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가던 날

2005.11.23 13:13

정찬열 조회 수:94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장리 2구 장사리마을. 꿈에도 그립던 고향을 찾아가던 날, 월출산은 환한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습니다. 택시를 타면 마을까지 잠깐이면 갈 수 있겠지만 걸어서 가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20리 가까운 추억의 옛길을 걸으며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고향은 어머님의 품속처럼 포근했습니다. 새들은 반갑게 지저귀고, 나무는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를 흔들며 미국에서 돌아온 초로의 신사를 반겨 맞아주었습니다.
추억이 담겨있던 그 들판을, 논두렁과 밭이랑을 거닐었습니다. 앞산과 뒷동산, 그리고 물 때 따라 강물이 들고나던 그 강변도 찾아보았습니다. 고향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출렁이던 강물은 온데 간데 없고 그 자리엔 푸르게 푸르게 모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개펄은 막아 논을 만들고 산은 밭이 되고 여기저기 길이 뚫리고, 마을이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남아있는 것 또한 많았습니다. 어릴 적 올라가 놀던 동네 앞 당산나무, 월출산 너머로 달이 휘엉청 뜨는 날이면 밤이 이슥하도록 앉아 놀았던 뒷등 비석거리. 금간 비석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30년 전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비석 주위에 거름무더기가 쌓여 퇴비냄새가 나는 것까지 옛날 그대로였습니다.
낙안촌 도리촌 같은 동네 이름이랑, 큰골 작은골 강두메 가락끝 같은 귀에 익은 골짜기나 등성이 이름이 그때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어느 해 칠월 칠석. 안개 자욱한 밤에 오손 도손 새도록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무덤이랑 잔디밭도 거기 그대로 있었습니다. 보리모가지 오지게 익어 가는 오월이면, 바람이 불 때 마다 푸르름이 물결처럼 넘실거리던 보리밭. 동네 처녀들이 동백아가씨를 흐드러지게 부르며 넘어가던 그 밭 잔등을 바라보면서 나는 어느새 시골 머스마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삼십 년도 넘은 아득한 옛날이지만,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그곳에 뿌려 두었던 추억을 더듬어보았습니다. 처음엔 희미하던 것들이 차츰 또렷해지더니 마침내 놀라울 만치 생생하게, 마치 비데오를 찍어두었다 꺼내어 보는 것처럼 되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들판에 가득하던 모내기하던 사람들의 노래 소리며 새 쫒던 아이의 고함소리가 들려옵니다. 가을 철, 나락 한 짐을 지게에 지고 숨차게 언덕을 오르던 일,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숨이 컥 막히던 그 순간이 생각납니다. 언덕을 올라와 쉼 바탕에 지게를 받치고 땀을 닦을 때의 그 시원했던 바람, 무거운 짐을 부려 버릴 때의 그 후련함까지도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깡촌, 어두운 밤을 등잔불 하나로 밝히던 시절에 서로 나누고 도우며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 산과 들과 풀과 나무를 벗삼아 살던 순박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서로 믿는 마음, 어울려 살아가는 협동심,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인내, 그리고 세상을 헤쳐나가는 지혜를 말없이 가르쳐준 것이 바로 고향의 산천이요 사람들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나를 지켜준 힘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을 걷다가, 발이 멈추었습니다. 아버님이 누워 계신 산자락 끝까지 걸어온 것입니다. 교육자로서 평생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여기 묻히신 아버지. 맑고도 곧게 푸른 하늘처럼 한 생을 마치신 아버지. 당신이 보여주신 한 생애가 나도 모르게 내 삶의 일부분이 되고 있듯이, 내가 살아가는 모습 하나 하나가 이제 내 아들의 삶 속에 그렇게 스며들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깨닫고 있습니다.      
가슴속에 고향하나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그만큼 따뜻하게 합니다. 그곳에서 위안을 얻고 희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떠나던 날, 월출산은 구름 면사포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나를 환송해주었습니다. 간간히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 2003년 8월 6일자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