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의 어떤 모양새

2005.09.19 05:25

노기제 조회 수:257 추천:2

                         술꾼의 어떤 모양새
                                                                노 기제
        우리 친정 식구들의 주량을 한 번 돌아보고 싶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는 생각이 안 난다. 우선 우리 아버지는 술에 취한 모습을 한 번도 안 보여 주셨다. 바깥에서는 어떤 술좌석을 가지셨는지 그당시에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관계로 전혀 기억에 없다. 다만 식구들이 둘러 앉은 밥상에 가끔 술이라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는 정도다. 술을 마신 사람은 아버지와 엄마. 아마 맥주 한 병으로 두 분이 기분만 내시는 그림이다.
        나보다 여덟살 위인 큰 오빠는 맥주 한 잔도 못 한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으며 물론 집에서 술을 마시는 일은 전혀 없었다. 큰 오빠보다 두 살 아래인 작은 오빠 역시 술이 약하다는 엄마의 평을 들어 본적이 있다. 밤 열 두시가 가까우면 곧잘 동네 전기구이 통닭집에서 사온 닭을 내밀며 바싹 구워진 껍데기 먹으라고 잠든 나를 깨우곤 했다. 그 때의 작은 오빠 목소린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로 술이 올라 있는 소리 였다.
        그런 식구들 틈에 막내인 난 어땠을까.
        1965년도 초봄이었다. 이제 여고를 졸업 했으니 밖에서 술좌석에도 참석 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 전에 아버지 앞에서 술을 배우라신다. 엄마가 차려온 술상엔 맥주와 양주가 있었고 안주로는 땅콩과 오징어 였을게다. 먼저 아버지가 따라 주신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니 입안에 쓴 맛이 가득해진다. 울컥 밷어버리고 싶어져 울상을 지었다.  두 모금짼 사양했다. 다음엔 양주다.
        지금 생각하니 죠니 워커쯤 아니었을까. 첫 잔을 입에 대니 향긋하니 달피한 내음이 무척 감미로웠다. 마음도 살짝 뜨는 듯 황홀한 기분에 찬찬히 마시기 시작했다. 아아, 기분 좋다. 한 잔 더. 역시 좋네. 맛도 괜찮구. 쉽게 넘어가구. 전혀 술이란 생각이 안 들었다.  거듭 잔을 비워도 자꾸 들어간다.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은 말갛게 투명해지고, 두뇌는 점점 명석하니 판단력이 앞서며 머리가 복잡해 진다. 나를 지켜보던 아버지가 기분이 어떠냐며 내 눈을 마주 보신다. 글쎄. 나쁘진 않는데 차악 갈앉네요. 무겁구 말이 하기 싫어져요. 곁에 있던 엄마가 어머 얘 얼굴 좀 봐요. 창백해요. 백지장 같애. 속은 어떠니. 글쎄. 속은 괜찮은데. 그냥 기분이 자꾸 무거워져.
        서둘러 자리 펴주고 재우라는 아버지 소리를 귓전으로 들었다.  부축 없이 내 방으로 건너 갔고 무거워진 머리를 벼개에 내려 놓으니 세상에 널린 온갖 걱정거리를 내가 맡아 쳐리 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이 엄습했다. 그 날 아버지는 넌 안되겠다. 술은 앞으로 가까이 하지 말라는 지시로 나의 첫 술상을 마감 했다.
        이튿날 아무런 후유증도 없이 잠에서 깼고 집안 식구들 중 가장 술이 쎈 것으로 기록은 남겼지만 금주령이 내렸으니 쎈 술 실력 얘기하나마나다.
        아버지의 금주령이 뭐 그리 효과가 있으련만 난 나 스스로가 술은 싫다라고 입력했다. 그날의 아주 쓰고 기분나쁘던 맥주 맛이나, 마시긴 좋았으나 후에 따라오는 기분이 힘겹게 무거웠던 양주나,  내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것들이라고 기록해 뒀다. 다른 술도 있지 않느냐고 마셔보라고 한다면 고개를 가로 저어보인다.
        참석하는 술자리에선,  먹고 싶은 것, 맛있는 것, 먹어서 기분 좋은 것들이 얼마든지 많은데 왜 하필이면 쓰고, 맛 없고, 먹어서 기분 나쁜 것들을 권하느냐며 양해를 구한다. 술이 어디 맛으로만 쓰이는 것인가. 분위기라는 것엔 역시 술 만한 것이 없으니 바로 그 분위기를 술 안 마시고도 체험하면 된다.
        술마시는 사람들 기분 대강 맞춰주며, 그 기분속에 동화되어 마음을 섞어 주면 어느 누구도 내가 술 한방울 안 마신 사람이란걸 알아채리지 못한다. 오히려 술마신 그들보다 더 기분이 좋아 술취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생각나는 에피소드 하나 있다.
         2003년도 9월에 재외동포재단에서 주최한 세계 각지에 있는 한국인 문학인들을 위한 세미나가 있었다. 독일, 미국, 일본, 스위스, 프랑스 등지에서 모인 문학인들이 일정이 끝난 날 밤에 따로 모인 자리였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들이 오가고 모임의 끄트머리라는 묘한 상황이 작용하여 기분들이 상승할 때 내가 주정을 좀 부렸다.
         고성방가 방불했던 시간들이 가고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기며 흩어 질 때 난 슬그머니 빠져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물론 내 행동에 내가 책임을 지는 뾰족한 성격 때문에 다음날의 일정에 지장을 줄듯한 늦은 취침은 피한 것이다.
        이튿날 식당에서 만난 한 선배 문인이 어제 많이 취했었다며? 노래방에도 못가구? 노기제씨 술 한방울도 안 마셨어요. 지난 밤, 나를 눈여겨 봤던 어떤이의 보호성 발언조차도 믿지 못할 여운으로 남겨진 억울했던 사연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가 주정이 심한 술꾼으로 기억하고, 또 어떤 사람은 대강 술좌석 분위기에 잘 맞는 애주가 정도로 기억하기도 한다. 아무려나  술좌석을 사랑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술이란 음료를 매개체로 자신들의 속내를 들어내는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흥미롭다. 때론 전혀 알 수 없던, 술 마시는 이들의 비밀을 살짝 엿보는 행운도 즐거운 일이다. 평상시엔 꽁꽁 숨겨 두었던 진실을, 토해 내는 모습도 내겐 귀한 인간관계를 설정 해 준다. 그러면서 유난히 주사가 심한 사람을 만날 땐 어른앞에서 술을 배우지 못했나 보다라고 생각한다. 어려운 사람 앞에서 공손하게 술 마시기를 시작했더라면 술을 핑계로 함부로 흐트러지진 않을 것 같다.
       이제 다섯 식구중 남아 있는 두 사람,  소주 반병 정도에 기분이 좋아지는 작은 오빠, 여전히 한방울도 술은 입에 안 대는 나,  선두를 가르기 전 틀림 없이 우린 엄격한 아버지 앞에서 술을 배운 사람들이다. 술에 취해도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전혀 벌리질 않는 기분 좋은 술꾼들, 그렇게  어떤 술자리에라도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술꾼으로 저들에게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