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으로 된 통장 하나

2014.07.02 04:34

노기제 조회 수:257

20140512                내 이름으로 된 통장 하나
                                                        

        미국생활에서 가장 익숙해진 공동명의라는 것. 집도 부부이름으로, 차도 부부이름으로, 통장도 부부 이름으로 모든 소유물이 부부이름으로 되어 있다.

        별 불편함 모르고 수십 년을 살았다. 내가 내 이름을 건 통관사를 직접 운영할 땐 물론 나 혼자만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 있었다. 남편 또한 약국을 경영할 땐 모든 자금들이 남편 혼자만의 이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려니 불만도 불평도 없이 지났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러다 나는 회사 문을 닫고 이른 은퇴를 했고, 남편은 대학동창에게 사기 당하고 엄청 손해 본 상태로 약국 문을 닫았다. 그 후 우리에겐 공동명의로 된 것들만 남았다. 역시 어떤 근심도 불평도 내겐 없었다.

        그냥저냥 사는 동안 남편은 예전대로 월급쟁이로 돌아갔고, 나는 여유롭게 이른 은퇴 생활을 즐기게 되었다. 남편의 월급은 꼬박꼬박 부부명의로 된 통장으로 자동 입금되고 가계 관리는 자연스레 시간이 많은 내가 맡아 하게 되었다.

        남편은 가끔 가벼운 멘트를 누구에게나 날린다. 자신은 돈이 다 어디 있는지 어찌 돌아가는 지 하나도 모른다고. 그래서 편하고 좋다는 얘기가 아닌 듯 들린다. 관리하는 나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내게 모든 경제권을 맡겨서 고맙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조심스럽고 부담스럽기 만 하다. 일전 한 푼 내 맘대로 쓸 수도 없고 딴 주머니를 찰 마음도 없다.

        흔히 복부인들이 하는 짓도 못한다. 이런 저런 좋은 기회에 투자를 하고 재산을 늘리고 할 엄두도 못 낸다.  안 돼. 하지 마.  자면서도 남편의 감시하는 눈초리가 느껴질 정도다. 차라리 얼마씩이라도 용돈을 타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나만의 통장하나 갖는 것이 내 소원이다.

        재산관리? 돈 벌어다 다 준다고? 빛 좋은 개살구는 더 이상 싫다. 사고 싶은 물건 하나 내 맘대로 못사는 권리. 사고 싶다고 말이라도 꺼낼라 치면 갖은 이유 다 들이대며 결국은 필요 없으니 사지 말라는 결론을 낸다. 너무 잘났다 내 남편은. 어쩜 그리 아는 지식이 많은지 물건마다의 단점을 속속들이 다 열거 하며 나를 설득한다. 허락 받고 살 수 있는 물건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내가 사고 싶은 물건 다 포기하고 남편이 하라는 대로만 하며 살 수는 없다. 그러니 티격태격 반론을 펼치게 되고, 서로가 언성도 높아지다 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으련만. 내게 쏟아지는 언어폭력에 난 그만 입을 다물어야 한다. 계속 이렇다 저렇다 대화를 하려 애쓰다간 곧 바로 던지고 때리는 폭력을 당해야 하니까.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참고 용서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얘기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예수님이 그리 살라 가르치시니까? 나도 그런 줄 믿었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 해 참고 살아보려 했다.  죽고 싶다고? 그렇담 그 죽을 수 있는 힘으로 살라는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그리 하려 애썼다.

        그러다 완전 코너로 몰렸다. 더 이상 피해 갈 수 없는 지점에서 난 정말 죽고 싶다고 하느님께 아뢰었다. 난 못 살겠어요. 무슨 수를 쓰세요. 나 이대로 죽어 없어지는 것이 하느님 뜻인가요?

        살살 달래면서, 하라는 대로 하면서 그냥저냥 살아라. 남들처럼 바람을 피길 하냐. 돈을 안 벌어다 주냐. 너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취미 생활하는 것도 딴 여자들에 비하면 넘치는 축복 아니냐. 대중의 의견이 이렇다 보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참고 살다 어느새 사십년을 넘게 살았다.

        그런데 이젠 내가 진짜로 죽고 싶어졌다. 남편을 피해 살 수 있는 다른 길 이 없음에 내려지는 결론인가보다.

        누구의 잘 잘못을 따지지 않는다. 그냥 이 상태로는 살 수가 없다. 아니 살기 싫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철없는 인간이라고 누군가 손가락 질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어디에서 그런 남편 찾을 수 있겠느냐며 혼자 나가서 고생 좀 해 봐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무리들.

        그런 고생하면서라도 자유롭게 내 의지대로 한 번 살아 보고 싶다. 부모님 곁에서 살 땐, 한 번도 안 들었던 욕지거리, 폭력을 감당하기엔 내가 너무 부족하다.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하면서 꼭두각시처럼 살면, 절대 일어나지 않는 풍랑들이다. 그나마 사십년 넘게 참고 살 수 있었던 건, 사랑으로 키워주신 부모님 덕에 그 쌓였던 사랑으로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젠 고갈상태가 된 사랑이다.

        나 스스로가 어찌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 있겠나. 하늘을 향해 크게 울부짖는다. 나 죽고 싶어요. 나 죽어요? 그게 하늘의 뜻 인가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439 해부 오연희 2004.09.15 32
10438 아버지와 낚시여행 홍인숙(Grace) 2004.09.15 41
10437 그 친구들 문인귀 2004.09.16 30
10436 하늘가는 길 전지은 2004.09.16 49
10435 요즘 나는 무척 바쁘다 강학희 2004.09.16 42
10434 고모님과 동정 강학희 2004.09.17 48
10433 강학희 2004.09.17 64
10432 안착을 알리며 김영교 2004.09.20 105
10431 30여년 세월의 스승 권태을 선생님께 이승하 2004.09.20 76
10430 불꺼진 창 최영숙 2004.09.21 93
10429 가슴에 키운 흑진주 백선영 2004.09.21 65
10428 그대의 사랑으로 나는 지금까지 행복하였소 이승하 2004.09.23 56
10427 가을에 띄운 편지 강학희 2004.09.23 141
10426 눈 덮인 산정 (1) 박영호 2004.09.24 92
10425 화원 산책 (2) 박영호 2004.09.24 98
10424 영혼의 강 박영호 2004.09.24 97
10423 추석단상 오연희 2004.09.25 112
10422 떨쳐버릴 수 없는 친구 조정희 2004.09.25 191
10421 장례식에서 강학희 2004.09.26 106
10420 일상이라는 잡초 김혜령 2004.09.27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