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풀과 물과 꽃의 이야기를 통해 본 삶의 궤적들
           -문학세계 16호에 수록된 시를 중심으로-              

풀이 말하는 두 이야기
어디에서나 흔하게 자라는 풀, 그 풀들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하고 일상작인 이야기일 것이다. 늘 낮은 모습으로 순박하게 우리 주변에 무리 지어 사는 이 풀들은 우리가 가장 가까이에서 두고 볼 수 있는 자연 생태의 한 모습으로,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들의 생과 너무도 흡사한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되새겨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땅 위에서 늘 소박한 자세로 살아가는 그들의 생태가 마치 이 땅 위에서 그들처럼 순박하게 살아가는 우리 민중들의 모습과도 너무 흡사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민초(民草)라고도 하지 않는가.
먼저 곽상희 시인은 ‘풀의 말’ 을 통해서 풀들이 지혜롭게 자연에 순응 적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생을 비춰 보고 자신의 삶도 그러리란 기대와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얽혀 있는 뿌리를 보고, 자신도 그들처럼 한 줄기의 풀 뿌리를 자신의 심장에 내리고 싶다는 일종의 자연에 대한 친화와 순응과 ,그리고, 자신의 미래의 삶에 대한 굳은 의지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느닷없이 오는 천둥소리에도
까닥 않고
대못 같이 내리 꽂히는 비바람도
저만치 서성이면

불행이란 모든 이름의 세상일들이
제풀로 고개 꺾이어 사르르 4월 햇빛처럼 흐른다

풀들은
가슴 맞대어 깊게 깊게 뿌리로 내려간다

네 뿌리 한 줄기 내 심장으로 뿌리내린다
   곽 상희 ‘풀의 말’의 일부(,<문학세계 >16호, 2004년 겨울호에서

시인은 풀들의 곁에 앉아서 그들이 몸짓으로 말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들의 생을 비춰 보고 자신의 생을 가늠해 본다.
풀들은 느닷없는 천둥소리에도 까닥 않고 대못같이 박히는 비바람도 이겨내고 나면, 끝내는 바람도 저만치서 서성이고, 제풀에 꺾인 풀들도 사르르 4월의 햇빛처럼 흐르는 것처럼, 자신도 자신의 생에 나타나는 ‘불행이란 모든 이름의
세상일들’에 결코 좌절하거나 거역하지 않고, 오직 순응과 적응이란 자세로 하나의 운명처럼 받아드리고 나면, 이러한 시련도 결국은 모두가 제풀에 꺾이어 4월의 햇빛에 잔물결 치는 것처럼, 자신도 안식과 평화를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
다. 이 얼마나 자연스런 순응이고 합당한 이치인가?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순응이라는 일종의 유유자적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풀들의 그 질기고 질긴 생명력과 함께 서로 가슴 맞대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모습도 보고, 자신도 그들처럼 자신의 심장에 한 줄기 사랑의 뿌리 내리기를 한다, 이는 순응이라는 생존에만 머물지 않고.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의지적 세계와 자연친화를 통한 사랑의 정신을 붙들고 살아가려는 정신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시인은 자연에 대한 깊은 관조의 사색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보다 가치 있는 생명과 바른 삶으로 이끌어 가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풀들의 이야기가 개인적인 사색의 세계에만 머물지 않고, 시간적 공간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그 모습이 확대되어 표현되는 세계를 볼 수 있다. 박 영숙의 ‘풀잎’이 그렇다. 이는 개인의 생각보다는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삶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해서, 시인 자신의 생존과 삶에 대한 개인적인 세계와 함께 민족이나 국가사회가 붙들고 가야 하는 하나의 집단의식이나 민족 의식이 표현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먼 태고 적부터 대지 위에서 끊임없이 피고지는 그들의 끈질긴 삶의 모습을 통해서,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나 민족이나 국가의 흥망성쇠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조명하여, 우리들의 삶을 하나의 민족혼이나 역사의식으로 표현하려는 교훈적인 주제가 나타나고 있는 셈이기도 한다.

(2)
키를 넘는 쑥대밭
오만 가지 풀은 기계로
깎아도 밀어내도
자라난다.
반드시 하늘을 보고
발돋움하며.

(7)
철강에 눌려서
죽은 줄 알았던 풀,
소리도 없이
땅 위로 고개 드는
‘울지도 않고 일어 서리라’
풀잎은 말한다.

