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 백선영, 고현혜, 김희현, 김상헌

2005.12.21 06:39

김동찬 조회 수:428 추천:4

*** 46

내리자마자
녹아버릴 것을
그들은 안다


아무리 퍼부어도
휘몰아쳐도
그 어느 산천에 한 자락도
쌓이지 못하는 것을
그들은 안다

(중략)

겁없는 봄눈이 온다

        정양 (1942 -    )  「 봄눈」부분

    한국에 막가는 눈, 겁없는 봄눈이 내렸다. 고속도로가 막히고 나무가 부러지고 집들이 무너졌다. 수천억원의 재산피해와 불편을 끼친 다음에 눈은 멈췄다.  그러나 봄눈 녹듯이 녹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며 봄눈은 녹았다. 두꺼운 눈이불을 덮고 가끔씩 그 무게를 스스로 털어내던 나무가지들은 금세 다시 그 몸을 드러냈다. 겨울은, 눈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질 자신의 운명을 알았기에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내렸는지 모르겠다.
    이 땅에 가득한 많은 갈등과 불화도 이 참에 봄눈 녹듯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 47
            찡-한 냉수를 
      시원스레 마실 수 없는
      불구 
      당신은 뇌신경이 막혀서 
      나는 가슴이 아파서 

      목구멍을 할키고 
      터져 나오려는 외마디 
      뱉어낼 수가 없다 

      심장이 찢기우고 있어 
      비등점을 누르며
      입술을 떤다 
 
                백선영 (1941 -  ) 「비등점」부분

우리 어머니가 오랫동안 병상에 계시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화자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토록 총명하던 환자가 말도 잘 못하고 물도 한 잔 시원하게 못 들이키고 있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기란 쉽지 않다. 사랑하고 있기에 포기가 안 되고 그래서 더욱 답답하다. 환자도, 간호하는 사람도 끓어오르기 직전이다.

*** 48

내 이름은 헤이리
H.A.L.E.Y
그러나 전 제 이름을
중간지점이라 부르죠.

한때 사랑을 해서
저를 낳은 엄마, 아빠
이제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헤어져 살죠.

엄마, 아빠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반으로 나누었지만

살아 있는 저를 자를 수 없어
시간으로 저를 나누었어요.

이만큼은 네 시간
이만큼은 내 시간
그래서 그들은 일주에
한 번씩 그들이 사는 거리의
중간지점인 한 가스 스테이션에
저를 주거나 받거나 하지요
그리고 가스를 넣고
씁쓸히 웃으면서 헤어지죠.

바이
바이
그때 그들은 헤어지기 싫은
연인 같습니다.

나를 태운 아빠 차
가스 스테이션을 미끄러져 나오는데
아직 떠나지 못하고 머믓거리는
엄마의 차가 보입니다.
무엇을 찾는 듯하면서
눈물을 닦는 엄마의 손도...
갑자기 멀쩡하던 내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언젠가 제 친구 샐리가 그랬습니다
"헤이리, 넌 좋겠다. 집도 둘,
엄마도 아빠도 똑같은 장난감도 둘"
나보다 한 살 어린 샐리는
아직 모릅니다.
정말 소중한 건 하나,
하나면 되는 것을...

아빠 차가 프리웨이에 들어서면서
전 제가 꼭 껴안고 자야하는
곰 인형을 엄마 집에 두고 온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입니다.

         고현혜 (1964 - ) 「중간지점 아이」전문

   이 시는 'The Halfway Child'란 제목으로 씌여진 영문시를 작가 스스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고현혜 시인은 1.5세 미국동포다. 1.5세란 초등학교나 중학교 다닐 때 이민을 가 이민 1세대도 아니고 2세대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중간지점 세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고 시인의 작품들은 위 시에서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힘든 싸움을 벌이는 내용이 많다.
  이혼한 부모는 화자인 어린 아이를 일주일씩 교대로 기른다. 아이를 주고받는 장소는 그들이 사는 거리의 중간지점인 한 주유소다. 너무나 공평하고 합리적이다. 그러나 아이의 배가 왜 아픈지,  꼭 껴안고 자야하는 곰인형이 아이에게 있는지 없는지를 그 부모는 알지 못한다. 중간지점은 반쯤 온 길이 아니다.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온 길이다.

*** 49

내 친구 청계천
몸이 많이 아파요
너무나 캄캄해서
햇빛이 그립대요

내 친구 청계천
친구를 기다려요
물장구치던
다정한 친구들을

내 친구 청계천
활짝 웃고 있어요
친구들이 놀러와서
너무나 기쁘대요

       김희현 (서울 남사 초등학교 5학년)  「내 친구 청계천」 전문

    서울 수서 전철역 지하도 벽에 커다란 그림과 함께 붙어있는 시다. '제 1회 Hi Seoul 페스티벌 「내 친구 서울」 어린이 백일장 동시부문 우수상'이란 설명이 함께 있다.
   광교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청계천 복원 공사 현장에서 옛 석축, 교각, 돌바닥 등의 유물들이 맑은 하늘아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광화문과 서울역 구간에 잔디 광장 세개를 조성하고 차도를 줄여 인도를 늘리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도 있다.
   그동안 개발에 밀려 묻혀있던 문화와 환경이 다시 우리의 친구로 돌아오고 있다. 그런 여유를 우리 조국이 되찾을 수 있게 된 사실이 기쁘다.

*** 50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쟈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김상헌 (1570 - 1652) 「가노라 삼각산아」 전문

정완영 선생 댁을 방문했다가 근처 조그만 공원 안에 있는 삼전도비를 보았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을 한 기록을 남겨놓은 비다. 부끄러운 과거도 우리의 역사이므로 그 비를 보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옆에 '삼전도의 수난'이란 이름 아래 커다란 동판이 붙어있는 비석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동판에는 인조가 머리를 땅에 박아 이마에 피를 흘리며 신하의 예를 표하는 그림이 담겨있었다.
당시의 충신 김상헌은 병자호란때 주전론을 주장하고 후일에 청나라로 끌려가면서 위의 시를 남겼다. 그 치욕스런 그림 대신에 이 시를 새겨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완영 원로 시인은 이점을 못내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