쯤은, 단 한번쯤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삶을 살아볼 수 있을 텐데......"했습니다.  
  나는 그들 앞에서 아무런 할말도 없고, 말할 기력도 죄다 빠져 버렸으므로 그저 노곤한 햇빛만 받으며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잠이 조름조름 오는데 지나가던 어떤 여자가 허리를 굽히더니 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중년쯤 되어 보이는 동양 여자입니다.
  나를 들고 요리조리 살피다가 살짝 놀래요.
  "어머! 메이드 인 코리아네!" 하면서요.
  주인남자 손에 동전 몇 닢 건네더니 나를 들고 갑니다.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요. 가면서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데 나한테는 알 수 없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어요. 흥얼거리는 자장가 소리에 깊고 깊은 잠 속으로 한없이 빠져드는 것 같은데, 한편으로 내 기분은 뭔가 모르게 오래 동안 잠자고 있던 생기가 새록새록 돋아나고 있는 현상 말예요.
  집에 오자마자 그 여자는 수돗물을 틀어놓고 나를 헌 칫솔로 구석구석 닦아요. 나는 간지러워 으흐흐, 으흐흐 웃음이 납니다. 헝겊으로 물기를 닦고, 떨어진 지붕을 고치고, 온몸에 색칠을 다시 합니다.
  뽕뽕 뚫린 가슴 창문에는 옛날 순이 언니처럼 가느다란 붓에 까만 색 물감을 찍어 조심조심 창틀을 만듭니다. 이 댁 엄마는 나를 요리조리 들여다보면서 행복하게 웃습니다.

  이 댁 응접실 한쪽에는 조그만 호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실내연못 이랍니다. 호수 주변에는 아주 작은 마을이 있고 물에서는 조그만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헤엄을 치고 있고요. 마을의 집도, 나무도, 사람도, 물고기도 모두 아주 작고 예쁜 것들뿐이랍니다.
  연세 많은 어느 시인이 이 댁을 방문했을 때 호수와 작은 마을에 <드림랜드>라는 이름을 부쳐 주었답니다.
  이 댁 엄마는 나를 작은 나무 사이에 올려놓았습니다.
  "고것 참. 이쁘기도 해라" 하고 또 웃으면서 말예요. 내 마음은 고향에 온 것 같은 안도감에 잘 익은 홍시 감처럼 달게 녹아 났답니다.
  사계절이 거의 봄인 이 곳 에도 성탄절이 가까워 옵니다.
  이 댁 엄마는 드림랜드의 거리마다, 나무마다 작은 집 들마다 하얀 눈을 소복하게 덮고, 아기 손톱 만한 색색의 방울을 답니다. 그리고 텅 빈 내 가슴속에다 꼬마전등을 넣으며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라."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따뜻한 빛을 밝혀라."
  그리고 나서 이 댁 엄마는 나의 조그만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오렌지색 불빛이 금실처럼 아름답게 빛난다고 칭찬을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나의 가슴이 갑자기 따뜻해져 오는 것입니다.
  아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가슴 따뜻함. 이 댁 엄마의 말씀처럼 내가 누구에겐가 빛을 주고 있는 것일까요.
  갑자기 창 밖의 무수한 별들이 죄다 쏟아져 내려와 내 가슴속깊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자 기쁨이 반짝반짝 넘치고 넘쳐 납니다.
  나는 이 기쁨을 오래오래 꼬옥 붙들고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