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가는 길

2004.09.16 08:40

전지은 조회 수:49 추천:2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고 지난 간 초가을은 말 그대로 청명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높은 가을하늘을 언제 보았던가 싶다.
  길을 떠난 것은 아들과 남편의 조카가 짧은 방학동안 이곳을 찾아온 때문이었다. 하늘이 푸르고 맑고 높아도, 계절이 바뀜을 알리는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들어도, 경치가 수려하다는 곳을 찾아 선뜩 떠나지 못했던 것은 삶의 터전을 옮긴 후의 어설픔과 불안감 같은 것 때문이었을까. 바쁜 일들이 늘 산재해 있는 것도 아닌데 사업에 필요한 출장이외엔 집을 비우면 안될 것 같은 초조감에 길을 나서지 못했다. 어쩌면 이건 나이가 들어 새로운 곳에 둥지를 트는 어려움일 수도 있다.
  스낵과 음료수를 종이 백에 넣으며 소풍날 아이 마냥 마음이 달뜬다. 오랜만에 아이들을 앞세운 가족 나들이라 더 그랬으리라. 가벼운 흥분으로 일탈을 할 수 있음은 건조하기만 했던 일상에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록키산맥의 한 자락에 우뚝 솟은 산정, Pikes Peak은 14,110 피트의 높이로 콜로라도가 자랑하는 산봉우리 54개 중 31번째의 높이를 가지고 있다. 년 중 이 산을 찾는 관광객이 50만 명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는 관광청의 통계로 보아 세계적으로 알려진 명산임에 틀림없다. 산정을 향하는 19마일, 그 길의 반쯤은 아직도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채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는 자갈과 흙 길이다. 길을 오르면서 아득하게 내려다보이는 돌산의 절벽들은 숨을 멈추게 가파르다. 10마일 속도도 내기 힘든 꼬불거리는 이차 선에서 어떻게 차 경주를 할까. 그래도 해마다 6월 마지막 주일 토요일이면 경주용 차를 모는 사람들은 목숨을 건 한판 승부를 위해 곳곳에서 몰려온단다.    
  산의 입구는 캘리포니아의 풍경과 비슷하다. 들풀들은 낯선 손님을 위해 조막손을 흔들고 늘 푸른 소나무도 바람에 흔들리며 잔잔한 멋을 부린다. 머지 않아 가을 색으로 변할 아스펜 추리들도 아직은 온몸을 떨며 초록의 힘을 다한다. 오를수록 나무들의 키는 작아지고 점점 모습을 움츠리더니 중턱을 넘어서자 들풀조차 없는 돌산이다. 검붉은 돌산. 바람들은 붉은 흙돌개비를 일으키며 차를 흔든다. 서행에 더 서행을 해야 하는 산길 옆으로 언제 나타났는지 갑자기 흰 구름이 잡힐 듯 밀려든다. 창을 열면 금방이라도 다가들 것 같은 구름 물결들. 구름 파도 사이로 언 듯 언 듯 도시는 작은 풍뎅이가 되어 보이고 구름바다에 빠져 흔들리며 숨이 차다. 가벼운 구토증 같이 속이 울렁거리는 듯 하더니 어지럼증이 훅하니 지나간다. 가벼워진 공기 탓이리라. 심호흡을 하며 자세를 바꾸어 본다.
  구름 층이 지나자 창 앞엔 다시, 푸른 하늘이 손에 잡힐 듯 하다.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듯한 착각. '아, 하늘로 가는 길!' 말을 잃어버린 채 선녀가 되는 꿈을 꾼다. 다시 휘청, 어지럽다. 또 다시 심호흡.
  산정에 가까워질수록 잡초포기 하나 보이지 않고 생명체라곤 살지 않을 것 같은 돌무덤의 연속이다. 단지 생명의 흔적이라면 곰팡이류인 검은 이끼가 낀 커다란 바위덩이들을 돌더미 사이에서 가끔 만날 뿐. 산밑의 도시인 만니투와 산정의 온도 차이가 보통 30도 정도이며, 높이에 따라 여덟 가지의 다른 생태계를 가진다고 하니 산의 구비 구비 돌아 오를 때마다 다른 풍경을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산정이다. 하느님 창조의 선물을 찬양하는 한 무리의 청소년들을 만난다. 한쪽엔 아직도 녹지 않은 만년설이 가슴속까지 시원한 바람을 불어들게 한다. 목도리를 두르고 한바퀴 둘러보기 위한 걸음을 서두른다. 한눈에 들어오는 자연의 신비 속에서 이곳이 어떻게 "America the Beautiful"란 노래의 배경이 되었는지를 배운다.
  노랫말처럼, 티없이 맑고, 넓고,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의 아름다움. 산아래 아득히 보이는 평야에서 추수를 준비하는 곡식의 물결들은 황금빛으로 반사되고, 산은 보랏빛의 장엄함으로 농익은 광야 위에 우뚝 서있다. 아들의 쉬지 않는 셔터 누르는 소리와 조카의 디카 만드는 손빠른 동작이 없었더라면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신 그 신비 앞에 속절없이 서 있었을 것이다.
  '하늘가는 길'을 뒤로하고 돌아온다. 두고 온 고향바다 보다 더 깊은 구름바다 속에 잠긴다. 작은 것이 되는 행복은 바로 눈앞에 있었음을. 좀더 계절이 깊어지면 일탈을 꿈꾸는 여인이 되어 또 다시 새로운 곳을 찾아보련다. 산들은 황금 옷자락을 찰랑거리며 푸른 하늘에 제 그림자를 비출 수도 있을 것이고 한때는 풍요로웠을 푸른 잎을 떨어내며 온몸으로 다음 것을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안에 나도 함께 한다.

  
(한국일보 목요칼럼, 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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