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든그로브에서 캐나다 록키까지(1)

2006.08.30 11:30

정찬열 조회 수:506 추천:6

  ** 전에 사이트에 올려놓았던 글입니다. 글의 후반부가 실리지 않은것을 최근에 발견하고 (1)과 (2)로 구분하여 실어놓았습니다. (2)가 실리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전에 이 글을 보셨던 분은 바로 (2)로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 참석인원(세 가족 13명)
   김훈,예란 가족-데니(13살), 데니친구 네이튼(13살)
   이동인, 미림 가족- 수진(14살), 상훈(11살), 수현(8살)
   정찬열, 영희 가족- 수지(14살), 승(11살)
* 이용차량-34피트 짜리 R.V를 빌려서 사용함
* 여행코스
  가든그로브 출발-  Port Land - Port Angeles -Canada Victoria Island-Vancouvr -       Jasper- Maligne Lake- Medicine Lake -Jasper Tram Car- Ice Field - Lake Louice -    Banff- Pasco City- Port Land -Red Wood- Sanfrancisco City-  Garden Grove 도착

  *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여행은 떠남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여행을 비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바캉스라는 말의 어원도 여기서 비롯된 말이라고 하니, 집을 비우고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는 의미에서 떠남도 비움도 모두가 맞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이 여행기는 세 가족 12명이 함께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이다.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가든그로브에서 캐나다 록키를 다녀오는 10박 10일간의 이야기를 한데 묶어놓은 것이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있는 3가족이 한데 어울려 한 대의 R.V를 이용하여 4000여 마일에 걸친 긴 여행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정리해 놓은 기록이다.
  처음 이 여행기를 계획하면서 세계적으로 이미 유명해진 관광지를 다녀와서 새삼스럽게 그것을 이야기로 엮을 필요가 있을까 망설임이 없지도 않았다. 나를 망설이게 한 더 큰 이유는 ‘ 아는 것만큼 보인다 ’는 한 구절이 나에게 주는 압박감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얄팍한 밑천을 송두리째 내 보여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애당초 계획한 대로 이야기를 쓰기로 하였다. 이번 여행이 안내자를 따라 단순하게 그들이 보여준 곳만을 보고 돌아오는 관광이 아니고, 모든 것을 우리가 계획하고 준비하여 우리들의 방법으로 우리의 길을 따라 여행을 다녀온 우리들 자신의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차츰 희미해져갈 우리들의 이야기를 훗날  소중한 추억이 될 수 있도록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지금 우리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해 주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굳혀 이 여행기를 쓰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여행기는 기본적으로 우리들 세 식구 13명이 여행을 하고 돌아온 이야기이다. 그러나 비슷한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을 밝혀 두고자 한다.  R.V여행을 생각하시는 분,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고자 하는 분, 우리가 다녀온 코스를 관광하고자 하는 분, 그리고 특별한 여행을 꿈꾸시는 많은 분들에게 이 여행기가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 어디로,  누구와 함께 갈 것인가

  여행을 계획한다면 먼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언제 누구와 함께 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캐나다 록키를 이번 여행의 목적지로 정하게
것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옐로우스톤을 거쳐 록키산을 몇 가족과 함
께 여행을 다녀오면서 미국 록키산의 아름다움에 반한 적이 있는데, 케나다 록키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궁금하여 서로 비교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발동 했었다. 그리고
캐나다를 다녀온 사람들이 그쪽 자연의 아름다움을 하도 칭송하곤 하여 아이들이
커 버리기 전에 가족과 함께 다녀와야 겠구다는 생각을 해 보았던 것이다.    
  언제 가는가 하는 문제는 아이들의 방학기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서 자연스럽게
정해진 것이지만, 누구와 함께 가는가 하는 문제는 쉽게 결정할 수가 없는 사항이
었다. 어른들끼리의 여행이라면, 그리고 하루나 이틀 정도의 짧은 여행이라면 누구
와 함께라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열흘 동안을 한 대의 차 속에서 먹고 자면서 생
활을 해야하는 상황이라서 아무래도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른들만의 여
행이 아니라 아이들을 포함한, 아니 아이들이 중심이 되는 온 가족을 위한 여행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모처럼의 여행이 가족간
의 친목은 물론, 아이들에게도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의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
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여행의 중요한 목적의 하나가 된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함께 가기로 정한 가족이, 우리 집 아이들과 또래의 친구들이 있는
이동인씨네집, 그리고 김훈씨네, 이렇게 세 가족으로 정하게 되었다.  김훈씨네는
올해 열 여섯살난 큰아들 제임스가  따라가기 싫다고 하여 둘째아들 데니 만 데리
고 가기로 하였다.  데니 또한 엄마 아빠를 위하여 올해까지만 따라가 주겠다면서
자기 친구를 한명 함께 가도록 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어서 녀석의 친구인 데이몬
을 꾸어다(?) 함께 가도록 하였다.
  조금만 머리가 커지면 이렇게 아이들은 부모 곁을 떠날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품속에 넣어 두고 싶어 하는 부모의 심정은 아랑곳없이 벌써부터 차근차근 헤어질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들은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곁에 있을 때 그들과 함께 하는 추억거리를 만들고 싶어지는 것
이다.  추억 하나를 만들어 내 가슴속에 담아두고, 추억 하나를 만들어 자식들의 기
억속에 넣어두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먼 훗날 서로가 그리워 질 때 그 추억들을
꺼내어, 장롱에 감추어 두었던 곳감을 빼내 먹듯 그렇게 야금야금 추억을 꺼내어
되새기고 싶고, 그리고 자식들에게 잊혀지지 않은 부모로 남고 싶은 것이다.  그 추
억 하나를 통하여......  
  이번에도 R.V(Recreation Vehicle)를 이용한 여행을 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라는 표현을 한 것은 2년 전에도 R.V를 이용하여 옐로우 스톤을 10박 11일 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음을 미리 밝혀드리고자 하는 의도에서이다.    
지난번에는 29피트 짜리 R.V를 이용했었는데 이번엔 약간 더 큰 34피트짜리를 빌리기로 했다. 아무래도 세 식구가 여행하기에는 그때보다는 더 큰 차량을 이용해야지 않겠느냐고 김훈씨가 의견을 제시하여 그렇게 하도록 결정된 것이다. 렌트용 차량가운데서는 제일 큰 것을 빌려 사용하게 된 셈이다.  

