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영, 이수복, 이시영, 이선관, 한하운

2005.12.21 06:45

김동찬 조회 수:492 추천:5

*** 51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 맺힌 열 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정완영 (1919 -    )   「조국」 전문

이 시는 1962년에 발표되고, 1969년에 출판된 <채춘보>란 시조시집에 실렸던 정완영 원로 시조 시인의 대표작이다.
작가의 증언에 따르면 씌여진 해는 그보다 앞선 1948년이다. 그 시기는 감격적인 해방을 맞았지만 140여개의 정치단체가 난립하고 좌익과 우익이 싸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극도의 혼란이 나라를 뒤덮고 있을 때였다. 정완영 시인은 그런 조국이 너무나 안타깝고 슬퍼서 정석모 시인과 그런 마음을 담은 시를 써서 서로 나누어보고 울분을 토로하곤 했다고 한다. 요즈음 조국의 혼돈되고 분열된 모습을 보니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처럼만 여위느냐" 하는 결구가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 52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이수복 (1924 - 1986 ) 「봄비」전문
 
봄비가 내리니 그동안 한국을 덮고 있던 폭설, 황사, 탄핵정국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비로소 진정한 봄을 맞은 것 같다. 눈을 맵게 하던 탁한 바람도 맑아지고 땅은 촉촉하다. 나무도 이제 더운 피가 돌아 새 잎을 티우고 꽃을 피우것다. 이 비 그치면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 53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학교도 못 다녔으면서/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 주더니/왜 가 버렸는지 몰라/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여름 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정성껏 삼을 삼더니/동지 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달그랑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왜 바람처럼 가 버렸는지 몰라/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한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방직 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용산 역전 밤 열한시 반/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이시영(1949 -    ) 「정님이」전문

 이시영 시인의 작품은 이처럼 담백한 서술로 말하듯이 씌여진 시들이 많다. 쉽지만 가볍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정님이'는  차범석 원로 극작가가 팔순기념으로 펴낸 책 <옥단어>의 '옥단이'나 공지영 소설가가 쓴 '봉순이 언니'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배고픈 시절을 보내면서 우리가 돌보주지 못했던 가여운 영혼들에 대한 참회록이자 진혹곡이다. '정님이'에 대한 연민은 어쩌면 우리들의 누나, 어머니, 더 나아가서는 우리들 자신에 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 54

나는 
오늘 
목적지까지 
걸어가기로 작정하고 
동전 오백 원짜리로 
복권 한 장을 샀다 
그리고 그 복권 등을 시원하게 시원하게 
긁어 주었다 
다리가 아프다 
 
   이선관 (1942 -  ) 「다리가 아프다」전문

 이선관 시인은 어릴 적에 백일해를 심하게 앓고난 후 편하지 않는 몸을 갖게 되었다. 신경림 시인은 그의 저서 <시인을 찾아서 2>에서 이 시인이 "시를 통하여 세상의 불구를 바로잡고 있다"고 했다. 
위 시는 불구이고 아내 없이 아이 둘을 키운 시인에 대해 조금 알고나서 읽으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불편한 몸이고 복권을 사고나면 먼 길을 걸어야하는 주머니 사정을 가졌으며 다리 주물러줄 사람도 없는 사람이 복권을 산 것이다. 그가 잠깐 동안 가졌을 꿈과 좌절이 안스럽다. 하지만 화자는 복권의 등을 시원하게 시원하게 긁어준 것에 만족하고 아픈 발을 견뎌냈으리라.


*** 55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리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릴 때 그리워 
피ㄹ 닐리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人?)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리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피ㄹ 닐리리. 

   한하운 (1920 - 1975) 「보리피리」전문 

보리잎에 홍어애를 넣고 끓인 된장국을 먹다가 이 시를 떠올렸다. 보리고개란 말이 있듯 그 허기진 시간을 견디던 옛 사람들에게 보리는 생명의 소식이기도 하고 또 지독한 한의 상징이 되기도 했으리라.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또 다른 시 「전라도 길 - 소록도로 가는 길」에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이란 구절이 보리피리 소리와 함께 팍팍하고 서럽게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