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첫사랑

2005.06.08 06:03

박경숙 조회 수:276 추천:6


바람이 일렁인다. 푸른 잎을 무겁도록 매단 나뭇가지가 낭창 밑으로 내려앉았다가는 올라선다. 카페는 주방 쪽을 빼고 삼면이 다 유리로 되어있다. 한창 녹음이 짙은 계절에 이 네모난 단층 건물은 온통 푸르름 속에 갇힌 듯하다.

어쩌자고 이곳까지 온 것일까. 당신은 지금 후회하고 있다.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인연이 있기는 해도 지금 당신 앞에 앉은 저 남자의 모습은 낯설 뿐이다.



“별로 변하지 않았어. 어릴 때 그 새침한 모습에서 말야.”



그는 당신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웃는다. 가느다란 눈을 휘어 웃는 모습이 조금 옛날을 생각나게 하는 것도 같다.






“널 만나게 해달라고 난리인데 어떻게 거절을 하니? 모르는 처지도 아닌데…….”



사촌의 애원에 가까운 부탁에 당신은 그의 자동차에 탔다. 당신이 떠나 살던 세월 사이 너무 변해버려 감을 잡을 수 없는 어느 거리에선가 간첩 접선을 하듯 남자를 만난 사촌은 당신을 남자의 자동차 안으로 덥석 밀어 넣었다. 엉겁결에 검은 가죽시트로 털썩 주저앉는 순간 차 안에서 풍겨오는 낯선 체취에 당신은 잠시 움찔했다.



“널 잊은 적이 없다는데……. 네가 첫사랑이라잖아.”



사촌은 완강한 당신을 밤새 설득했고, 당신은 고국에 머무는 동안 사촌의 집에서 잠을 자고 밥을 얻어먹는다는 빚을 갚듯 그 남자를 만나겠다고 했다. 의료 기구 도매업을 하는 사촌은 판매망을 구축하다 같은 고향출신의 외과의사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그 남자였다. 무엇이든 팔려는 사람은 말이 많다. 본래 말수가 많지 않던 사촌이 남자치고 수다스런 중년이 된 것을 보면 생존의 원리는 과연 위대하다. 산다는 것 때문에 말이 많아진 사촌은 의료 기구를 팔기 위해 그 외과 의사를 구어 삶으려다 너무 많은 말을 해 버렸다. 미국에 가 사는 여자 사촌이 있는데 혹 동창이 아니냐고. 그 뒤로 외과 의사는 모든 의료 기구를 사촌에게서 사들였고, 가끔 사촌은 당신에게 한 번 다녀가라는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남자는 딸기쥬스 컵의 날씬한 허리를 움켜쥐고 분홍색 스트로를 빨아댄다. 통통하게 살이 찐 손등에 검은 털이 돋고 손가락에 끼워진 두툼한 백금반지엔 족히 0.5캐럿은 되어 보이는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친다. 역겨운 것이다. 그저 그런 집안에서 성장했던 저 남자가 지방의대를 졸업하고 돈께나 있는 집에 데릴사위로 팔려갔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다.



“생각나? 그 겨울방학 말이야. 우리 중학교 2학년 때였어. 밤늦게 과외 공부를 마치고 나오는데 낮에 녹았던 눈이 꽁꽁 얼어 빙판이 졌지. 조심조심 걷던 네가 몇 걸음 걷다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어. 아프다고 징징 울어대던 너를 일으켜 세워 나는 네 손을 꼭 잡고 집까지 데려다 주었지.”



그가 테이블에 다소곳이 얹힌 당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창밖 푸른빛에 반사된 당신의 마른 손은 창백하기만 하다. 갑자기 그의 눈에 연민이 어린다.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구나. 하긴 미국 살이가 아주 성공하지 않으면 여자는 더 고생이라더구나. 네가 떠났다는 것은 동창회에서 알게 되었어. 떠난 이유야 어찌되었든 아이들 교육을 위해선 잘된 일 아냐? 모두들 못 떠나서 난리인데 말야.”