(8)
집주인 한 사람을 위하여

수천 수만, 바다의 모래알만치
헤아릴 수 없는 풀잎….
결코 나무가 아닌 줄기가
연한 풀잎……엎드렸던
분한 마음, 분통이 터지며 일어섰다

(11)
눈물도 없이 지켜보리라
사람을 위하여 눌려서 묻혔던
성난 풀잎… 불씨가 되어
서슬이 시퍼렇게 타오른다. 빈 집터에서.
  박 영숙 ‘풀잎’의 일부 <문학세계 >16호, 2004년 겨울호에서

우선 기계나 철강이 의미하는 인간의 자연 지배의 의지나 그 어떤 부당한 억압에도 결코 꺾이지 않는 풀들의 끈질긴 의지의 세계를 표현해서 자연의 절대성이 표현되고 있고, 더욱이나 ‘울지도 않고 일어서리’란 풀들의 말은 자연의 불멸의 의지 세계와 선한 순종의 순리가 표현된 것이고, 다시 일어선 그들은 ‘반드시 하늘을 향해 발돋움’ 한다는 표현으로 자연은 늘 하늘을 향해 바르게만 존재한다는 자연의 선한 섭리와 함께, 이를 닮아 바르게 살아가려는 우리들의 삶에 대한 바른 자세가 역시 의지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빈 집터에서 건물이 세워졌다가 헐리었다가 하는 것 같은 우리들의 역사 속에서, 철광과 기계와 같은 침략자나 독재자에 의해 억압당하고 희생되는 민중의 모습도 볼 수 있고, 가뭄이나 홍수로 황폐해진 싯누런 대지도 보이고, 또한 분통을 터뜨리며 힘있게 일어서는 분노한 민초들의 항쟁의 함성소리도 들을 수 있다. 이는 결국 성난 풀잎들을 통해서 그들의 패망과 분노와 건설과 재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연의 끊임없는 순환의 섭리일 수도 있고, 이는 우리들이 힘들게 살아온 우리의 역사적 모습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러한 대지를 바라보며 ‘눈물도 없이 지켜보리라 ‘ 하고 미래의 삶에 대한 굳은 결의를 나타낸다.
재난이나 고통이 더욱 혹독하면 할수록 더욱 꺾이지 않고,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도 다시 불씨로 살아나 서슬이 시퍼렇게 치솟아 오르겠다고 다짐한다.
결국 시인은 대지 위에서 끈질기게 살아가는 그들처럼, 우리도 불굴의 의지로 이 땅 위에 우리의 삶이나 민족혼을 영원히 이어가야 한다는 미래의 삶에 대한 굳은 결의를 상징적이고 극히 교훈적으로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근원인 물의 이야기
다음은 김 행자의 ‘떠다니는 섬’과 한 혜영의 ‘고장 난 가족’으로, 이 두 작품은 우리들의 생명과 삶의 근원이 되는 물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의 삶을 보다 가치 있고 여유로운 세계로 떠 밭치고 있는 물이 상징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물의 이야기는 어쩌면 앞서의 풀의 이야기보다 먼저 이야기되어야 할 성질의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물은 우리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또한 우리의 삶 속에 가장 귀하게 흐르고 있는 하나의 사랑이라고 하는 강물 같은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우리의 삶을 떠 받치고 있는 것은 바다와 같은 물이고, 바쁜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서 늘상 움직이고 있는 나무나 바람이나 하늘 같은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힘든 생활이 더욱 즐거울 수 있다고 말하고, 그것은 바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강물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시인은 주변에서 살아 움직이는 자연, 하늘 바람 나무들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고, 또한 지친 우리들의 숨통을 틔워 주는 것은 틀기만 하면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라고 느끼고, 그 사랑이라고 하는 물이 넘쳐날 때 비로소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평화로움과 안식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시인은 살아 있는 생명의 가치와 우리의 삶을 보다 밝고 아름답게 떠받치고 있는 것은 물과 같이 흐르고 있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어서, 이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고, 사람의 사는 이치도 물의 이치와 같아야 한다는 노자의 자연친화 사상과 같은 생각을 나타내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디 흐르는 것이 물 뿐이랴 귀청 떨어지게 앵앵거리는 앰불런스 가라앉는 섬 하나를 건지기 위해 미친 듯이 질주한다
…막 들어온 전동차에 허둥지둥 몸을 구겨 넣으며 더 나을 것도 없는 오늘 하루가 제발 마지막 출근길이 아니기를… 기원한다
…허리 펴고 바라보는 먼 산이 괜히 더 아득해 지는 날, 그래도 흔들리는 나뭇잎들은 아름다웠다

