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영'이 아니고, 미스터 '정'이야

2005.03.29 02:25

정찬열 조회 수:491 추천:2


                                            
  "챈 영, 챈 영".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다. 챈 영?. 아무도 나서지 않아 혹시 날 호명하는가 싶어 창구로 가서 물어보았더니 과연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미국에 처음 와 운전면허를 받을 때 일이다. 집 근처 DMV(자동차국)에 가서 운전 실기시험 날짜 배정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과 함께 기다리던 중이었다.
   서툰 영어로 내 이름을 왜 그렇게 부르냐고 물었더니 'CHAN'이 '챈'으로 'JUNG'은 '영'으로 발음된다는 것이었다. 'SAN JOSE'라는 지명을 '센오(호)세'라고 부르는 것처럼 'JUNG'을 '영'으로도 부른다고 했다. '정에서 영으로' 성이 바뀌어 진 운명(?)의 순간이었다. 이곳 관습에 따라 '미들 네임'인 'YUL'을 생략하고 퍼스트네임인 'CHAN'과 라스트네임인 'JUNG'만 부르게 된다고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오랫동안 써 오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대신 '챈영'이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불리워지기 시작했다.
  정에서 영으로 성이 달라지게 된 것은 순전히 이민서류를 대행했던 여직원 때문이었다. 당시엔 한글의 영문기록 표준이 없었던지 '정'을 CHUNG, CHEONG, JUNG 등, 엿장수 마음대로 정해버렸던 것이다.    
  나만이 아니다. 미국에 온 많은 한인들이 이름 때문에 황당한 경험을 한다. 이우O라는 학생은 '우'라는 한국이름이 놀림 당하기 쉽다며 '우(WOO^^ 야유)리'라는 이름의 표기를 바꾸라는 권유를 받았다. 개인회사에 근무하는 방호O씨를 찾는 전화를 받은 동료는 "'호빵'?, 호빵씨 계세요" 한단다. 우리와는 이름 체계가 다르고 발음이 달라 일어나는 일이다.
  김영희, 김영숙, 김영철, 김영호 등, 영으로 시작하는 이름은 모두 영킴으로 부르게된다. LA 인근만 백만을 넘을 만큼 한국인이 늘다 보니 같은 이름이 많아졌다. 이름이 어색하게 불려지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동명이인이 많아짐에 따라 때론 금전적 시간적으로 엉뚱한 피해를 보기도 한다.
지난 달, 필자가 융자를 신청하려고 신용기록을 떼어 보았더니 은행에서 돈을 빌린 후 갚지 않았다는 기록이 올라와 있었다. 알아보았더니 아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어떤 사람의 기록이 우리에게 잘 못 올라온 것이다. 각종 증빙서류를 보내서 해결은 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름 때문에 일어나는 이런 불편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애초에 한국에서 여권을 만들 때 이름을 붙혀쓰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붙혀 쓰더라도 첫 글자만 대문자로 써야한다. 대문자를 두 개 쓰게되면 하나는 미들 네임으로 인식해 이니셜로 취급되기 쉽기 때문이다. 하이픈(-)도 필요 없다. 이름 붙혀쓰기는 개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첫걸음이 되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한민족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기도 하지 않을까.      
  처음 미국에 와서 한국 아이들이 데니얼 크리스틴 같은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보며,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한국식 이름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내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딸아이를 수지, 그리고 아들은 샘 이라고 이름지었는데, 한국이름의 뜻과 미국식 발음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이름을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살다보니 이름짓는 일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라는 쪽으로 이해가 되었다.  
  미국에 살면 현지인들과 접촉을 하면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자연히 부르기 편하고 기억하기 쉬운 영어이름을 갖게될 필요를 느끼게된다. 필자는 성당에 다니면서 얻게된 세례명 시몬(SIMON)을 영어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도 처음 만나는 많은 미국인들은 나를 '챈 영', 혹은 '사이몬 영'이라고 부른다. 히스패닉이나 그쪽 발음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그렇게 발음한다. 그때마다 나는 '미스터 영이 아니고 미스터 정'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면 그들은 '오우, 낫 미스터 영, 벗 미스터 정' 이라며 웃는다. 내 땅에서 우리  말을 쓰며 자유롭게 산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가를 이렇게 나와 살면서 비로소 깨닫고 있다.
   <2005년 3월 30일 광주매일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