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입양아를 위한 상설연락소 설치를

2005.11.23 13:10

정찬열 조회 수:148 추천:2

          
금강산에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John Kim씨 생각이 났다.  4년 전의 일이다. 30살 정도 보이는 청년이 어느 날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나를 찾아왔다. 네 살 때 미국에 입양되어 필라델피아에서 대학을 마치고 석유회사에 근무한다고 했다.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L.A부근에 오면 부모를 만나게 될 어떤 계기라도 있을까 싶어 이곳 지점으로 자원해 왔다고 했다. 3년간 우리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면서 메스콤에 광고도 하고 관계기관을 통해서 알아보는 등 부모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허사였다.
그는 낯선 땅 낯선 사람들 틈에 자라면서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가 몹시도 그리웠고, 보고싶은 마음만큼 어머니를 많이도 원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오죽했으면 자식을 버렸으랴 싶은 생각을 하게되었고, 이젠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울먹거렸다. 한 번 만이라도 '어머니'를 만나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하던 그 큰 눈에 눈물이 그렁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어머니는 우리를 품어 안아줄 마지막 안식처인가. 그래서 병사가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 순간 어머니를 부르는 것일까.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부끄럽지만 우리나라는 고아 수출국으로 이름 난 지 오래다. 지난 1954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크게 늘어난 고아를 위한 입양이 시작된 이래 무려 15만여명이 해외로 입양됐다. 이중 10만명 가량이 미국으로, 약 5만명이 유럽으로 갔다. 작년만 해도 2천 4백여명이 외국 가정에 입양되었으며, 그중 2천명 가까운 숫자가 미국으로 왔다. 아시아에선 중국에 이어 2위를 기록하는 숫자다. 이렇게 우리는 아직도 고아수출국의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피부색이 다른 부모 형제들 사이에서 자라면서 입양아들이 느끼는 정신적 혼란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과 가치관의 혼돈을 극복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방황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잘 자라 성공한 입양아들의 성공한 이야기는 우리를 감격하게 한다. 성공 뒤에 숨어있을 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28살 나이로 미시간주 하원의원에 당선된 훈영 합굿, 워싱턴주 하원의원 신호범, 워싱턴과 플로리다주 하원의원을 지낸 미미 맥엔드류, 유명 사진작가 존 창 맥컬디, 전 USA투데이 칼럼니스트 도티 엔코리,  전 미스 아메리카 수전 스파포드, 킴 메서 킥복싱 월드챔피언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입양아 출신 한인은 수도 없이 많다.
이렇게 성공한 입양아도 있지만 한편으론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마약이나 범죄의 유혹에 빠져 불우한 삶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최근 음주운전 차량에 치어 숨진 40대 한인도 입양아였다. 가족 없이 혼자 살았던 그의 장례를 한인 입양인 협회에서 주관했다.
성공과는 관계없이, 성장한 입양아들은 뿌리를 찾게 된다. 나를 낳아준 분은 누구일까. 내 조국은 지구 어디쯤 에 있는 나라인가. 나를 버린 부모, 나를 내던진 나라에 대한 미움과 한이 사무쳤지만 결국은 그 품을 찾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이 부모를 찾는 길은 너무나 힘들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벌써 오래 전 일이라서 기본 자료가 아예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남의 땅에 입양되어간 그들은 엄연한 내 형제요 내 핏줄이다. 이제 성인이 되어 안타깝게 부모를 찾고있는 저들을 도와주는 일은 우리들의 몫이다. 부모를 찾고자하는 입양아나 자식을 만나고 싶은 부모가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도록, 정부와 민간이 힘을 합하여 해외 입양아를 위한 상설 연락처를 만들면 어떨까. 금강산 남북이산가족 뉴스를 보면서 생각나는 일이다.  
    (2003년 7월 23일 광주매일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