물방울처럼 투명한 공기 속에 뿌리박고 찰랑이는 하늘 연못 속에 지느러미 헹구는 키 큰 나무들, 저희들끼리 손사래 치며 속살거리다 참빗 든 바람 지날 적마다 은빛 머리채 들이댄다. 그래 너희들이었어.
조인 숨통 틔워주는 건 틀기만 하면 쏟아져주는 고마운 물, 지친 섬들을 고요한 바다에 쉬게 한 것은 그 섬을 풀어 안은 착한 물이었어. 그리운 어머니 자궁 속처럼 포근한
김 행자 ‘떠다니는 섬’ 일부<문학세계 >16호, 2004년 겨울호에서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 매일같이 순간순간 아찔한 위태로움을 느끼면서 살지만, 그래도 먼 산에 시선을 주고, 흔들리는 나뭇잎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 수도 있다는 것이고, 그에게 늘 위안이 되는 주변의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근원은 바로 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래 너희들이었어’ 하고 이를 새삼 깨닫고 이들의 실상은 그들 사이를 흐르고 있는 물, 바로 강물과 같은 사랑의 물줄기들 이라고 생각하고 안도의 숨을 쉬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불안하면 흔히 신을 찾거나 어쩔줄 몰라 하지만, 시인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자연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 세상과 우리를 감싸서 보호하고 있는 것은 바로 바다와 같은 물이라고, 그래서 결국 세상을 떠 받치고 있는 것은 모두가 물이라는 자연의 경이로움이고, 그것이 바로 자연 속에 흐르고 있는 순수한 사랑의 세계이기도 하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다.
주부의 바쁜 일상 생활 속에서도 먼 산을 바라보며 살아 움직이는 생물들 속에서, 물처럼 흐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세계를 마음 속 깊이 느끼는, 무척 감미롭고 포근한 안식의 세계를 시인 특유의 맑은 정서로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물이나 바람 같은 자연의 흐름을 생명과 사랑이라는 흐름으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다음도 역시 물의 사랑에 대한 상징성을 밝힌 이야기로, 앞서의 이야기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느끼는 자연친화적인 것에 비해, 다음에 나타나는 한 혜영의 ‘고장 난 가족’에서는 이러한 물의 애정에 대한 상징성을 우리의 현실 생활 속으로 끌어드려 가족간의 애정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이야기다
가정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간의 사랑인데, 이러한 사랑이 메말라서 문제가 된 가정을 두고 수도가 고장 난 것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마치 사랑이란 것을 수도꼭지와 물이라고 하는 상징적 사물로 바꾸어 표현한 점이 극히 해학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일찍 귀가한 김씨는 아들 앞에 물통처럼
퍼질러앉아 말을 받아내려 한다 아들의
말은 내장 깊은 곳에서 쿨럭쿨럭 물 소리
조금 내다가 끝내 올라오지 못하고 만다
설마 목을 추길 물이야 없겠는가
슬쩍만 건드려도 쫑알쫑알 말을 쏟아내는
꼭지 하나가 더 있다고 믿었던 딸년의
수도꼭지는 그러나 녹을 먹고 고장 중이다
<중략>
깜빡 밝아져서 들여다 본 아내, 오래된
항아리 바닥은 예상외로 깊고 어둡다.
…비음으로 잠시 웅웅거리는 늙은 항아리
…고장 난 가장의 수도 꼭지에서는 염분도
매우 높은 외로움이 톡, 툭, 톡, 샌다.
  한 헤영 ‘고장 난 가족’ 일부(문학세계. 2004년 겨울)

이 가정의 가장은 일찍 귀가하여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지만, 두 자녀의 수도 꼭지가 고장이 나 있어, 두 자녀와의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어 있다. 이것은 이미 애정이 메말라 있는 것을 표현하고 있고, 그래도 가장은 비상시를 대비해서 마련된 물독이란 게 있듯이, 그래도 아내란 좀 다르리란 기대를 해보지만, 결국 아내의 물독 역시 물이 동나 있기는 마찬가지다. 아내의 항아리 역시 늙어서 바닥이 깊어 어둡고 비음으로만 잠시 웅웅거리다 말뿐이다. 따라서 그의 모든 가족은 이미 사랑이 메말라 있고, 그의 가정은 이미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가장의 수도 역시 꼭지에서 몇 방울의 물만이 위험 수치가 꽤 높은 외로움으로 톡, 톡, 톡, 새어 나올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모든 가족에게서 풍족하게 흘러나와야 할 애정의 강물이 메말라서. 대화가 단절된 화목하지 못한 한 가정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느데, 이는 현대 가정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인 애정 결핍의 문제를 물의 이야기로 바꾸어 표현한 셈이다.
수도 꼭지의 고장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물이 콸콸 쏟아지리라는 경쾌한 느낌을 연상케 하는 점이나, 아내를 상징하는 물독이라고 하는 언어에 대한 표현 등이 극히 감각적으로 우리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생의 아픈 상처에 대한 삶의 궤적
다음은 앞서의 사랑을 통한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의지의 세계를 표현한 것과는 달리, 자바시장이라고 하는 실제 삶의 현장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생의 아픔과, 지나간 삶이 남긴 궤적에서 느끼는 회한의 슬픔을 보여주는 배 정웅 시인의 ‘자바시장의 비둘기’ 와 ‘어린 화가’를 들 수 있다
‘자바시장의 비둘기’는 풍족한 먹이 때문에 사람 곁에서 살아가야 하는 비둘기들의 슬픈 모습과 함께, 이방의 도시에서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이민 노동자들의 힘들고 슬픈 삶의 모습을 나타낸ㅊ것이라 할 수 있다.

