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지나가는 길 모퉁이에 서서 / 석정희


   포도엔 갈색 잎사귀들이 나뒹굴고 있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도 제법 싸늘해진 것 같다.  온 세상을 빨갛고 노랗게 색칠을 해 놓은 것 같더니 한차례의 가을비가 지나고나니 우중충하게 퇴색되어 볼썽사나운 모습이다.  수액의 흐름이 멈춰진 벌판에는 마른 잎을 긁어대는 갈바람 소리만이 나의 귀를 간질이고 있다.  낙엽을 밟으며 좁다란 모퉁이 길을 걷고 있자니 지난날들이 떠오른다.  촉촉한 바람에 연한 움이 돋아나는 봄.  초록으로 짙게 물들어있던 여름.  나에게도 이런 싹이 트고 꽃피고 잎사귀 무성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생각해본다.
   남산 오르막길.  덕수궁 뒷길.  어지간히도 많이 다녔었다.  봄에도, 여름에도 걸었고 가을에도 겨울에도 거닐던 곳들이다.  나는 가을에 걷는 것을 유난히도 좋아했었다.  친구와 함께여도 좋았고 혼자여도 좋았던 곳들이지만 혼자서 걷는 것을 더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우연히 친구들과 동행이 되어 함께 걷게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혼자서 걷게 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혼자 걸을 때는 많은 생각을 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생각이래야 무슨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날들을 떠올리기도 했고 현재의 나를 되새김질을 하거나 막연하나마 미래에 대한 생각 같은 것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지난날들의 생각들이 멀어져가고 있는 이때, 나는 지금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일까.  또 어디를 향하여 걷고 있는 걸까.  한 번도 발걸음을 멈춰본 적은 없는데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를 가고 있었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길이 없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무슨 목적이나 삶의 방향 같은 것을 정해놓고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아가다보면 꿈이라는 게 생기기도 하고 목적 같은 것도 생기며 이를 위한 계획 같은 것도 세워지기도 하겠지만 나에게도 이런 게 있었던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나에게도 꿈이라는 게 있었던가.  목적이나 계획이라는 게 있었던가.  
   생각을 더듬어보면 무언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무엇이던 간에 나에게도 이런 게 있었다는 그 자체가 다행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나에게도 작으나마 목적이라는 게 있었을 테고 계획 같은 것도 있었을 터이니 목적 없는 삶, 이를테면 의미가 전혀 없는 삶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자위라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의미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었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도 금방 답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처해있는 현실과 지난날의 꿈이나 목표 같은 것을 비유해 보려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현실 앞에서는 허망한 웃음만 나오고 있을 뿐이다.
   꿈.  허망한 것일지언정 그런 게 있었을 때는 그래도 기쁨이나 희망이라는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가라앉지 않는 흥분 같은 것으로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던 것 같고.  앞만을 향해 달음질을 쳐도 피로하거나 지칠 것 같지가 않았고 살고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기나 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처해진 현실을 비관하거나 삶 자체를 부정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작도 끝도 분명치 않은 채 현실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사이에 떠돌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럽게 여겨지고 있다고나 할까.  새삼스럽게 삶의 의미 따위를 놓고 안절부절 허둥대고만 있을 처지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나.  이런 내가 해나가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꿈은 꿈만으로 끝날지언정 없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 순간만이라도 희망이라는 걸 갖게 되고 기쁜 마음에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려볼 수도 있으니 이런 것마저도 없다면 얼마나 메마른 삶의 모습이 될까.  그러니 구태여 그런 걸 지워 없애버리려는 노력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꼭 큼지막한 꿈이 아닐지라도 작으나마 그것을 이루어 보겠다는 의지가 생길 것이고 살고 있다는 그 자체에도 무언가 의미부여가 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에게 꿈이라는 게 없어진다면 생물학적인 목숨 이외에 또 다른 무슨 의미가 남아있게 될까.  내가 지금 나 자신에게도 그런 게 있는지의 여부를 스스로 채근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게다.
   가을은 이미 지나쳐 버리려 하고 있다.  옷깃을 들어 올려도 가는 목을 스치는 바람이 스산하다.  몸도 마음도 움츠려드는 이때 어디에든지 떠나보고 싶어진다.  가야할 목적지 같은 것에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냥 뛰쳐나가 발걸음을 옮겨놓는 일만 반복하면 되는 것이다.  지난날과 미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현실이라는 공간을 없애버리고 지난날과 미래를 직접 연결시켜보려는 시도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런 것도 꿈은 꿈이니 없는 것 보다는 낳지 않겠는가.  비록 한갓 몽상으로 마감 될는지는 몰라도 가다보면 무엇인가와 마주치게 되겠지.  갈색으로 물든 벌판이 나올 수도 있겠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숲이 나오기도 하겠지.  물이 빠져나간 바닷가에 몰려드는 물새 떼들과 마주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내가 지금 어디쯤에 와 있으며 어디를 향한 발걸음인지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시작이나 끝이 어디가 되었건 그냥 걷기만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