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라는 잡초

2004.09.27 00:24

김혜령 조회 수:90 추천:5

  일상은 먼지와 같고 잡초와 같은 것이다. 돌아서면 쌓이고 솟아 나온다.
  부족한 생필품 사기를 미루고 미루다가, 단칼에 베고 말리라, 날 잡아 한 차례 시장과 백화점을 돌며 찬거리와 일상용품을 사재기하듯 사다 놓아도, 무언가 빠진 것이 있고, 그 빠진 것을 보충하리라 생각하다보면 어느 새 생활에 결핍된 것이 하나 둘 늘어난다. 또 한 차례 날 잡아 물질적인 결핍을 채워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물건 사는 일 뿐이 아니다. 때로는 정성껏 때로는 얼렁뚱땅 차려 먹었다고 생각하고 나면, 설거지를 하고 돌아서는 다음 순간 다음 끼니가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한끼 외식으로 때우고 말리라, 생각해도 돌아서는 순간 다음 끼니는 어김없이 찾아온다. 방방에 흩어진 빨랫감을 추려 세탁기에 넣고 건조기에 옮기고...... 바구니에 담겨 이리저리 뒹굴던 빨래들을 개켜 마침내 옷장에 챙겨 넣었다고 생각하고 돌아설 때쯤이면 집안 어디에는 한 무더기 빨래가 쌓여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닦아 내야 할 먼지도 쌓이고, 할 일이 생겨난다. 고지서가 쌓이고, 누군가에게 편지나 선물을 보내야 할 일이 눈에 보인다.
  명절 때라 필요한 물건이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뒤치다꺼리를 끝내고 한숨을 쉴라치면, 누군가 아이를 낳거나 결혼을 하거나 졸업을 하거나 생일을 맞는다. 그리고는 또 다른 이런 저런 명절과 사회적 동물로서의 의무가 샘솟듯 생겨난다.
  이 일만 끝내고, 이 성가신 것만 후딱 치우고 나면...... 그런 조바심으로 하루하루가 간다. 크고 작은 일상의 물결들은 끊임없이 몰려들고 그 물결의 뒤에 무언가 참된 것, 가치 있는 것, 나의 것이 있으리라는 기대마저도 어느 새 일상적인 환상이 되어버린다. 환상은 늘 일상의 물결 뒤에 숨어 있다.

꿈이 잦아드는 아침 한 모퉁이
쓰윽, 출근카드를 그어
나와 나를 가른다
철컥, 철문이 열리는 순간
종알종알 따라오던 어린 나
서운한 시선이 말끄러미
등에 업힌다 괜히
눈이 부시다 온종일
옛집 툇마루
적막한 거울에 아이는
시간을 빠뜨리고 햇살을 문지르며
거울아 거울아 물을 것이다
네 속엔, 네 속엔
누가 사니?
거울 속에 수 없이 열리는 문을
하나씩 닫으며 나는
아이의 미래를 살러간다,
지워간다 괜히
눈을 비비며 온종일
시간 재는 매쓰실린더에
거울 조각 빠뜨리고 가슴을 찔리며
물을 것이다 시간아
시간아 네 속엔
네 속엔
누가 사니? 사니?