로스앤젤레스 소재 자바시징에는
수시로 빠알간 외다리 비둘기들이 모여 운다
봉제공들이 먹다 버린 음식 찌꺼기를
부리로 쪼면서도 구구르르 눈물 흘리며 운다

눈이 시원해서 더욱 슬픈 아즈텍 아가씨들

미싱노동으로 무거워진 다리 절뚝이며
주인 몰래 비둘기 울음보다 더 나직이 흐느낀다
독수리 날개를 단 비행기 한 대 비둘기떼 위에 떠서
멕시코만 쪽으로 궤적을 긋고 있다
                                                      배 정웅 ‘자바 시장의 비둘기’ 일부 <문학세계 >16호, 2004년 겨울

천사의 도시라고 하는 로스앤젤레스 한 복판인 자바시장에는 원래 천사의 도시에서나 평화롭게 살아야 할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들이 이방인들 틈에 끼어서 함께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날카로운 나이론 실에 다리를 잘린 채 새빨간 외다리로 구구르르 눈물들을 흘리며 운다.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이방인 아즈텍 아가씨들도 미싱일에 무거워진 다리를 절뚝이며 비둘기보다 더 구슬프게 흐느낀다. 이방인의 생의 아픔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서글픈 모습이다.
이는 바로 현대 문명이라고 하는 이기(利機)가 더러는 흉기로도 나타나는 문명의 이중적 모순을 표현하기도 한다. 보다 좋은 먹이를 찾아온 비둘기나 물질의 풍요를 찾아 온 아즈덱 아가씨들도 모두 함께, 힘들고 아픈 이민의 삶을 살아간다.
이는 이민 노동자들의 힘든 삶을 육체적 아픔으로 직설적으로 표현하여, 우리 이민자들 모두의 아픔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기계와 생물, 꿈과 현실, 이국과 고국, 비둘기와 독수리 비행기는 결국 모두 이중적으로 그 문명의 혜택과 함께 피해를 상징하고 있는 셈이고, 이로 인해 이민자들의 아픔이나 상처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독수리 비행기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문명의 상징물이어서, 하늘에 남긴 궤적은 문명 스스로가 남긴 궤적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현실과 꿈, 그리고 고국과 이국, 그리고 향수를 남기고 가는 일종의 우리의 삶에 대한 궤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에 대한 궤적 그리기는 그의 또 다른 한 편의 시인 ‘어린 화가’ 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어린 화가의 손길을 통한 궤적 지우기를 통해서, 그 지워져 가는 궤적 속에서 자신이 살아온 생에 대한 생각이 깊어져서 가슴의 아픔이 더욱 생생하게 느낀다는 일종의 지난 삶에 대한 궤적 읽기가 표현된다.
시인의 어린 딸아이가 시인의 흰 머리를 보고 슬픔을 느끼고, 아버지가 좀더 젊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로 그의 흰 머리에 염색을 한다.  이는 지난 삶을 지우면서 젊음 이라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어서, 시인은 자신의 딸 아이는 화가 이고 자신의 머리는 캔버스라고 표현한다.

아비가 걸어온 가난한 연륜과 방황의 길을
열심히 지우고 지우고
어찌 어찌 젊게도 표현해 보려는 어린 화가의 기도와 슬픔

고사리 작은 손 내 등고선 위에서
짐짓 흔들리고 짐짓 울먹이는 듯한 유년
아아 산다는 것은
머릿발이 어떤 그리움으로 빛 바래어지는
더불어 생의 빛깔 바래어져
처음으로 생각이 슬프게 깊어지는 일인 것을  
   배 정웅 ‘어린 화가’의 일부<문학세계. 2004년 겨울>

시인은 자신의 머리에 또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가는 딸 아이의 손 끝에 이는 슬픔과 기도를 생각하면서, 모처럼 산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는 슬픔을 느낀다. 머리에서는 빛 바랜 지난 삶의 궤적이 지워져 가지만, 시인의 가슴 속에는 그 궤적들이 더욱 선명하게 살아나서 그는 서글픔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움에 머릿발이 바래지는 것은 생의 빛깔이 바래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를 새삼스럽게 인생이라고 하는 산다는 것에 대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바로 그의 머리 위에 그려진 지난 생의 궤적에 대한 회한의 뼈아픈 슬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꽃의 죽음과 음울이 남긴 삶의 궤적
다음은 생의 한 극점이라 할 수 있는 죽음과 함께 그 음울한 꽃의 우련(憂憐)을 통해서 자신의 생과 영혼의 모습을 가늠해 보는 죽음과 삶에 대한 궤적이 눈길을 끈다.  장 태숙의 ‘꽃의 장례’와 ‘자카린다’가 바로 그것이다
꽃의 참된 의미를 꽃이 현란하게 만개한 모습이 아닌, 생을 마감하고 한낱 주검으로 떨어져 내린 꽃잎이나 보도 위에 수북이 떨어져 내린 자카린다 꽃잎들의 잔상을 통해서, 그들의 생의 참 모습을 보게 되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참된 삶의 모습과 생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나는 것이 바로 스페인의 대표적 근대 문학자인 우나모노(Unamuno Y Jugo 1864-1936)가 일찍이 그의 대표적 저서인 <생의 비극적 의미 >에서  “합리작인 것은 모두 비생명적인 것이다.” 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생명적인 것은 비합리적이란 말일 것이다. 결국 생명적인 것은 모두가 유동적이고 제각기 의지적이어서 그들의 참된 모습을 객관적으로 살피기가 힘들기 때문이란 표현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그처럼 죽어서 떨어져 있는 꽃잎들의 모습을 통해 꽃의 마성과 아름다움과 함께 그들의 생의 의미를 살피는 것이, 보다 그들이 살아온 처절한 생의 아픔이나 진실된 참 모습을 꿰뚫어 볼 수 있고, 자신의 생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리란 기대에서 일 것이다.
먼저 ‘꽃의 죽음’ 에서 시인은 생을 마감하고 떨어져 죽은 꽃잎을 통해서, 그들의 현란했던, 그러나 이제 한낱 바람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 같은 생의 의미를 살피고, 아울러 자신의 삶과 함께 자신의 참된 영혼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 사르르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탁, 소리가 펄럭였다 공기를 흔드는 마지막 저항,
가슴 깊숙이 꽂힌 칼날 뽑아내 스스로 목을 치듯, 선명하게 가실 바닥으로 투신하는
바싹 마른 양란 꽃의 얼굴들

