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의 바다
2004.08.02 17:33
안개 속의 바다
홍인숙(Grace)
안개 서린 바다를 걸었다.
태양을 잃은 바다는 계절 없이 파도 타는 사람들로
물결마다 흰 거품을 요란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물개들은 잠잠히 흐린 날의 오수를 즐기고
바닷새들은 관광객이 던져준 감자튀김을
날카로운 부리로 바삐 쪼아대고 있었다.
"우린 지금 갈매기와 함께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거야.
많은 바다를 구경했어도 싼타쿠르즈 바다처럼 아름답고
사람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 주는 곳은 못 봤어.
이 바다에서 詩를 쓰며 여생을 보내고 싶은데
내가 정리하고 이곳으로 오면 자주 찾아줄 거지?"
고국 老詩人의 음성을 바다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갑자기 바람이 큰 소리로 파도를 몰고 왔다.
파도 타던 사람들이 일제히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가 솟구쳐 올랐다.
코끝을 스치는 짙은 해초 냄새에 현기증이 났다.
바다를 뒤로하고 터덜터덜 돌아오는 발걸음에
후드득! 서글픔이 떨어져 내렸다.
아버지의 여든 세 번째 생신 날.
이 멀리까지 와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난 괜찮으니 조금도 염려 말고,
건강이란 한번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임을 명심하고,
아무리 바빠도 꼭 챙겨 먹고 일하도록 하거라."
아침 전화선을 타고 온 아버지의 음성이 자꾸 가슴에 감겨든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싸늘한 바람이 스쳐간다
한참을 걷다 뒤돌아 본 바다는
어느새 안개 속으로 떠내려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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