그의 눈은 계속 당신의 손에 머물고 있다. 딸기쥬스의 분홍빛과 창으로 비쳐드는 푸른빛 사이에서 당신의 손이 어색하게 움찔댄다..



당신은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 겨울의 어느 날 과외수업은 유난히 늦게 끝났고, 같은 방향으로 걷던 친구는 독감에 걸려 오지 못했다. 하얗게 얼어붙은 길을 그렇지 않아도 겁에 질려 걷던 당신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 중학생치고는 유난히 성숙했던 저 남자는 키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다. 손을 잡았었다고? 저 남자의 저 털이 돋은 손을……. 당신은 피식 웃음을 흘린다. 당신을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진다.



“야 웃는 모습은 정말 그대로구나. 너는 그렇게 웃기 위한 어떤 비밀을 네 가슴에 숨겨놓은 것 아냐? 난 어릴 때 네 웃음을 보며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거든.”



당신은 다시 웃는다. 가느다란 눈의 꼬리를 늦추고 엉거주춤 당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 속에서 당신은 혼자 말을 한다.

웃기 위한 비밀? 그럼 내 가슴을 쪼개고 열어봐. 거기 무엇이 있는가를……. 너는 외과의사라며? 날카로운 메스를 내 가슴에 대고 살을 찢어봐. 뼈를 가르고 안을 들여다 봐. 살기 위해 벌렁벌렁 뛰는 심장 말고 거기 무엇이 있는가를. 어쩌면 숯처럼 검은 덩이 한 움큼이 튀어나올지도 몰라. 나는 다 타버렸거든. 내가 다만 껍질이 되어 여기 앉아 있다는 것을 너는 아니?



“무얼 그리 생각해? 우리 그만 여기서 나가 식사나 할까?”



남자는 벌써 일어서 당신을 재촉하고, 껍질뿐인 당신은 천천히 그를 따라나선다.



남자는 그날 풀코스의 일식을 대접했고 적지 않은 돈을 썼다. 당신은 불편했다. 당신 스스로는 이 남자의 호의를 받아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남자는 달랐다. 그의 삶에서 당신은 등불과 같은 존재였다고 말한다. 어린 소년의 가슴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새긴 첫사랑이었다고.



당신은 다시 웃는다. 그가 너무 유치한 문장을 읊조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웃는 모습을 얼이 빠진 듯 바라보던 남자는 급히 말한다.



“난 행복하지 않아. 아내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야.”



당신은 푸하하 웃는다. 아주 크게 소리를 내어 맘껏 웃어 버린다. 그 나이쯤 된 기름진 남자들이 탐나는 남의 아내를 앉혀놓고 상습적으로 하는 말 일거라는 생각에서다.



“내가 그래도 이렇게 살아온 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았던 때문이었어. 너는 말하자면 나의 신앙과도 같은 존재야. 나를 숨 쉬게 하는 공기처럼 말야.”



너무 웃느라 눈물까지 흘려버린 당신은 눈 꼬리로 흘러나온 눈물을 찍어내다 문득 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미안하구나. 나는 너를 추억해 본적이 없는데…….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새 한 사람을 살게 하는, 그야말로 공기와도 같은 첫사랑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당신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숙연해 진다. 입버릇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말하는 당신은……. 이번엔 정말 사라지고 말겠다고 결심했던 당신은 마지막으로 고국과 고향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곤 정말 사라져야겠다고, 이 척박한 삶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고 말이다.



땅이 문화를 만든다더니 찾아간 새 땅은 당신의 가족 안에 이상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카지노로 마약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린 그들 속에 당신의 가슴은 숯덩이가 되었다. 검게 타버린 자신이 저 남자의 가슴 안에 향기를 뿜는 우아한 꽃으로 심어져 있는 것이 당신은 놀랍다. 더 이상 웃을 수가 없다. 왜 이제는 울고 싶은 걸까. 당신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감추기 위해 급히 일어선다. 그리고 그 남자의 자동차 안 가죽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가 사촌의 집 앞에 도착해서야 눈을 떴다. 남자가 첫사랑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 당신을 곤란하게 할 행위는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믿으면서.