물기 하나 없는 맑은 영혼이 날아갈 듯 가볍다. 색깔을 지니는 것조차 욕심이었을까?
버리고 나니 이토록 가벼워지는 육신, 곧 바스라질 듯 가냘픈 너의 퇴색한 우주, 적막 그늘에서
싸르르 통증을 일으키는 내 청춘이 바래가고 바람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한 생애, 풍장으로
보내고 싶다. 맨발의 내 영혼
                                        장태숙 ‘꽃의 장례’의 일부『 문학세계』2004년 겨울호에서

꽃의 죽음이 투신이란 말처럼 날카롭고 냉기까지 감도는 언어들로 무섭게 표현되고 있어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여기에서 꽃의 죽음은 패망이나 좌절이 아닌 스스로 목을 치는 의지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꽃의 죽음은 차라리 장렬하다. 이처럼 죽음이 지나치게 참혹하고 숙연하게 표현되고 있는 점은 그만큼 생이란 것이 처절하다는 느낌을 주기 위한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긴장감은 꽃이 한 때 자신이 우주리라고 느끼고, 세찬 격랑과 탱탱한 희망들, 그리고 핏줄 속의 불티가 들끓듯 일어서 긴 꽃대 끝까지 올렸던 그 현란한 시간이나, 꽃잎에 주름 앉고 생이 이승을 빠져나갈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팽팽하게 이어간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삶을 힘있게 붙들고 살아온 그들의 생생한 생의 모습이지만, 이는 시인 자신이 붙들고 살아온 생의 모습일 수도 있고, 숨이 딱 멈출 때까지 붙들고 살아가려는 삶에 대한 끈질긴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곧바로 꽃의 죽음 앞에서 느끼던 소름 끼치는 싸늘한 냉기에서 벗어나, 창백하고 가볍게 떨어져 놓여 있는 꽃의 시신을 통해서, 조용히 자신의 생의 무게도 가늠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꽃이 지녔던 그 고운 빛깔들도 향기도 결국은 부질없는 것처럼, 자신의 소망들도 모두가 부질없는 욕망일 거라는 허무함을 가슴 깊이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바스러질 듯 가냘프게 퇴색한 꽃의 우주를 보고 아픔을 느낀다. 자신의 생에 대한 아픔이다. 그래서 바래가는 자신 스스로의 생애도 결국은 하나의 꽃잎처럼 ‘바람의 손바닥에 올려놓는 한 생애’와 ‘맨발의 영혼’ 일 뿐이라고 느낀다. 이 얼마나 허무한 아픔인가, 그래서 그는 서슴없이 자신의 생은 한 줌의 재를 바람에 날려 보내는 풍장이어야 한다고 말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풍장은 결국 자연의 숨결인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허무의 세계다. 허무는 인생의 끝인 인생무상의 허무적멸(虛無寂滅)이고 공(空)의 세계다. 불합리한 인생의 형체가 사라지고 순수 자연이나 순수 무구인 불멸의 무형의 세계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시인이 생이나 죽음에 대한 아픔을 거역하지 않고, 꽃잎 지듯이 자연에 순응하려는 자연친화와 심미적인 아름다운 마음의 자세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이 시의 세계가 더욱 다행스러운 점은 이러한 꽃의 생이나 죽음을 통해서 빠져들기 쉬운 환상이나 몽환의 세계를 기웃거리지 않고. 시인이 자신의 생으로 냉정하게 바로 돌아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아무런 아쉬움이나 거역함이 없이 조용히 풍장이라는 자연에의 귀의나 영원 무구의 세계를 소망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인 자신의 생에 대한 깊은 고뇌와 사색적인 성찰을 통해서 생의 참된 의미를 찾아가는 그의 삶에 대한 바른 자세를 잘 읽을 수가 있다.