* R.V 여행에 관하여

   한국인들은 아직까진  R.V를 이용하여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 같아 이에 대한 몇 가지 안내를 해 드리고자 한다.  2년 전 R.V를 이용하여 여행을 다녀왔었고 다시 이번에 같은 방법으로 여행을 다녀온, 두 번의 경험을 통하여 느낀 점을 함께 나누어 봄으로써 여행을 계획하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이다.
   R.V여행은 우선 편리하다.  차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있다. 잠자리는 물론 주방시설 냉장고 화장실 설비까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어서 먹고 자고 T.V를 본다 던가 뒹굴며 노는 모든 일을 차안에서 해결할 수가 있다.  이를테면 작은 집 한 채가 그대로 굴러가는 셈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다.  먹고싶은 음식을 마음대로 요리해 먹으며 여행을 할 수 있어서 독특한 음식을 즐기는 우리 한국인의 경우엔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한 여행방법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는 어딜 가나  R.V를 파킹할 수 있는 설비가 완비되어 있어서 가고프면 가고, 쉬고프면 쉬면서 일정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어서 좋다. 낚시터가 나오면 차를 세워 낚시를 하고, 경치가 좋으면 그곳에 차를 멈추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여럿이 운전을 교대로 할 수가 있어서, 무리하지 않고 여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의 하나이다.
   여행하는 동안 일행이 완전히 한 가족이 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좋은 점이다. 많은 사람이 차 속에서 함께 먹고 자고 뒹굴며 생활하기 때문에 여행하는 동안에 완전히 한 가족이 된다. 여행을 하는 동안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고 사람과 사람도 서서히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한솥밥을 먹고 한 지붕 밑에서 지낸다는 것이 사람사이의 경계를 허물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R.V를 렌트하는 경우엔 차의 크기와 사용기간에 따라 요금도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물론 렌트회사에 따라 약간의 비용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빌리는 조건도 각 회사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게 마련이므로 몇 군데 샤핑을 해보는 것이 좋다.  보험도 렌트하는 비용에 포함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빌리는 사람의 보험으로 커버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으니 먼저 알아보는 게 좋다.  
  나도 똑같은 걱정을 했지만,  R.V 여행을 다녀온 다음 내가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부분이 운전에 관한 물음이었다. 그 집채만큼 큰 차를 운전하는데 힘들지 않던가, 혹은 일반 승용차 면허증으로도 운전이 가능 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운전면허는 일반 승용차 면허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어서 문제가 없으며, 운전하는 것도 처음 시작할 때가 약간 부담스러울 뿐이지 조금만 익숙해지면 보통 차와 다름없이 운전을 할 수 있으니 그 부분도 걱정 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여자들은 무리가 될 터이니 운전은 남자들의 몫이 되어야 할 것같다. 평소에 벤 차라도 좀 운전해 보신 분이라면 그만큼 더 수월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오물을 퍼내는 일이나 물을 싣는 일, 그리고 자동차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은 당연히 남자들의 몫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부인을 여왕으로 모시고 한번 여행을 다녀와 보시라. 남편은 아마 왕으로 들림을 받게 될 것이다.
경비문제가 약간 부담스럽지만 어차피 몇 사람이 함께 어울려서 여행을 하게 되므로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는 않다. 여행사를 따라 가는 경우라든가 기타 다른 방법을 비교해 보면 결코 비싼 여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번 여행에 사용했던 자세한 경비에 관한 내용은 이 여행기의 끝 부분에 자세히 기록하여 도움이 되도록 할 것이니 참고 하시기 바란다.  

  *경비와 시간은 어떻게 마련 하는가

경비문제가 나온 김에 몇 마디 언급하고 넘어가자.  사실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많은 분들이 경비와 시간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말대로 이 넓은 미국 땅에 살면서도 우리 이민 1세들은 한국보다 더 갇혀 지내고 있다. 돈에 갇히고, 시간에 갇히고, 자식에 갇히고, 직장이나 비즈니스에 갇히고, 무엇보다 탈출구가 없는 스스로의 의식에 갇혀있다.  
이 갇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여행은 가능해 진다.이 번에 함께 여행을 떠난 우리 세 식구도 전형적인 이민자 가정이다. 한 사람은 직장에 근무하며, 또 한사람은 페인트 비즈니스를 하고, 그리고 다른 한사람은 보험업에 종사하고 있다. 남들보다 월등하게 경제적으로 풍부하지도, 그렇다고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도 아니다. 모두들 매월 페이먼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가정이다. 다만 여행을 위해 평소에 조금씩 저축을 하고, 여행을 앞두고는 시간을 낼 수 있도록 미리 그만큼 더 열심히 일하고 일정을 조정하여 어렵게 짬을 만들어서 이렇게 떠나게 된 것 뿐이다.
  우선권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차이가 아닌가 싶다. 아이들이 있는 가정이면 그들이 다 커버리기 전에, 나이가 많으신 분은 더 늙기 전에, 각각의 형편에 따라 노력한다면 일년에 한 번 정도야 길건 짧건 어디론가 훌쩍 떠날 수 있지 않을까.

