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권대웅, 이의, 강중훈, 이상

2006.01.20 15:01

김동찬 조회 수:472 추천:8

*** 61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1930 - 1969) 「껍데기는 가라」전문

사월은 4.19가 있는 달이고 또한 봄이 만개하는 달이다. 비로소 지난 겨울의 허물을 벗고 향기로운 흙가슴으로부터 새싹이 자라나는 계절이다.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정치적 술수로 당리당략을 꾀하거나 저급한 대중선동을 일삼는 것은 껍데기다. 진정한 사랑, 통일, 민주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게,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 62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처럼 재잘재잘 물소리 풀리고
겨우내 젖었던 이불 담벼락에 털어말리는
정릉산 신흥주택 텃밭길
나보다 오래 산 나무들은 오래 산 힘으로
외유내강 이 봄날을 견디지만
찬밥에 물말아 먹으며 정오의 희망가요를 듣다가
불현 목이 메는 이 봄날을
나는 무엇으로 견뎌야 하는가
새발자국처럼 떨어지는 햇빛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이다가
불현 듯 밖으로 나가
지금은 아이 낳고 잘사는 옛날 애인
새로 봄단장하는 집에
짜장면 배달가고 싶다.
아지랑이 스멀스멀 등 뒤로 피어오르고
대기의 하품소리에 쿵, 억장 무너지는
봄날.

      권대웅 (1962 - ) 「어떤 봄날」전문

토요일 점심때쯤인가 보다. 초등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집에 돌아와 "엄마, 밥줘!"할 것 같다. 겨우내 젖었던 이불을 말리는데 라디오에선 정오의 희망가요가 들린다. 이런 시간을 평화롭게 즐기고만 있도록, 약동하는 봄의 기운이 화자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오죽하면 아이 낳고 잘 사는 옛 애인이 봄단장하고 있는 집에 짜장면 배달갈 생각을 다 했을까. 대기의 하품에 억장이 무너진다는 시인의 과장도 웃으며 넘어가 주고 싶다. 봄이라지 않는가.

***  63

갈꺼야
난 돌아 갈꺼야

앞으로 또 삼년
아니 석 삼년이
지난 후라도
난 돌아 갈꺼야

저 태평양 건너
그리운 처자가 기다리고 있는
미아리로 난 돌아가고 말꺼야

살아서 못 가면 
죽어서라도 갈꺼야

시신이 못 가면
영혼이라도 갈꺼야

돌아가
내 고향 낮으막한 산 기슭
양지바른 곳에
난, 난 묻힐꺼야

     이의 (1942 - 2004) 「망향」전문

이의 시인은 지난 3월 27일 권총강도에게 피격당했다. 그리고 가족과 떨어져 외로움을 참으며 가꾸어오던 아메리칸 드림을 접고 결국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죽음 앞에서 무슨 수사가 더 필요하랴. 그래서 화려한 수식이 없는 그의 시가 오늘은 더욱 명료하게 가슴을 찌른다.  마침내 영혼이라도 돌아가겠다던 고향에 잘 찾아갔으리라 믿고, 삼가 명복을 빈다.


*** 64

노을 하나로
불은 먼 바다
옛날에 왜놈들 노략질 막는다고
봉화가 올랐다지

무자년  그 사월에도
봉화는
도깨비불처럼

사람이 온다고
총성이 온다고
난리 났져!
난리 났져!

그 말이 아직도 익숙해져
먼 바다 노을에도
난리 났져

- 아버지
- 아버지
이발 다 해시민
왕 
저녁 먹읍써

    강중훈 (1941 - ) 「불배」전문

강중훈 시인은 4.3 때 아버지가 이발하러 간다고 나간 후 불귀의 객이 되는 슬픔을 겪었다. 아버지가 살아 돌아올 것 같아 문을 열어 두고 자곤 하던 습관이  <해뜨는 집>이란 펜션을 지어 손님들을 맞게 되었으리라. 나는 작년 여름 우도와 성산포, 그리고 일출봉이 바라보이는 그 펜션의 한 방에서 강 시인의 따뜻한 마음과 풍경에 취해 4박 5일 동안 시를 쓰며 머문 적이 있다. 
평화로운 오조리를 보고 있으면 4.3은 잊혀진 듯 하다. 그러나 그 난리를 겪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선 어떻게 지워질 수가 있겠는가. 먼 바다 노을에도 "난리났져!"를 되새기게 된다.  강 시인의 경우엔 4.3의 한이「오조리의 노래」란 연작시로 엮어져 <한겨레 문학>에 연재되었다. 그의 처녀시집 <오조리, 오조리, 땀꽃마을 오조리야>에는 "4.3으로 희생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더불어 함께 가신 모든 분들의 영전에 삼가 이 시집을 바칩니다."라고 씌여져 있다. 4월이 되어 그 헌사에 담긴 마음으로 그의 시를 읽는다.

*** 65

13인의 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 (1910 - 1939) 「오감도(烏瞰圖):시 제1호」전문

난해시를 예로 들 때 이 시를 먼저 꼽는 사람이 많다. 제목인 '오감도'도 건축용어인 '조감도'를 변형시킨 조어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난해한 시라고 간단하게 말해버리고 싶지 않다. 시는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어를 한국말로 번역하듯이 "13인의 아이는 예수와 열두 제자를 의미한다"는 식으로 시를 한정시키려다보니 자꾸 난해해지는 것이 아닐까. 여러 아이들이 무서워하고 뚫린 길로 도망가고 싶어하는, 이 시 속의 상황을 보면서 시인의 불안한 마음이 현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내 자신에게도 '쉽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