다음은 그의 다른 한 편의 시인 ‘자카린다 ‘ 이다.
시인은 여기에서도 앞서와 같이 피 멍울 든 얼굴과 음울의 분수로 서 있는 자카린다 가로수와, 그 보라 빛 꽃잎들이 풀석풀석 몸을 뒤집고 있는 보도 위를 거닐면서 차라리 피빛 보라빛 같은 생의 아픔을 느끼고, 그 울분으로 목대까지 치밀어 오르는 붉은 강물을 본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금은 암울하고 서글픈 보라 빛 색상을 통해서, 힘들고 고통스런 삶의 슬픔이나 아픔을 표현되고 있지만, 시인은 이러한 음울의 슬픔과 고통에서 젖어만 있지않고 곧바로 빠져나와 그 음울의 현실을 차라리 하나의 슬픈 아름다움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늘지고 슬픈 아름다움ㅡ 이 점이 바로 시인의 슬픔과 꽃과 음울이 빚어내는 하나의 우련의 미학인 것이다.
결국 시인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자신과 동족들의 눈물겨운 생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이민생활이라는 힘들고 슬픈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꽃잎들 흩어져 풀석풀석 몸 뒤집고
모란각 냉면 전문집 초록색 한글 간판

푸른 이파리처럼 팔랑거리는 이국의 계단
목 울대 범람한 강물이
꾸역꾸역 바닥을 적신다

독한 위스키 같은 시간들 지나면
여린 발바닥에도 하얀 실뿌리 내릴 거라고
슬픔으로 반죽한 생의 그늘, 여물어질 가라고
터무니 없이 믿는다

보라색 핏물 가득한 보도를 따라
덫에 걸린 메마른 목숨이
받은 기침을 하는 도시의 사타구니에
구걸하는 동족의 모습에
조금 슬프고
내 모습에 더욱 슬픈
로스앤젤레스의 오월
                                               장태숙 ‘자카린다’의 일부 『 문학세계』2004년 겨울호에서

보도 위에 수북이 떨어져 몸을 뒤집고 있는 자카린다의 처절한 생의 잔상을 밟고 시인은 현실이라고 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고통과 슬픔을 육신으로 뼈아프게 느낀다. 그리고 그는 끝내 치밀어 오르는 울분이 목에 차올라 흘러내리는 슬픔이 그의 가슴과 길바닥을 적신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슬픔 속에서도 고통의 붉은 강물을 밟고 있는 자신의 여린 발바닥에 이제 흰 실 뿌리가 내리고, 슬픔으로 반죽한 생의 그늘이 여물어질 것이라고 터무니 없이 믿는다. 이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이 땅에 뿌리를 내릴 것이라는 굳은 신념과 그 결실에 대한 굳은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현실의 아픔이라고 하는 시인의 생의 고통이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동족에게 까지 확대되어 나타난다. 모란각이나 냉면집, 그리고 초록색 간판과 구걸하는 동족이 그렇고, 풀석풀석 몸을 뒤집고 있는 꽃잎들도 슬픔과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다. 어쩌면 초록색 한글 간판이란 힘없는 빛깔도 아직은 연약한 우리들의 상징적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시인이 느끼는 생의 슬픔이나 아픔이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표현되고 있고, 시인이 느끼는 삶에 대한 의지나 미래에 대한 꿈까지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나타나는 점이 더욱 더 이 시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시인은 떨어져 죽은 자카린다의 환상적인 꽃잎들과 음울의 거리에서, 결국 시인은 가슴 깊이 느껴지는 슬픔과 아픔을 차라리 하나의 우련의 아름다움으로 느끼고, 그 속에서 자신과 함께 우리 모두의 미래의 삶에 대한 굳은 의지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삶의 아픔이나 슬픔이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은 그것이 가치 있는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는 진정성(眞情 性)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시를 이루는 것은 언어이고, 이 언어가 서로 잘 조화되어 나타나면 바로 리듬과 내용이 살아나는 좋은 시가 된다는 점과. 그래서 좋은 시는 바로 언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을 떠오르게 하고, 그런 시가 바로 이러한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꽃의 주검에 대한 위의 두 작품을 통해서 이 시인이 팽팽하게 맞들고 가는 두 세계, 다시 말하면 힘든 이민의 삶을 극복해가는 바른 자세와, 이를 언어로 형상화 하려는 미적 추구, 이러한 두 세계가 함께 잘 조화되어 나타나는 이 시인의 가치 있는 삶과 시의 세계를 잘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평론>
        『 문학 세계 』17호에 게재 된 내용