* 여행준비

  목적지가 정해지고, 그리고 함께 갈 가족이 확정되고 나서 곧바로 R.V를 예약을 했다. 미리 예약을 하면 그만큼 가격이 저렴할 뿐만 아니라 사용할 차의 종류도 원하는 것으로 고를 수가 있다. 차분하게 여러 군데 연락을 하여 가격과 조건을 샤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는 지난번의 경험으로 이미 그 정도는 환히 꽤 뚫고 있었던 것이다. 차를 렌트하는 문제는 주로 이동인씨가 수고를 하였는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34피트짜리 차를 예약했다.  
  여행을 앞둔 2개월 전에 세 집 식구들이 모여 여행을 위한 구체적인 토의를 하였다.  갔다가 돌아오는 전 코스에 대한 지도를 구입하는 것,  준비해야 할 물건들, 가지고 가야할 음식들, 수영복을 비롯한 준비해 가야할 옷가지들, 그리고 구급약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항들이 토의되었다.  그리고 여행코스에 들어있는 지역에 대한 특징이나 알아야 할 역사적 사회적 사실들도 미리 미리 공부를 해 두어야
할 부분이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서로가 분담하여 준비하기로 하였다.
  음식은 주로 여자들이 준비하기 마련이겠으나, 아이들 음식은 이동인씨네가 준비하기로 하고 어른들이 먹을 음식은 우리 집과 김훈씨네가 마련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지난번의 경험을 상기하여 떡을 상당분량 준비해 가기로 하였으며, 이것이야 당연히 떡 만드는 솜씨로 이름난 이동인씨네 차지가 되었다.  
  준비를 위한 모임도 세 집에서 번갈아 가며 하였으며, 이렇게 모여서 하나씩 점검해가며  서서히 여행을 맞이하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의 하나였다. 어릴 적, 운동회 날이나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그 때가 얼마나 즐거웠던가. 정작 그 날 보다도 오히려 가슴 조이며 하루하루 기다리던 날들이 어쩜 더욱 기억에 남은 추억이었을지도 모른다.  손꼽아 기다리던 그 날, 하필 비라도 왔었더라면 그때의 아쉬움은 길이길이 기억에 남을 터이고........
  이렇게 여행을 준비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하는 사이에 어느새 방학이 되었다. 마음 쓰는 곳이 있으면 그만큼 시간이 빠르게 지나기 마련인가 보다.  즐거운 시간들은 짧게 느껴지고, 힘든 세월들은 짧은 것도 왜 그리 또 길게 느껴지는지.    여행을 이틀 앞두고 온 가족이 다시 모여 마지막 점검을 하였다.  AAA에 가서 Trip Tik을 가지고 왔다. 멤버들에게 만들어 주는 자세한 지도는 여행자에게 참으로 소중한 길잡이가 된다. 단순한 길 안내를 넘어 여행지에 관한 다양한 상식까지도 함께 제공해 주고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된다.
  출발 일자를 원래 계획인 6월 20일 아침이 아닌 19일 저녁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R.V 렌트는 20일부터 시작이 되지만 실제로 차를 인도해오는 날은 하루 전날 오후인 5시에 가져올 수 있다고 하여 그렇게 계획을 바꾸게 된 것이다. 차가 있다면 하루저녁을 앞당겨 출발하는 것도 여러모로 시간을 버는 셈이 될 성싶었다. 그리고 밤에 출발하는 것이므로 각자의 생업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도 아니고, 잠이야 차에서 잘 수 있는 것이니 마다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잠을 자지 않고 운전을 해야 하는 게 조금 걱정이 되었으나 그것도 세 사람이 교대로 하면 될 터였다. 만장일치로 19일 밤 10시에 출발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10박 10일 이라는 다소 낯선 일정히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전날은 언제나 설렘으로 들뜬다.  막상 닥치면 덤덤하게 맞이하게 되는 당일 보
다는 기다림과 기대에 부푼 그 전날이 사람들에겐 더 의미 있게 기억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사 전날 전야제라는 걸 만들어 먹고 마시고 춤추며 즐기는걸까. 크리스마스보다는 크리스마스이브를 만끽하는 사람들, 그 이브에 명동의 거리를 가득 메우며 사람 물결이 사람에 떠밀려 파도치며 넘실거리던 광경을 기억해 보라. 그렇게 사람들은 전날 밤을 즐기며 전날을 그리워한다.
  국민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의 입학식을 돌이켜 보면 입학식날 보다는 그 전날 밤의 설레이던 순간이 오히려 기억에 생생하다. 장가가던 날을 돌이켜 보더라
도 장가들던 그 날 보다도 오히려 설레임으로 잠을 뒤척이던, 그 전날 밤이 차라리 더 아련하고 애틋한 추억으로 기억에 남지 않던가.  새 신부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첫날밤은 또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신혼살림은 또 얼마나 아기자기 할 것인가.  신랑이 그럴 진데 신부야 더 말하여 무엇하리.  
  그렇다. 여행 전날은 공연히 바빴다. 하는 일 없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아침 해가 바쁘게 뜨더니 서둘러 서산으로 훌쩍 넘어갔다.