문 나서면 노을무더기 화단
속에서 일어서는 가는 물줄기
아이의 얼굴이 자꾸만 멀고 희미하다

-일상적 환상(3) 전문

  나의 의식은 잡초와 화초를 구분하듯 일상과 일상 너머의 다른 무엇, 어쩌면 환상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무엇을 구분해 왔다. 그 다른 무엇, 그 환상이란 무엇이었을까. 무언가 고결하고 순결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참, 그 자체인 것. 내가 늘 나 자신을 내던지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 또는 그런 듯이 착각하고 있는 문학이었거나, 적어도 문학과 관련된, 문학에 참된 거름이 될 수 있다고 내가 믿는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또 인간의 혼을 어루만지는 예술이었고, 책이었고, 사색이었고, 쓰는 일이었고, 그런 가치를 믿는 나의 내면을 위로하는 무엇이었다. 일상의 쳇바퀴를 넘어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 기운을 충전시키기 위해 먼 곳을 여행하는 따위의 일들.
  그러나 그런 일들을 실제로 내가 행하고 있는 과정에 얼마나 내가 그 '숭고한' 가치를 경험했는지는 모르겠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곳을 찾아 여행하기 위해서도 어김없이 '구질구질한' 준비와 일상이 따르기 마련이었으니까. 여행가방에는 어쩔 수 없이 많거나 적은 일상 용품들을 챙겨 넣어야 하듯이, 일상은 도망치려는 사람에게도 찰거머리처럼 붙어 따라오고야 마는 것이다. 여행 일정을 정하고, 짐을 싸고, 가까스로 시간을 맞추어 비행기표와 차편을 마련하고, 호텔을 예약하고 그 장소에 가기까지는 크고 작은 불편과 갈등과 시비를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다. 전람회나 음악회에 가기 위해서도, 책 한 권을 사 읽기 위해서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일상이 따라 간다. 내가 일상 너머에 그리는 '다른 무엇'이라는 환상은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구질구질한 일상'과 범벅이 되어 있는 것이다.
  지난봄에 나는 오랜만에 화원에 가서 꽃을 사왔다. 십 오 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처음 맞은 봄이었던 만치, 그 동안 미루어 두었던 일들을 맘껏 하고 싶었고, 검은흙을 뚫고 새싹을 내미는 꽃을 찾아 심는 일만큼 그 기분에 합당한 일도 없어 보였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코를 킁킁거려 흙 냄새를 맡고 이슬비도 마다 않고 몸을 적시며 오종종한 꽃들을 잔뜩 심어 놓았다. 시도 때도 없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화단을 돌아보며 꽃들의 안녕을 살피고, 그들의 화려한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그 화단에 한차례 비가 지나간 뒤 잡초가 불쑥불쑥 솟아났다. 잡초는 금방 자라나 내가 심은 꽃보다 키가 대여섯 배는 되고 이파리도 커서 꽃에 그늘을 드리우기까지 하였다. 차일피일 뽑기를 미루다가 드디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보니, 이놈 봐라, 노오란 꽃을 피우기까지 하였다. 민들레였다. 그런데 민들레에 대한 시는 또 좀 많은가. 그 끈질긴 생명력을 찬양하고 비유로 사용한 문학작품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오래 전 불어 공부를 할 때 쓰던 Larousse라는 사전에도 누군가 민들레 꽃씨를 불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모든 바람에게 씨앗을 뿌린다'. 모두에게 지식을 나누어주리라는 그 말에 그 시절 나는 얼마나 감격스런 눈으로 그림 속의 민들레 씨앗을 바라보았던가.
  뽑으려고 내뻗던 손이 문득 멈추어졌다. 왜 이 꽃은 뽑혀야 하고 저 꽃은 키워져야 하는가. 왜 이 생명은 죽어야 하고 저 생명은 살아야 하는가. 잡초와 화초의 구별은 무엇이란 말인가. 화원에서 돈주고 사오면 화초이고, 제 스스로 날아와 뿌리를 내리면 잡초인가. 실상 내가 사다 심은 꽃들도 풀꽃이었다. 조금 더 줄기와 잎이 가녀리고 꽃송이가 크다 뿐 어찌 보면 민들레와 별로 다를 것도 없어 보였다. 나는 화원에서 꽃을 고를 때, 화분에 붙은 명함 만한 사진을 보고, 꽃이 만발한 들판을 내 작은 화단에 우겨 넣겠다는 욕심을 키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 멋진 들판에는 '잡초'가 없었을까.
  잡초는 흙이 있는 곳 어디에나 있다. 잡초가 자라지 못하는 곳이라면 생명도 없다. 잡초는 종종 콘크리트 틈새를 뚫고 솟기도 하지만 그 만큼의 틈새도 없는 곳이라면 생명도 없다. 마찬가지로 일상이 없는 곳에는 생명이 없다. 그리고 생명이 없는 곳이라면 어찌 환상이 있고 문학이며 예술이 있을 수 있겠는가. 먼지처럼, 잡초처럼 끊임없이 쌓이고 솟아나는 일상. 어차피 공존해야 할 것들이라면, 사랑하고 아껴 키우며 환상과 함께 품고 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이제 일상은 민들레꽃이고, 마르지 않는 샘이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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