꽃의 이야기를 통해 본 삶의 궤적들
ㅡ 장태숙의 시  꽃의 죽음과 자카린다를 읽고ㅡ
박 영 호  

생의 한 극점이라 할 수 있는 죽음과 함께 그 음울한 꽃의 우련(憂憐)을 통해서 자신의 생과 영혼의 모습을 가늠해 보는 죽음과 삶에 대한 궤적이 눈길을 끈다.  장 태숙의 ‘꽃의 장례’와 ‘자카린다’가 바로 그것이다
꽃의 참된 의미를 꽃이 현란하게 만개한 모습이 아닌, 생을 마감하고 한낱 주검으로 떨어져 내린 꽃잎이나 보도 위에 수북이 떨어져 내린 자카린다 꽃잎들의 잔상을 통해서, 그들의 생의 참 모습을 보게 되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참된 삶의 모습과 생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나는 것이 바로 스페인의 대표적 근대 문학자인 우나모노(Unamuno Y Jugo 1864-1936)가 일찍이 그의 대표적 저서인 <생의 비극적 의미 >에서  “합리작인 것은 모두 비생명적인 것이다.” 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생명적인 것은 비합리적이란 말일 것이다. 결국 생명적인 것은 모두가 유동적이고 제각기 의지적이어서 그들의 참된 모습을 객관적으로 살피기가 힘들기 때문이란 표현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그처럼 죽어서 떨어져 있는 꽃들의 주검을 통해서 그들이 살아온 생의 참 모습과 그 의미를 살피는 것이, 보다 그들이 살아온 처절한 생의 아픔이나 진실된 참 모습을 꿰뚫어 볼 수 있고, 자신의 생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리란 기대에서 일 것이다.

먼저 ‘꽃의 죽음’ 에서 시인은 생을 마감하고 떨어져 죽은 꽃의 주검을 통해서, 그들의 생의 참된 모습을 살피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삶과 함께 자신의 참된 영혼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 사르르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탁, 소리가 펄럭였다 공기를 흔드는 마지막 저항,
가슴 깊숙이 꽂힌 칼날 뽑아내 스스로 목을 치듯, 선명하게 가실 바닥으로 투신하는
바싹 마른 양란 꽃의 얼굴들

물기 하나 없는 맑은 영혼이 날아갈 듯 가볍다. 색깔을 지니는 것조차 욕심이었을까?
버리고 나니 이토록 가벼워지는 육신, 곧 바스라질 듯 가냘픈 너의 퇴색한 우주, 적막 그늘에서
싸르르 통증을 일으키는 내 청춘이 바래가고 바람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한 생애, 풍장으로
보내고 싶다. 맨발의 내 영혼
                                        장태숙 ‘꽃의 장례’의 일부『 문학세계』2004년 겨울호에서

꽃의 죽음이 투신이란 말처럼 날카롭고 냉기까지 감도는 언어들로 무섭게 표현되고 있어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여기에서 꽃의 죽음은 패망이나 좌절이 아닌 스스로 목을 치는 의지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꽃의 죽음은 차라리 장렬하다. 이처럼 죽음이 지나치게 참혹하고 숙연하게 표현되고 있는 점은 그만큼 생이란 것이 처절하다는 느낌을 주기 위한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긴장감은 꽃이 한 때 자신이 우주리라고 느끼고, 세찬 격랑과 탱탱한 희망들, 그리고 핏줄 속의 불티가 들끓듯 일어서 긴 꽃대 끝까지 올렸던 그 현란한 시간이나, 꽃잎에 주름 앉고 생이 이승을 빠져나갈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팽팽하게 이어간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삶을 힘있게 붙들고 살아온 그들의 생생한 생의 모습이지만, 이는 시인 자신이 붙들고 살아온 생의 모습일 수도 있고, 숨이 딱 멈출 때까지 붙들고 살아가려는 삶에 대한 끈질긴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곧바로 꽃의 죽음 앞에서 느끼던 소름 끼치는 싸늘한 냉기에서 벗어나, 창백하고 가볍게 떨어져 놓여 있는 꽃의 시신을 통해서, 조용히 자신의 생의 무게도 가늠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꽃이 지녔던 그 고운 빛깔들도 향기도 결국은 부질없는 것처럼, 자신의 소망들도 모두가 부질없는 욕망일 거라는 허무함을 가슴 깊이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바스러질 듯 가냘프게 퇴색한 꽃의 우주를 보고 아픔을 느낀다. 자신의 생에 대한 아픔이다. 그래서 바래가는 자신 스스로의 생애도 결국은 하나의 꽃잎처럼 ‘바람의 손바닥에 올려놓는 한 생애’와 ‘맨발의 영혼’ 일 뿐이라고 느낀다. 이 얼마나 허무한 아픔인가, 그래서 그는 서슴없이 자신의 생은 한 줌의 재를 바람에 날려 보내는 풍장이어야 한다고 말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풍장은 결국 자연의 숨결인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허무의 세계다. 허무는 인생의 끝인 인생무상의 허무적멸(虛無寂滅)이고 공(空)의 세계다. 불합리한 인생의 형체가 사라지고 순수 자연이나 순수 무구인 불멸의 무형의 세계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시인이 생이나 죽음에 대한 아픔을 거역하지 않고, 꽃잎 지듯이 자연에 순응하려는 자연친화와 심미적인 아름다운 마음의 자세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이 시의 세계가 더욱 다행스러운 점은 이러한 꽃의 생이나 죽음을 통해서 빠져들기 쉬운 환상이나 몽환의 세계를 기웃거리지 않고. 시인이 자신의 생으로 냉정하게 바로 돌아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아무런 아쉬움이나 거역함이 없이 조용히 풍장이라는 자연에의 귀의나 영원 무구의 세계를 소망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인 자신의 생에 대한 깊은 고뇌와 사색적인 성찰을 통해서 생의 참된 의미를 찾아가는 그의 삶에 대한 바른 자세를 잘 읽을 수가 있다.