       * 8월 19일(금) - 출발

  하루 일들을 끝내고 나서, 각자의 집에서 저녁을 챙겨먹고 저녁 8시에 김훈씨 댁
에서 만나기로 했다.  6시경 김훈씨 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동인씨하고 함께 렌트
회사에 가서 차를 인수하여 집에 가져다 놓았는데 너무나 차가 커서 운전하기가 힘이 들었다고 했다.  이동인씨도 운전을 할 수 있을럴지 은근히 걱정하는 성 싶다고 했다. 허기야 R.V를 운전해보지 않은 사람들이야 우선 집채만큼 큰 차를 대하면 겁이 날 만도 할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내색은 안했지만 나 역시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날은 마침 한국에서 오신 손님과의 식사약속이 있어서, 서둘렀지만 약간 늦게 집에 도착하였다.  아이들과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을 갈 때는 집에서 기르는 진돌이란놈 때문에  적지 않는 신경이 쓰이긴 하나 녀석에게 집을 맡기고 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두 번씩이나 되어 이번에도 그렇게 해 두고 다녀오기로 했다.  밥은 약간 큰 그릇에다가 열흘 동안을 먹을 만큼 담아두고, 물은 대야에 수돗물을 조금씩 똑똑 떨어지게 만들어 놓고 떠난다. 그러면 다녀올 동안 문제없이 집을 잘 지켜준다는 것을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와 달리 유달리 많은 밥을 그릇그릇 담아놓은 모습을 보면서, 녀석도 이미 주인이 장기간 외출할 것임을 눈치로 아는지 제법 비장한 표정을 지은다. 그리고 염려마시고 잘 다녀오라는 무언의 인사를 건네주곤 하는 것이다.  너무 많이 짖지 말고 우리가 없는 동안 집을 잘 지켜야한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도 이 녀석이 있어서 마음 놓고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하고 고맙기 이를데없다.
  진돌이를 챙겨주고 나서 곧바로 짐을 싣고 김훈씨네 집으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과연 집채만한 차가 버티고 서 있었다. 지난번에 사용했던 29피트짜리와 달라 34피트라서 그런지 상당히 더 커 보였다.  어떻게 운전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구조를 살펴보니 침대가 3개, 식탁과 개스레인지, 냉장고와 T.V, 그리고 화
장실과 옷장 등 모든 설비가 완비되어 있다. 접으면 의자가 되고 펴면 필요에 따라 침대 등 다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공간이 많아서 아이들이 소지품과 옷을 넣을 수 있도록 아이들마다 옷장을 정해 주었다. 맨 뒷자리 넓은 침대를 아이들 전용으로 정해 주엇다.  7명의 아이들이 그곳에서 열흘 동안을 함께 지나게 될 터였다. 남은 두 개의 침대를 어른 세 부부가 나누어 사용하기로 하였다. 잘 때는 매일 한 부부씩 교대로 밖에 나가 텐트를 치고 자기로 하였다.  
  짐을 모두 챙겨 넣고 물과 개스를 점검하고 나니 준비는 완료가 된 셈이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 기도를 올렸다.  마일리지  계기판을 보니 28,222마일이었다. 3만 마일도 채 사용하지 않은 새 차다. 처음 운전은 김훈씨가 자원했다. 두 시간마다 운전을 교대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운전자가 필요할 때 도와주기도 하고 말동무도 되어 주면서 졸림도 방지하는 등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운전자의 아내가 항상 그 옆자리에 같이 앉도록 규칙을 정 했다.  
  밤 10시 정각 출발함. 차는 서서히 Garden Grove Fwy를 진입하여 어두운 밤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다. 여행은 떠남이다. 길을 따라 어디론가 이렇게 떠나가는 것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 다시 길이 시작될 것이다.  산을 넘어 강을 따라, 길은 길로 연하여 구비돌아 이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우리가 떠났던 이곳으로 다시금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떠남을 위한 떠남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한 떠남이라 하지 않던가.
  차는 5 Fwy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이런저런 얘기꽃을 피우다가 어느새 한사람씩 조용해지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은 뒷자리에 모두 모여 자기들끼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들을 하고 있지만, 어른들은 하루 종일 각자의 일터에서 힘들게 일을 마치고 출발하는 것이어서 모두들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나 역시 한숨을 붙이고 싶은데 다음 운전을 내가 맡기로 한 터라 마음과는 달리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얼마쯤이나 지났을까. 차가 드르륵 드르륵 차선을 넘나드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12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어디쯤 왔는가 물어보니 Bakersfield를 금방 지나는 중이라고 했다. 두 시간마다 운전을 교대하기로 했으면서도 잠들어 있는 사람을 깨우기가 미안하여 졸리면서도 그냥 운전을 계속했나 보다.  길가에 보이는 주유소에 들어가 차를 세웠다. 개스도 넣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그리고 커피도 한잔 사왔다. 안전여행을 위하여 반드시 두 시간마다 교대하기로 다시 약속을 했다. 이제부터 내가 운전을 할 차례다.  규정대로 아내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운전대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이 큰 차를 무리 없이 몰고 갈 수가 있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가만히 보니 나보다도 옆에 앉아있는 아내가 더 걱정을 하는 눈치였다. 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십 여분 정도 속도를 내지 않고 천천히 운행해 가니 어느새 적응이 되었다. 바람이 불면 차가 커서 약간 쏠리는 감은 있었
으나 그 정도야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허긴 이 보다는 작지만 전에 한번 R.V 운전을 해 보았던 경험이 있지 않던가. 조금 지나자 이내 차 속이 조용해  졌다. 모두들 잠이 들었다.  옆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시중을 들어주던 아내도 어느새 잠이 들었나 보다. 사람도 세상도 모두 잠이 들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어둠 뿐.  캄캄한 세상을 혼자 깨어 달리고 있다. 그러나 밤길을 가다보면 친구도 있다. 커다란 화물차들이 밤길에 주로 만나는 친구들이다. 교통 혼잡을 피해 이렇게 밤길을 이용하지 않을까 생각이 되었다.
