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팍스여사가 남긴 말

2005.11.22 04:47

정찬열 조회 수:228 추천:6



                                            
   퐁당, 아이가 호수에 돌맹이 하나를 던지면 물결이 퍼져나가 건너편에서 나물을 씻는 누나의 손등을 간지러 준다. 신념에 찬 말 한 마디는 멀리 멀리 파문을 일으켜 때론 사회를 변혁시키고 역사를 바꾸어 놓는다.  
  지난 10월, 이곳 미국 연방 국회의사당 중앙홀에 한 여성의 유해가 안치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대통령이나 장군, 국회의원 같은 사람이 아닌 평범한 시민, 더구나 여성이 국회에 안치된 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일이다.
   '로자 팍스' 여사. 1955년 12월 1일, 엘라바마주 몽고메리에서 일어난 자리 양보 거절사건의 주인공. 퇴근길에 탄 버스에서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라는 운전기사의 요구에 "No, Sir (안 되요)!"라고 단호히 거절했던, 그리하여 결국 미국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게 한, 바로 그 흑인 여성이다.
  그녀는 1913년 엘라바마 주의 한 시골에서 목수의 딸로 태어났으며, 생활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스물 한 살에 졸업했다. 운명의 그 날도 근처 백화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는 마흔 두 살의 평범한 흑인 아줌마였다.  
  그 당시 남부의 여러 주들은 '짐 크로우 법'으로 엄격한 흑백분리를 실시했다. 기차나 버스, 학교와 식당,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흑인과 백인 전용을 구분하여 흑인들에게 굴욕적인 차별을 강요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흑인들은 이 제도에 말없이 굴종했고 연방 대법원마저 '평등과 분리는 위헌이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려놓고 있었다.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팍스는 즉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그러나 이는 인권운동의 서곡이 되었다. 흑인들이 힘을 모아 대대적인 버스 보이콧 운동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은, 그녀와 같은 고장에 살고 있었던, 당시 26세의 젊은 목사 마틴 루터 킹 이였다.  
  수많은 흑인들이 고통을 참으며 몇 시간씩 걸어서 출퇴근을 하고 장을 보러 다녔다. 오랫동안 수모를 받아왔던 흑인 수 만 명이 이 걷기 운동에 동참했다. 18개의 흑인소유 택시회사들은 버스요금만 받고 택시를 타게 했다. 이 운동은 381일 동안 계속되었다.
  미 전국은 숨을 죽이고 이 저항운동을 지켜보았고, 드디어 연방대법원은 '흑백인 분리승차법'을 위헌으로 판결하여 흑인들의 굴레 하나를 벗겨주었다. 인종차별 철폐를 위주로 한 민권운동은 킹 목사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더욱 세차게 타올라 1963년, 마침내 민권법안이 통과되었다. 내 권리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한 평범한 흑인 여성의 용기 있는 행동이 미국에서 적어도 '법적으로'는 인종차별이 없어지게 된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여러 이민자들이 인종차별 없이 지낼 수 있게 된 것은 흑인들이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피와 땀으로 쟁취한 인권운동의 덕택이다. 그들이 힘들여 닦아놓은 길을 많은 사람들이 편히 걷고 있다.
  사회를 개혁하고 역사를 바꾸는 것은 대단한 지위에 있는 사람만이 하는 일이 아님을 팍스여사는 보여주고 있다. 농부가 삽으로 작은 물꼬 하나를 터 놓음으로써 넓은 논에 물이 가득 차게되는 것처럼, 작은 말 한마디 의미 있는 몸짓 하나가 가정과 사회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때로는 세상을 바꾼다.
  홀대받으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No Sir !" 한 마디로 사람들의 가슴을 통째로 흔들어 미국 사회를 바꾸어 놓은 흑인 여인, 고단한 삶을 마치고 국회의사당 홀에 누워있는 팍스여사를 뉴스를 통해 보았다. 찾아온 조객은 물론 세상 사람들을 향해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싶었다.  
    "정의는 끝내 이기고 맙니다. 여러분, 용기를 가지십시오."
           <2005년 11월 23일 광주매일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