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묘비엔 무슨 말이 씌여질까

2005.11.23 13:05

정찬열 조회 수:139

            
내가 죽은 다음, 사람들은 내 묘비에 무슨 말을 써 놓을까. 며칠 전 어떤 분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장지에 갔을 때, 그 곳 묘지에 놓인 수많은 묘비를 보면서 문득 떠 오른 생각이다.  
묘비들은 크기가 고만고만하고 내용도 대부분 언제 태어나 언제 묻혔다는 식으로 비슷했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니 거기 쓰여진 몇 줄 글 만으로도 묻힌 사람에 대한 남은 사람들의 지극한 사랑, 또는 죽은 이를 짐작케 하는 특별한 인상을 주는 묘비도 적지 않았다.
묘비는 가족이나 친척 등, 남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기리는 문구를 만들어 놓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드물게는 살아있는 동안 자기의 묘비에 써넣을 말을 미리 정해놓은 경우도 있다.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써 놓는다는 것, 생각해 볼 만한 일이 아닐까.
얼마 전 돌아가신 조병화 시인은 자신의 묘비에 쓸 말을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라고 생전에 준비해 놓았다고 했다. 유명한 극작가 버나드 쇼는 '우물쭈물 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 라는 다소 해학적인, 그러나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말을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으로 남겼다. 영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에서 전 세계인을 울린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은 '생의 마지막 날까지 연기하였다'라는 말을 묘비명에 새기고 싶어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간혹은 평소에 가슴에 담아 두었던, 성서나 불경 등에서 인용된 말이 묘비에 쓰이는 경우도 있다. 천주교 신자로서 '무상을 넘어서'라는 유명한 수상집을 남긴 김홍섭(바오로)판사는 "먼지는 제가 생겨난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그를 주신 천주께로 돌아갈 지니라"라는 말을 묘비명으로 썼다.
사실 많은 경우 자신의 생전에 묘비명을 스스로 만들어 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흔한 일도 아니다. 대부분은 죽은 이와 가까운 사람이 묘비에 알맞은 내용을 새겨놓게 된다.
내가 죽은 다음 사람들은 내 묘비에 어떤 글을 써 줄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그 이름 석자를 평가해 줄 묘비명이 무엇일 될 것인지 궁금하고 두렵다.
내가 만약 돈 욕심만 부리며 평생을 살아오다 죽었다면 내 친구들은 '돈, 돈, 하더니 결국 한 푼도 못 가지고 갔구먼' 하고 묘비에 기록할지도 모른다. 내가 도박을 무척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친구, 화투 한 목 함께 묻었네. 저승에서 즐기게' 이렇게 써넣을지 누가 아는가. 만약 내가 남에게 물 한 대접 베풀지 않은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 바늘 한 쌈 관속에 넣었으니 지옥 가는 길에 한번 찔러 보게나, 피 한 방울 나는가'라는 묘비를 써서 나를 비난할지 또 어떻게 알겠는가.
죽은 다음, 혼이 되어 땅 위에 세워진 내 묘비를 내려다보면서, '진즉 살아있을 때 인생을 한 번쯤 되돌아보고 남아있는 세월이라도 가다듬어 살았더라면' 하고 가슴을 치고 통곡해본들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너무 늦어버린 일이 될 터이니 이를 또 어찌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부름 받는 날엔 누구나 이 세상과 하직하고 하느님 곁으로 떠나가야만 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고 천상병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누구나 이 세상 소풍 끝나면 하늘 나라로 올라가야 한다.
사람은 죽으면 두 번의 심판을 받는다. 한 번은 하느님 앞에서, 또 한 번은 함께 살아온 사람들로부터. 그러기에 저 세상에 가서 하느님께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온 날들을 보고해야 하는 것도 두렵지만,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내 묘비에 어떤 말을 써넣을까 궁금하고 겁나고 두려운 일 일수 밖에.  
          - 2003년 7월 9일자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