  밤길에 만나는 친구는 더 반갑다. 혼자서 달리다 뒤쫒아 온 불빛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다. 그러나 그도 잠깐, 친구는 어느새 나를 추월해 앞선다. 이제 앞차의 불빛을 따라 숨차게 달려가야 한다. 저 불빛을 놓치면 나는 어둠 속을 혼자서 헤쳐가야 한다. 그러다 앞차가 갑자기 다른 길로 빠져나가면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힘들지만 나는 내 길을 가야한다. 그러면 뒤에 오던 차들이 다시금 내 불빛을 따라 달려오고, 나는 어느 틈에 그들의 선봉장이 된다. 이렇게 밤길은 불빛으로 이어져 불빛을 따라 차와 차들이 함께 어울려 달려가게 된다.
  모두들 바쁜가 보다.  뒤를 따라오던 차들이 하나씩 둘씩 나를 추월하더니만 어느새 또 혼자가 된다. 혼자 가는 길이 오히려 편하다. 자동차 불빛만 환히 앞길을 밝힐 뿐, 세상은 온통 시커먼 어둠이다. 얼마를 갔을까. 저 멀리 외딴집 불빛 하나가 반짝인다. 이 밤 누군가 잠 못 이루고 뒤척이나 보다.  차가 달려가자 불빛이 점차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지척에 이르자 담뱃불처럼 한번 빨갛게 타 오르며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인생도 저렇게 순간에 지나는 것을.
  그렇다. 인생은 흐르는 물처럼 화살처럼 쏜살같이 지나간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바쁜지도 모를 만큼 그렇게 바쁘게들 산다. 그래서 모두 빨리빨리 살다가 빨리빨리 그렇게 가는가 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차분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다. 그러다 낭떠러지를 만나면 그냥 천길 아래로 곤두박질하고 만다.
  사람마다 벽을 쌓고 산다. 거기다 빗장까지 걸어 잠그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들어올 틈이 없다. 다른 사람은커녕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확인할 수가 없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남을 인정하는 기초가 될 것인데 그것이 없으니 열린 관계 열린 세상을 기대할 수가 없다. 내가 나와 사귀는 시간, 내가 나와 놀아줄 여유조차 없는데 어떻게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이웃의 어려움을 생각할 여유가 있겠는가.
  벽을 허물고, 마음의 빗장을 열어 재치고, 서로가 서로의 가슴속에 들어가 뜨겁게 얼싸안고 함께 살아가는 그러한 세상은 요원한 것일까. 서로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된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흐믓하지 않는가.  하이네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뺨에 뺨을 대고 울어보자 / 가슴에 가슴을 맞대고 불타보자 / 눈물이 불길에 떨어질 때 / 서로 꼭 껴안고 죽어 버리자.
  시간을 보니 어느새 세시가 다 되어간다.  모두들 깊이 잠들어 있다. 두 시간마다 교대를 해야 한다면 어느새 시간이 지난 셈이다. 잠든 사람을 깨우기가 미안도 했지만, 잠들어있는 열 한명의 생명이 나한테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정신이 더 또록해지고 있어서 아직은 교대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어디쯤 왔을까. 산 속에 마을이 있나보다. 숲 속에 박힌 불빛들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길가의 간판들이 눈에 띄는걸 보니 아마도 마을이 가까워 오는가 싶다. 아니나 다를까,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San Francisco로 들어가는 580번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도로 보수공사를 하는지 여기저기 길이 파헤쳐져 있다. 마을을 지나자 다시금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불빛 하나 밝히고 커다란 집 한 채를 몰고 간다고 생각하니 어렸을 때 일이 생각나서 혼자 웃었다. 어릴 적, 아주 어릴 적에 나는 저녁에 화장실에 가는 것을 몹시도 무서워했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이면 더 더욱 그랬다. 시골 화장실이란 게 본채와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었지만 그 시절의 시골 변소는 왜 그리도 깊고 으스스했던지. 뒷간에 살고 있다는 귀신은 왜 그리 많기도 했을까.
  어린 마음에 화장실과 방이 함께 붙어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꿈까지 꾼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시에 있는 친척집에 갔었는데 바로 그 댁에서 화장실과 방이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 그때의 그 놀람과 부러움이란...
   그리고 난 후 초등학교 무렵엔 우리 집을 통째로 싣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공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형태는 약간 달라도 지금 내가 집 한 채를 통째로 싣고 운전해가고 있었다. 어릴 적 꿈꾸던 것이 현실로 이루어진 셈이 아닌가.  
  어둠이 조금씩 엷어져 가고 있다. 새벽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바람처럼 파도처럼 그렇게 아는 듯 모르는 듯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여명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잠을 깨기 시작한다. 시간을 보니 다섯시가 가까워 오고 있다. 이제 그만 교대를 하자고 한다. 주유소가 보이면 쉬어가자고 했다.
  쉬지 않고 꼬박 네 시간 반을 달려왔다. 나에게 전무후무한 운전기록이 될 성싶다. 평소에 내가 아내에게 ‘옛날 시골에서 농사지을 땐 쌀 한 섬씩을 불끈불끈 짊어지고 다녔다’고 얘기하면 ‘당신이 그렇게 힘이 장사일 수가 있었겠느냐’고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내 아내는, 먼 후일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을 때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아, 이래 뵈도 내가 옛날엔 그 큰 차를 한 밤중에 네 시간 반이나 꼬박 논 스탑으로 운전했던 사람이여.....’
   주유소에 차를 세웠다. 밖에 나와 하늘을 보니 별이 총총하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하늘을 보지 못했나 보다. 머리맡에 별이 있음을 알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던가.
   이제부터 이동인씨가 운전을 할 차례다.  생후 처음 이렇게 큰 차를 운전하게 된다는 말을 하는걸 보니 약간은 긴장이 되는가 싶다. 약속한 대로 이동인씨 옆자리에 아내인 세레나 자매님이 앉았다.  이런저런 시중도 들어주고 말동무도 되어주면서 운전자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게 될 터였다.  누구나 처음엔 서툴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금방 적응이 되기 마련이다. 차가 점차 조용히 미끄러져가는걸 느끼면서 나도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 8월 20일 (토)- 둘 째날