다음은 그의 다른 한 편의 시인 ‘자카린다 ‘ 이다.
시인은 여기에서도 앞서와 같이 피 멍울 든 얼굴과 음울의 분수로 서 있는 자카린다 가로수와, 그 보라 빛 꽃잎들이 풀석풀석 몸을 뒤집고 있는 보도 위를 거닐면서 차라리 피빛 보라빛 같은 생의 아픔을 느끼고, 그 울분으로 목대까지 치밀어 오르는 붉은 강물을 본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금은 암울하고 서글픈 보라 빛 색상을 통해서, 힘들고 고통스런 삶의 슬픔이나 아픔을 차라리 하나의 슬픈 아름다움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이 시가 암울하지 않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시인의 슬픔과 꽃과 음울이 빚어내는 하나의 우련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시인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자신과 동족들의 눈물겨운 삶의 고통과, 생의 슬픔과, 이민생활이라는 슬픈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표현 하고 있는 셈이다.

꽃잎들 흩어져 풀석풀석 몸 뒤집고
모란각 냉면 전문집 초록색 한글 간판

푸른 이파리처럼 팔랑거리는 이국의 계단
목 울대 범람한 강물이
꾸역꾸역 바닥을 적신다

독한 위스키 같은 시간들 지나면
여린 발바닥에도 하얀 실뿌리 내릴 거라고
슬픔으로 반죽한 생의 그늘, 여물어질 가라고
터무니 없이 믿는다

보라색 핏물 가득한 보도를 따라
덫에 걸린 메마른 목숨이
받은 기침을 하는 도시의 사타구니에
구걸하는 동족의 모습에
조금 슬프고
내 모습에 더욱 슬픈
로스앤젤레스의 오월
                                               장태숙 ‘자카린다’의 일부 『 문학세계』2004년 겨울호에서

보도 위에 수북이 떨어져 몸을 뒤집고 있는 자카린다의 처절한 생의 잔상을 밟고 시인은 현실이라고 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고통과 슬픔을 육신으로 뼈아프게 느낀다. 그리고 그는 끝내 울분이 치밀어 올라 범람한 슬픔의 강물이 꾸역꾸역 길 바닥과 그의 가슴을 적신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슬픔 속에서도 고통의 붉은 강물을 밟고 있는 자신의 여린 발바닥에 이제 흰 실 뿌리가 내리고, 슬픔으로 반죽한 생의 그늘이 여물어질 것이라고 터무니 없이 믿는다. 이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이 땅에 뿌리를 내릴 것이라는 굳은 신념과 그 결실에 대한 굳은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현실의 아픔이라고 하는 시인의 생의 고통이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동족에게 까지 확대되어 나타난다. 모란각이나 냉면집, 그리고 초록색 간판과 구걸하는 동족이 그렇고, 풀석풀석 몸을 뒤집고 있는 꽃잎들도 슬픔과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다. 어쩌면 초록색 한글 간판이란 연약한 빛깔도 아직은 연약한 우리들의 상징적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시인이 느끼는 생의 슬픔이나 아픔이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표현되고 있고, 시인이 느끼는 삶에 대한 의지나 미래에 대한 꿈까지도 우리 모두의 것으로 나타나는 점이 더욱 더 이 시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시인은 떨어져 죽은 자카린다의 환상적인 꽃잎들과 음울의 거리에서, 결국 시인은 가슴 깊이 느껴지는 슬픔과 아픔을 차라리 하나의 우련의 아름다움으로 느끼고, 그 속에서 자신과 함께 우리 모두의 미래의 삶에 대한 굳은 의지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삶의 아픔이나 슬픔이 아름다울 수도 있는 것은 그것이 가치 있는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수 있는 진정성(眞情 性)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시를 이루는 것은 언어이고, 이 언어가 서로 잘 조화되어 나타나면 바로 리듬과 내용이 살아나는 좋은 시가 된다는 점과. 그래서 좋은 시는 바로 언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을 떠오르게 하고, 그런 시가 바로 이러한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꽃의 주검에 대한 위의 두 작품을 통해서 이 시인이 팽팽하게 맞들고 가는 두 세계, 다시 말하면 힘든 이민의 삶을 극복해가는 바른 자세와, 이를 언어로 형상화 하려는 미적 추구, 이러한 두 세계가 함께 잘 조화되어 나타나는 이 시인의 가치 있는 시의 세계를 잘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