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희, 박영희, 박시교, 정찬열, 이조년

2005.12.21 06:47

김동찬 조회 수:440 추천:3

*** 56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은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향기가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이장희 (1900 - 1929) 「봄은 고양이로다」전문

  1924년 《금성》지에 발표된 이장희 시인의 작품이다. 80년 전에 시인이 보았던 봄날은 부드러운 털, 호동그란 눈, 고요히 다문 입, 날카롭게 쭉 뻗은 수염을 가진 고양이로 우리의 눈앞에 아직도 생생하게 앉아 있다. 이 시인은 28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인이 겪었을 극심한 좌절과 고통은 오래 전에 잊혀지고 생기 넘치는 고양이만 그의 시에 남아, 시에 있어서 이미지가 얼마나 유용한 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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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해보았다/한 남자만을 위해/처지는 가슴 일으켜 세우고자 애썼을/아내 생각하자니 왈칵,/눈물이 쏟아져나왔다/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어떤 꿈을 꾸고 있었던가/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피죤 두 방울 떨어뜨렸다/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박영희 (1962 - ) 「아내의 브래지어」전문

내 친구 정문석 시인이 박영희 시인에 대해 이메일을 보내왔다.
   "<열린시학> 시상식 때 소개한 고향 후배 박영희 시인은 1985년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팽이는 서고 싶다>(창비) 등 다수가 있음. 국민학교를 나온 후 상경하여 신문을 팔고 사북 탄광의 막장에서 광원으로 일하면서도 홀로 학업에 열중한 사람이야. 그리고 부산대학에서 '도강'으로 학문에 대한 열정을 달래고 신문기자로 일하다 입북하여 취재하고 보안법 위반으로 7년 넘게 영어의 몸이 된 적 있었지. 그렇다고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깨끗하고 훤한 외모만 보고 상상도 못했던 박 시인의 경력을 다시 옮겨보는 이유는 위의 시에서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빨면서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자책하는 남편의 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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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도 아름드리쯤 되면 사람이다
안으로 생각의 결 다진 것도 그렇고
거느린 그늘이며 바람 그 넉넉한 품 또한.
격으로 치자면 소나무가 되어야 한다
곧고 푸르른 혼 천년을 받치고 서 있는
의연한 조선 선비 닮은 저 산비탈 소나무
함부로 뻗지 않는 가지 끝 소슬한 하늘
무슨 말로 그 깊이 헤아려 섬길 것인가
나무도 아름드리쯤 되면 고고한 사람이다

     박시교 (1945 - ) 「나무에 대하여」전문

볼 것 못 볼 것 다 보고 천년을 산 저 소나무가 사람이 아닐 리 없다. 다만 사람처럼 자신의 생각을 바로바로 내 뱉지 않고 안으로 다져왔을 뿐이다. 그늘과 바람을 거느린 넉넉한 품, 곧고 푸르른 혼으로 소슬한 하늘을 받치고 서있는 그 모습은 의연한 조선의 선비같다. 사람이 얼만큼 성숙하면 아름드리 나무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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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 뒤 햇빛 따스한 오후
3월의 들판에 서면
귀 밝은 사람은 누구나  
초등학교 일 학년 선생님이 된다

여기 저기서 노오란 손을 흔들며
저요, 저요, 선생님 저두요, 소리치는
새싹들의 시새움으로
벌판은 온통 시끌벅쩍한
초등학교 일 학년 교실이다

어디 보자, 오올치 너 쑥 이로구나
가만있자 넌 누구더라
참, 너는 냉이 였지
  
       정찬열 (1947 - ) 「3월 들판에 서면」부분

  정찬열 시인은 미주 동포 2세들에게 한국말과 문화를 가르치는 '남부한국학교' 교장선생님이다. 거의 20년 동안 토요일을 뿌리교육에 바친 그에게는 3월의 비그친 들판에 돋아나는 새싹들도 다 귀여운 초등학교 일학년 어린이들로 보인다. 이 시를 읽으니 귀가 밝아져 새싹들의 "저요, 저요"하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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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냐마난.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 (1269 -1343) 「이화에 월백하고」전문

배꽃에 달빛이 희고 한 밤중에 은하수는 흐르는구나
나뭇가지에 서려있는 봄의 마음을 소쩍새는 알 리 없는데
정 많은 것도 병인가 잠 못 이루겠네.

고려때의 고시조 한 편을 요즘 말로 풀어놓고 감상한다. 봄의 마음이라고 간단하게 바꾸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춘심(春心)'이 제일 해석하기 어렵다. 그 춘심을 소쩍새가 아는지 모르는지 서럽게 울어대는 통에 잠은 더욱 달아났다고 한다.
조지훈 시인에게서 온 시를 고쳐 답시로 보낸 것이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다. 바로 그 「나그네」의 원전이 된 「완화삼」에서도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란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이조년에서 조지훈까지 칠백 년이나 지났지만 달빛은 여전히 다정병 환자에게 심각한 불면증을 유발시키고 있다.
달뜨는 봄밤을 조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