   몇 시나 되었을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차의 흔들림이 멈추고 나서야 눈을 떴다. Shasta Lake 근처 휴게소에 차가 멈추어 있다.  시간을 보니 아침 8시30분. 계기판을 보니 28,822mile을 가리키고 있다. 밤사이에 꼬박 600마일을 달려 온 셈이다. 여기서 한 시간 정도면 오래곤 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원래의 계획대로 오늘 아침에 출발했을 경우를 가정해보고, 밤사이에 달려온 거리를 계산해 보니 실제로 하루를 절약하게 된 셈이 된다. 운전하는데 약간의 무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어제 저녁에 출발하길 잘 했다고 얘기들을 나누었다.
  밖에 나가 세수를 하고 아침 공기를 쐐니 머리가 한결 가볍다. 오솔길을 따라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길 아래로 호수가 펼쳐있고, 햇살이 소나무 가지사이를 뚫고 잔디밭 아침이슬 위에 멈춘다.  이슬방울이 빛난다.
  온 식구가 공원 벤치에 둘러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오징어무침이랑 무짱아치, 그리고 김을 싸서 간단히 먹었다. 모닝 커피 한잔이 일품이다. 그 동안에도 원목을 실은 대형 트럭이 몇 대 지나간다. 이 부근에서 원목이 생산되어 어디론가 운반 중인가 보다. 나무가 많은 지역에 와 있다는 실감이 났다. 밤사이에 세상이 바뀌었다.
  정신 장애자로 보이는 소년이 휴지를 줍기도 하고 쓰레기도 처리하면서 청소를
하고 있다.  제법 넓어 보이는 이 휴계소를 도맡아 소제를 하고 있는 성 싶다. 저렇게 장애인을 고용하여 일자리를 주고 보통인과 똑 같이 대접을 해주는 이 나라. 인간평등, 기회균등, 인권존중, 인간다운 삶, 이런 단어들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아울러 우리 한국 사람들의 장애자에 대한 편견과 무지가 함께 오버랩 되었다.
  다시 출발.  여기서부터 김훈씨가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옆자리는 당연히 케롤라인 자매님 차지다. 차는 내리막길을 천천히 내려가고 있다. 올라오면 내려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니던가. 오르막 길 보다 내리막길이 더 힘드는 것일까. 올라 올 때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느리다. 인생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세상만사가 오를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  올라 갈 때는 앞 뒤 구분하지 못하고 올라갔다가 내려 올 무렵이면 그제서야 무언가 생각하게 되고 조심조심 앞뒤를 재며 살아가게 되는 그런 모습까지도. 올라갈 때 / 보이지 않더니 / 내려올 때 / 보았네 / 그 꽃. 고은씨의 시가 생각난다.  
  “Welcome Oregon” 사인이 보인다.  아이 하나가 앞쪽으로 물건을 가지러 왔다가 콧노래를 부르며 자기 자리로 되돌아간다. 아이들이 저렇게 흥겨워 하는 모습 만으
로 부모들은 덩달아 행복하다. 기쁨이 없이 어찌 콧노래가 나올 수 있겠는가. 사랑과 노래는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독일 속담도 있지 않던가.  
  나무숲이 빽빽하다. 이 지방이 비가 많이 내리고 나무가 많다는 말만 들어왔었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과연 나무숲이 많다. 꼬불꼬불 돌아가는 길이 나무숲에 묻혀있다. 겨울 눈 쌓이는 날 이 길을 달리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이들이 뭘 좀 먹고 가자고 하여 마켓 앞에서 잠깐 쉬었다. 상점에 가서 이것저것 한참을 주워 담았는데도 모두 12불밖에 지불하지 않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이곳 Oregon에는 세금이 없다고 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되는 곳인가.
   산을 지나면 벌판이 나오기 마련.  완전한 농장지대이다. 평평한 들판이 끝없이 이어지고 벌판 이곳저곳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습이 보인다. 저런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나고 그 중심에 무언가 잡히게되면 여지없이 바람 따라 공중으로 솟아 올라갈 터이다. 운전을 하는데 차가 휘청거린다. 자연의 힘이란 이렇게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여 떡 생각이 났다.  흰떡을 기름에 튀겨서 하나씩 나누어 주었더니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들 좋아한다. 배가 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으니 누군들 좋아하지 않으랴. 사과를 한 개씩 나누어 주었더니 어떤 녀석이 사과를 먹으면서 하는 말, “사과가 스므스가 아니고 깡깡하다야”. 사근사근하게 달고 맛있지 않고 단단하다는 말이렸다.
   먼지가 바람에 휘날리는 벌판 한가운데 Gas Station이 있어 그리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개스도 넣고 점심도 먹기 위해서다.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워놓고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어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R.V여행은 이래서 재미있다. 아무데서나 차를 세우고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것을 R.V여행이 아니면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점심을 먹고 차까지 한잔하면서 여유를 부렸더니 어느새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  다시 이동인씨가 운전석에 앉았다. 한 시간쯤 올라갔을까.  Port Land가 나왔다. 시내 중심으로 강이 관통하고 있다.  도시가 매우 아름답다.  강이 있고 다리가 있고, 다리 아래로 사랑이 흐르니 아름답지 않을 도시가 또 어디 있겠는가. 강 위에서 요트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뾰쪽한 종탑이 해을녘 붉은 기운으로 더욱 신비로와 보이는 풍경이 이국의 정취를 한껏 자아내고 있다.
  이곳 Port Land에 김훈씨의 누나가 살고 있다고 하니 오는 길에 한번 들러 보자고 얘기를 하며 이곳을 지나쳤다.  강변을 따라 한참을 달렸건만 아직도 도시가 이
어지고 있다.  
   출퇴근 시간인가 보다. 차들이 소걸음이다. 해가 설핏하다. 어느새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다.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도시가 끝나는 곳 삼각지에서 운전을 김훈씨가 교대했다. 이렇게 대 식구가 움직일 때는 언제나 어두움이 내리기 전에 잠자리를 정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임을 알아야 한다. 허둥대다간 낭패를 당하기 때문이다.
  R.V 파킹장을 몇 군데 지나쳤다.  조금 더 가다가 잠자리를 정하는 것이 내일 일정을 위해 좋을 성 싶다는 판단에서였다. 내일 새벽에 Victoria Island에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는 오늘저녁에 가능한 Port Angeles가까운 곳에서 잠을 자기로 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 부근인데 어디를 가던지 부근에 R.V파킹장소가 없겠느냐는 생각도 이렇게 계획을 하게 한 이유가 되었다.
  지도를 보니 Shelton City부근이면 될 성싶어서 그곳에서 오늘밤을 지내기로 하였다. 이미 날은 어두워졌다. 잠 잘 곳은  보이지 않고,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Shelton 으로 들어가 지도를 보고 파킹장소를 찾았으나 쉽지가 않다. 길가 상점에 들어가 물어보면서 머무를 곳을 찾아보았으나 적당한 장소가 보이지 않는다. 여관 불빛이 보여서 그곳에 차를 멈추고 저녁밥을 지어 우선 시장기를 면해보려 했으나 그것도 여일치 못하다. 방 하나를 빌려 쓰면서 차를 파킹장에 세우고 하룻밤을 지내려 했었는데 여관 측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음 행선지로 옮기기로 하였으니 아이들에게 체면이 말이 아니다.  
  안사람들의 걱정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살다보면 일이 잘 풀릴 때가 있으나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는다. 살다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안다면 훨씬 마음이 편할텐데.
   어느새 밤 10시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Shelton을 벗어나 일단 101번 길을 따라서 내일아침 배를 탈 Port Angeles쪽으로 향했다. 가다가 좋은 장소가 나타나면 차를 멈추고 우선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한참을 가다가 불이 환히 켜져 있는 넓다란 장소를 발견하여 그곳으로 들어갔다.  돌아보니 배 타러가는 사람들을 위한  파킹장이다.  배를 가진 사람들이 이곳에다 차를 세워놓고 낚시를 가거나 배 타기를 즐기는 모양이다. 곳곳에 등이 환히 켜져 있어 대낮처럼 밝을 뿐 아니라 화장실이나 수도시설도 잘 되어있어서 우리가 하루 밤을 지내는데 불편함이 없을 성 싶었다.
  한쪽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서둘러 저녁밥을 준비하였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닌텐도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지난번 여행 때 보니 아이들이 지루해 하는 것 같아 이번에는 T.V를 가져오자고 계획했었다. 집에서도 많이 하는 게임 여행을 나와서까지 하도록 해야하는가 하는 생각에 지난번엔 일부러 T.V를 가져가지 않았었다. 대 자연을 즐기며 그 속에서 그들이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여행이 아니냐는 것은 너무 어른들 위주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지난번 여행에서 배운 것이다. 이번 여행에 아이들이 따라오는 것을 썩 달가와 하지 않았던것도 자기들의 세계보다는 어른들의 기준에만 맞추려 했던 것이 원인의 하나가 아니었나 싶어 이번엔 제법 신경을 썼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방법에 정답이 있겠는가마는 부모들이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도 그 옛날 서당 시절 아들을 훈장님께 부탁하면서 싸리나무 회초리 한 다발을 함께 전해 주었던 아버지의 자식 사랑법은 오늘의 우리가 되새겨 볼일이 아닐까.  차가 멈추어 있을 때마다 자기들끼리 순번을 정하여 게임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걸 보니 T.V를 가져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밥을 먹고 모두들 잠자리에 들면서 시간을 보니 밤 12시를 가리키고 있다. 캠핑장에서 재미있게 지내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을 터인데 첫날 저녁을 이렇게 불편하게 보내게되어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반드시 어두워지기 전에 잠자리를 정해야한다는 좋은 경험을 하게 된 셈이다.
   잠이 막 들려고 하는데 밖에서 누가 불빛을 비추는 성싶어 가만히 창문으로 내다보니 경찰차가 우리 차 주위를 돌며 이모저모 살펴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주민의 신고를 받았거나 순찰 중 왠 낯선 차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살피러 나왔나 싶었다. 한참을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기네들끼리 무어라 얘기를 나누더니 그냥 그대로 돌아간다.  죄 지은 건 없지만 공연히 경찰이 불러서 이런저런 해명을 하는 일이 벌어졌더라면 아이들 보기에 또 얼마나 민망스러웠을까 생각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여행 두 번째 밤이 깊어갔다.