자동차에서 내린 당신은 미국 사는 사람답게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끈끈한 그의 손바닥에 겹쳐지는 당신의 손은 건조하기만 하다. 미련이 남은 듯한 그가 마지못해 당신의 손을 놓자 당신은 뒤도 안 돌아보고 총총히 사촌의 집 대문 안으로 사라져 버린다. 대문 안 어둠이 당신을 삼키자, 남자는 긴 한숨을 쉬고는 자동차를 몰고 그 자리를 떠나간다.




당신은 이제 돌아가고 있다. 떠날 때 들고 왔던 푸른색 트렁크를 짐칸에 부치고 공항 출국로를 향해 걸음을 뗀다. 옆에 걷던 여인이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나 지금 떠난다. 잘 있어.”



말을 마치고 막 핸드폰 뚜껑을 닫는 그녀를 바라보다 당신은 몸을 휙 돌려 공중전화 부스로 뛰어간다. 그래 한 마디쯤 인사는 하고 가야할 것 같다. 오랜 세월 당신을 기억해준 그 지극정성을 생각해서도 말이다. 당신은 공중전화에 동전을 넣고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건다.



“나 지금 떠나. 잘 있어.”



당신은 아까 그 여인이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한다.



“나 말야. 그날 쑥스러워 얘기 못했는데 나중에 헤어질 때 네 손을 잡는 순간 중학교 2학년 때 잡았던 그 느낌과 너무도 똑같았던 것 있지.”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데 왜 그런지 수화기에서 향기가 풍기는 것 같다. 당신은 심호흡을 한다. 그리곤 다시 말한다.



“잘 있어!”



전화를 끊고 다시 출국로를 걷는 당신은 생각에 잠긴다. 당신도 첫사랑을 기억하고 싶다고……. 까마득히 잊어버린 첫사랑을 말이다. 언제였나? 소녀에서 처녀가 되던 그 언저리의 여름쯤 당신은 첫키스를 경험했다. 그것은 당신이 상상해 왔던 어떤 달콤함이 아니라 그저 놀라움이었다. 그날 이후 당신은 앓아누웠다. 손거울을 들고 자신의 입술을 보고 또 보았다. 발그레 상기된 입술을 바라보다 당신은 거울을 놓고 한숨을 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입술이 말을 하고 음식을 먹는 것 말고 또 다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입술에 감촉된 충격이 당신의 가슴에 사랑의 화인을 찍는 동안 당신을 오래 앓아누웠다. 당신의 가슴에선 향기가 났고 핼쑥한 당신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있다. 창공을 향해 솟아오르는 기체의 바퀴가 땅을 박차나 보다. 심한 떨림이 기내로 전해지고 당신은 이미 맨 안전벨트를 다시 한 번 조이며 첫키스의 추억에 빠져든다. 가장 행복한 여자는 첫키스의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던 그 시절, 당신은 그 행복한 여자가 되었다. 그토록 향기를 뿜던 당신의 가슴이 이제는 숯덩이가 되었다는 것에 당신은 슬퍼졌다.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을 나는 동안 당신은 검게 탄 가슴을 애써 펌프질해 첫사랑의 향기를 재생시킨다. 가슴 안에 야트막한 우물이 하나 생긴다. 당신은 심호흡을 하고 조금은 살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흩어진 것들을, 타버린 것들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당신은 영원히 사라지고 싶다던 마음을 슬며시 접어본다. 당신의 가슴은 점점 더 향기를 뿜어내고 당신은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당신이 미소를 머금은 채 잠시 잠들어 있는 동안 비행기가 심하게 떨려오기 시작한다.



“이상기류입니다. 안전벨트를 조여 매십시오.”



급히 방송이 흘러나오고 기내는 갑자기 술렁술렁 해진다. 급강하 하는 기체를 느낀 당신은 잠을 깨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지는데, 첫사랑을 펌프질하는 당신의 가슴은 아직도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미주문학세계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