   *8월 21일 (일) - 셋 째날

  부시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이동인씨가 가만히 일어나 움직일 채비를 하고 있다. 시간은 새벽 세시를 가리키고 있다. 오늘아침 Port Angeles에서  Victoria Island가는 첫 배를 타기 위해선 이렇게 새벽에 출발해야한다.  Ist Come, Ist Service 라고 하니 선창에 늦지 않게 도착해야만 한다. 만약 첫배를 놓치게 된다면 일정에 차질이 나기 때문이다.  
  이동인씨가 운전대에 오르자 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식구들은 모두 잠에 취해 조용하다. 밖은 어둠에 쌓여있다.  10여분을 갔을까.  R.V파킹장이 보였다. 어제저녁에 길을 따라 10분정도만 더 왔더라면 이곳에서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었다. 잠시 멈추어 오물을 퍼 버리고 차를 가볍게 했다.
  다시 출발하여 어둠을 헤쳐 나간다. 길이 좁다.  간간히 빗방울이 날려 차창에 부딪친다. 창문을 조금 열어보니 오른쪽으로 파도소리가 들린다. 해안 도로인가 싶다. 차가 흔들리고 사람도 흔들거리고 칠흙 같은 밤길을 파도소리와 함께 달려간다.
  한 시간쯤 갔을까. 도로 보수를 하는지 흙을 파헤쳐 놓았고, 일방로 표시를 해 놓았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내리막 좁은 길이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위태위태하게 기우뚱거리며 지나간다. 비가 내린 탓인지 길이 미끄럽다. 언덕길이라서 조금씩 차가 밀린다. 운전을 하는 이동인씨의 긴장된 모습이 역력하다. 가슴 졸이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남은 일행들이 잠들어 있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  무사히 그 길을 빠져 나오자 저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밤에 이런 산길을 큰 차로 움직인다는 일이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일담이지만 이동인씨가 이날 밤 운전이 제일 힘들었었노라고 실토를 했다.  
  자그마한 산골마을이 나타나자 길옆에 차를 세우고 내가 운전을 교대하였다. 길은 조금 넓어졌으나 지방도로라 그런지 자동차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허긴 이
밤중에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나들이를 할 까닭이 있겠는가.
  운전석에 앉아보니 어둠이 더 깊게 느껴온다.  온통 먹 방이다. 나무들이 들어찬 산길이니 그럴만도 했다.  자동차 불빛으로 어둠 속에 빛 길을 만들며 골짜기를 돌아 능선을 넘어 어둠을 헤쳐 나간다.
  밤이 깊어지고 난 후 날이 새던가. 날이 새기 시작하면 덩달아 밤도 엷어지던가. 아니면 밤이 채 깊어지기도 전에 새벽이 오던가. 눈을 뜨고 밤을 지켜보지 않은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 새벽을 맞아보지 않은 사람은 정답을 말하기 어려우리.
  새벽 5시 20분, Port Angeles에 도착하였다. 먼저 온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우리가 여섯 번째 이다. 선창에 나가보니 바닷바람이 시원하다.  배들이 부두에 정착해 있다. 잠시 세면을 하고 차 한잔 나누는 사이 파킹장에 차들이 빼꼭이 들어찼다. 아이들이랑 식구들이 모두 일어나 라면을 끓여 맛있게 아침을 해결했다.
  여기서 Victoria Island까지 건너 주는데 어린이가 $3.50, 어른이 $6.50, 그리고 자동차는 보통 승용차가 $28.50, 우리 같은 큰 차는 $ 50.을 운임으로 받고 있다.  
첫배는 출발시간이 8시란다.  출발시간이 가까워 오자 차를 한 대씩 배에 태우기 시작하였다. 잠깐 사이에, 마치 큰 고래가 입을 벌리고 자잘한 고기를 한꺼번에 마셔 버리듯 배는 그 많던 차를 한꺼번에 삼켜버렸다.
  드디어 출발하는 뱃고동 소리가 붕 부-ㅇ 울렸다. Victory Ferry호가 우리를 싣고 떠난다는 신호였다. 우리일행은 모두 갑판으로 올라갔다. 선창에는 배웅 나온 사람들이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이쪽에서도 누군가 똑 같이 손을 흔들어 답하고 있다. 허긴, 뭐니뭐니해도 이별이 서럽기로는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이 그중 제일 서럽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회자정리’, 만나고 헤어지는 건 세상 살아가는 이치일 수 밖에.
  바람이 차다. 간간히 빗방울이 뿌린다. 나는 차에가서 준비해온 가죽점퍼를 가져왔다. 한 여름에 무슨 가죽잠바를 준비해 가느냐고 하던 아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날씨의 변화에 대비해 옷을 충분히 준비하는게 여행의 기본이 아니던가.
  배의 내부는 작은 운동장만큼 넓었다. 아이들을 위한 각종 게임기구도 준비되어있다. 아이들은 배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였고, 어른들은 밖에 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얘기를 나누었다. 실제로 이곳은 바다라기보다는 만 이다. 태평양에서 들어와 미국의 Oregon State와 캐나다의 Victoris Island가 마주보이는 해협을 지나는 제법 넓은 만 이다. 그렇지만 끝이 없어 보이는 저 물을 바다라 하지않고 무엇이라 부르겠는가. 하늘엔 구름이 일렁이고 바다엔 파도가 출렁인다. 간간히 구름사이로 내려 비추는 아침햇살을 받고 파도가 붉게 끓는다.
  파도를 보니 정호승시인이 쓴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 어디 한 두 번이랴 / 이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 오늘 일을 잠시라도 /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와 같아서 /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  낮게낮게 밀물져야 한다 / 사랑하는 이여 /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 추운 겨울 다 지내고 /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쌀쌀한 날씨도 아랑곳없이 사람들은 바다와 친하고 싶은가 보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고 갑판에 나와 바다를 보고 있다. 통나무를 가득 실은 배 한 척이 우리 곁을 지나고 있다.  어디론가 나무를 싣고 가는가 보다. 우리가 사는 California에서 오렌지를 가득 실은 트럭을 많이 볼 수 있듯이 이곳에선 나무를 실어 나르는 트럭이나 배를 이렇게 볼 수가 있구나. 작은 배가 짐을 가득 실은 큰 배를 끌고가는 모습도 재미있다. 어느새 해협의 반 이상을 지났다.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미국의 국경을 넘어와 캐나다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Victoria Island가 가까워지고 있다. 2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멀리 바라보이는 도시 풍경이 동화책에 나오는 도시처럼 아기자기한 모습을 하고 있다.  바닷가에 서있는 등대와 뾰쪽하게 솟아있는 건물들, 그리고 아치형의 다리와 관광객을 싣고 시내를 오가는 마차들.  한편의 그림책을 보는 듯 하다.
  배에서 내리는데 여권을 보자고 한다. 국경을 건너왔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실감되는 순간이다. 날씨야 강하나 건너온 셈이니 특별히 다를 게 없다. 이곳의 여름기온이 대체로 화씨65-90도라고 하니 우리가 사는 California와 비슷한 셈이다.      
  Victoria 항구를 끼고 도는 모든 것들이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항구를 바라보며 서있는 Empress Hotel은 영국여왕이 와서 머물다 가는 곳이라고 한다. 세계의 선남선녀들이 저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기를 원할 만큼 유명한 장소라고 누군가 말해준다.  관광객을 위한 2층 버스가 시내를 운행하고 있다. 아이들이 한번 타보자고 한다. 낯선 모든 것이 관광자원이다.  
.  영국의 통치를 받았던 도시답게 영국식 건물이 눈에 많이 띈다. 바닷가 Empress Hotel 바로 길하나 건너서 국회의사당 건물이 장중한 모습을 하고 서 있다. 해가 지지 않았던 나라 영국의 숨결이 이 고풍스러운 건물 하나를 통하여 우리의 가슴으로  전해지고 있다.
  차를 세워두고 시내를 구경했다. 곳곳에 영국의 숨결이 스며있다. 역사는 우리에게 말없이 많은 것을 얘기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가 외국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라 치더라도, 만약 일본이 아닌 미국이나 영국의 지배를 36년간 받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지금쯤 훨씬 민주적이고 선진화된 모습을 하고있지 않을까. 미국의 지배를 받은 필립핀의 경우를 보면 결코 이런 가정이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일본이 그토록 혹독하게 한국을 지배한 것은 그들의 민족성에서 기인한 것일까. 아니면 일종의 문화적 자격지심 때문에 오히려 그런 억압적인 통치 방법을 고안하게 된 것일까. 서양의 합리주의와 실용주의를 우리의 역사가 일찍 접할 수 있었다면 역사의 방향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역사는 서서히 발전해 나간다.
  악기를 들고 앉아있는 관광안내인과 함께 사진을 찍은 다음 차에 올라 시내를 둘러보았다. 시간이 넉넉하면 안내서에 나와 있는 장소를 여기저기 구경하련만, 우선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The Butchart Gardens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계획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엉뚱한 차질이 온다는 것을 어제저녁에 혹독하게 경험했던 터라 서둘러 부쳐드 가든으로 향했다. 한 가지 일을 경험하지 않으면 한 가지 지혜가 자라지 않는다 하던가.
  몇 번을 헤멘 다음 어렵게  Butchart Gardens의 입구를 찾았다. 안내원이 입구까지 나와서 이리뛰고 저리뛰며 안내를 하고 있다.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12시부터 2시간동안 이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3시에 이곳을 출발하여 다음 목적지인 Vancouver행 배를 타야하기 때문이다. 주차장이 차종별로 잘 구획되어있다. 우리가 탄 R.V는 대형차만 주차하는 곳에 주차를 했다. 개인이 만든 정원이 이렇게 세계적인 관광지로 인정을 받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했다. 그리고 도대체 얼마나 크고 잘 가꾸어져 있기에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감탄을 하는지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매점에 가서 안내책자를 한 권 샀다. 이 정원은 시멘트 생산업자인 Robert Pim Buchart씨 부부가 만들었다고 한다. 시멘트 공장에 필요한 석회석과 점토를 파내버 린 다음의 황폐한 채석장, 그 황량한 벌판을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었다고 한다.  1904년 이곳에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였고, 사람들이 찾아와 보기를 원하자 기꺼히 허락하였다. 그리고 이 집을 이태리어로 환영이란 뜻을 가진 ‘벤베누토’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부쳐드씨 부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이 희망했던 대로 많은 사람들이 이 정원을 감상하게 되었으며, 매년 약 75만명의 관람객이 이곳을 다녀간다고 한다.
  우리는 줄을 따라 사람들에 밀려가며 천천히 정원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수 만 가지의 꽃들과 수 천 가지의 나무들, 그리고 이름 모를 들풀까지도 모두 조화를 이루어 심어져 있다. 색깔의 조화, 크고 작음의 조화, 그리고 지형에 따라 절묘하게 어울리는 섬세한 어울림에 이르기까지 정원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이다.
돌 하나도 제자리를 찾아 놓여있고, 표지판 하나도 품격을 잃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태리에서 주조되었다는 세 마리의 철갑상어상이 분수대에 설치되어 그 품위를 한껏 높혀 주고 있다. 그리고 아기자기하게 단장된 일본식 정원도 제법 볼거리가 많았다.
  이렇게 화려한 단장을 위해서 매년 수 만 그루의 구근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해 온다고 했다. 이태리에서 만들어진 청동제 멧돼지와 달팽이 분수,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한 쌍의 멋진 목마도 눈길을 끌었다. 지형지물을 이용한 오솔길이라던가 물웅덩이를 이용한 분수는 자연스러움 그대로였다.  분수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물을 뿜어내고 있다. 특수 조명장치를 해 두었기 때문에 밤이 되면 대단히 화려한 광경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철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한번 다녀간 사람도 다른 계절에 다시금 찾아오게 된다는 설명을 위안 삼기로 하고, 시간에 늦지 않도록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서둘러 달려왔지만 길을 잘못 들어 하마트면 배를 놓칠뻔 하였다.  Swartz Bay에서 Ferry호에 올랐다. 이 배도 규모가 적지 않아 한번에 차를 100대 이상 실어 나를 수 있다고 했다. 배삯은 사람과 배를 포함하여 $219을 지불하였다. 정각세시에 출발하였다. 이곳에서 목적지인 Vancouver Tsawwassen까지 1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한다.
배는 크고 안락했다. 아래 위층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사방이 유리로 되어있어 앉아서도 바다를 볼 수가 있다. 의자가 널직하게 충분히 배치되어있다. 마치 작은 극장에 온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부모들에게 용돈을 타 가고 있다. 하루에 5불씩의 용돈을 주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 정도 가지고는 부족한가 보다.
아이들을 올바로 기르는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아이들이 어릴때는 나무같이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고 자라서는 새같이 높게 나르게 하라’ 했지만 참으로 쉽지 않는 게 아이들 교육이다.
   4시 30분, 예정대로 정확히 Tsawwassen항구에 도착하였다. 이제부터 Mile이 아닌 Km로 표지판이 바뀌고 있다. Speed Limit 80Km 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속도제한이 시속 50Mile이라는 얘기다. 우리가 사는California와는 달리 길은 좁고 차량의 속도도 느리다. 오늘은 집사람의 친구 집에서 묵을 예정이다. 여기서 한 시간 반정도 걸린다고 했다.  고속도로와 지방 도로를 번갈아 달렸다.
  강줄기를 따라 길이 나 있다. 그 강 언덕을 따라 차를 달리는데 강물을 따라 뗏목을 옮기는 모습이 보인다. 아니, 강물을 이용하여 나무를 운반하다니! 갑자기 현대와 고대를 동시에 살아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옛날에 두만강이나 강원도 일원에서 나무를 베어내서 강물을 따라 운반했다는 바로 그 방법을 지금 여기에서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당시 강원도에서 벌채한 나무는 정선 아우라지에서 뗏목으로 매어져 장장 천리에 이르는 물길을 따라 한양으로 보내졌다. 이 나무는 떼를 타는 떼꾼들이 운반을 했었다. 급한 물굽이를 따라 위험한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자연히 두둑한 돈이 주어졌다. 오죽하면 ‘떼돈 벌었다’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그리고 이렇게 떼돈을 버는 남정네를 홀기려는 주막이 곳곳에 생겨났고,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그리는 ‘정선 아라리’라는 민요도 이러한 뗏목시대에 생겨난 노래라 한다. “오지마을을 찾아서”라는 책에 나오는 얘기다.  노래나 글도 어차피 그 시대의 인간 생활을 반영하는 시대적 산물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이러한 뗏목의 모습은 한국에서도 1960년대가 저물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요즈음은 1년에 한번 열리는 ‘정선 아우라지 축제’때만 겨우 한번씩 모습을 드러낼 뿐이라 한다. 그런데, 그 뗏목의 모습을 이곳 캐나다에서 볼 수 있게 될 줄이야. 허긴 사람들이 배에 올라 급류를 타고 내려오는 레프팅이라는 스포츠가 바로, 뗏목을 엮어 물굽이를 내려오던 그 떼꾼들의 모습을 그대로 본 딴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렇게 물길을 따라 날라온 나무를 다듬고 자르는 목제소가 강 줄기를 따라 심심찮게 눈에 띈다. 목제소 옆에는 톱밥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톱밥. 겨울이면 풀무질을 해 가며 톱밥으로 불을 때던 기억, 교실에서 난로를 피우던 기억, 그리고 그 난로 위에 점심 도시락을 구워먹던 추억은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으로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져 있으리라.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저렇게 톱밥이 쌓여있는 광경을 보면 그 추억 한 자락을 꺼내어 가만히 들여다보며 혼자서 웃음 지으리라.
  여섯시 반경에 친구네 집에 도착하였다. 친구네 집 앞에다 R.V를 세워놓았다.  친구의 이름은 영순인데 집사람의 고등학교시절 친구다.  아니나 다를까, 초인종을 울리자마자 “하이고 이 가시네야 니 오랜만이다, 오느라고 을매나 고생했냐아”. 뛰어나오며 반긴다. 허기야 고등학교 동창만큼 허물없는 사이가 또 있겠는가.
   오래지 않아 친구의 남편도 들어왔다. 마켙을 운영하는데 종업원에게 맡기고 그냥 들어왔다고 했다. 온 식구가 함께 식탁에 앉았다. 모처럼 먹은 것처럼 저녁을 먹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