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갈비를 보면서 생각나는 일

2005.11.23 13:19

정찬열 조회 수:205 추천:2

                
요즘 이곳 미국도 날씨가 무척 덥다. 더운데 삼계탕이나 먹자는 친구를 따라 식당에 갔는데, 닭갈비를 보자 '계륵(鷄肋)'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알다시피, 계륵이란 유비에게 한중 땅을 내어주고 철군할 때 조조가 했던 말이다. 내겐 그다지 쓸모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버리거나 남 주기엔 아까운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후한서> '수양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버리자니 아깝고, 가지고 있기엔 버거운 물건. 내겐 별 쓸모가 없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주면 요긴한 물건들이 있다. 우리 어릴 땐 모두들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에 형이 입던 옷을 동생이 물려받아 입은 일이 흔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내 교복을 마을 후배에게 물려주었었다. 지금은 사장님이 된 그 동생을 만나면 옛날 이야기를 하며 웃곤 한다. 아슴한 추억 속의 일이다.      
미국에 온 다음, 주말이면 흔히 만나는 풍경이 있다. 골목 입구에 붙어있는 거라지 세일(Garage Sale), 또는 무빙세일(Moving Sale) 표시판 이다. 차고에 보관하던 물건, 이사를 하기 때문에 내게 필요 없는 물건을 헐값에 주겠다는 뜻이다. 아이들 장난감에서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1불에서 5불까지가 보통이고 웬만한 물건도 10불을 넘지 않는다. 말만 잘하면 거저 주는 경우도 있다. 몇 주 전, 나도 제법 쓸만한 사무실 책장을 5불에 사왔다.  
집에서 거라지 세일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주말에 학교 운동장 같은 곳에 스와밑(Swap Meet)이라는 이름의 중고품 시장이 열리기도 한다. 잠깐 살다가 갈 사람은 물론, 현지인도 주말이면 거라지 세일이나 스와밑을 기웃거린다. 고가의 미술품이나 희귀한 책, 또는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싼값에 구하는 횡재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거라지 세일을 하는 미국 할머니로부터 일년동안 입지 않는 옷이나 쓰지 않는 물건들은 한 해에 한 번씩 거라지 세일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면서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몇 년씩 옷장에 걸려있는 내 옷들이 생각나 참 부끄러웠다.
처음엔 거라지 세일을 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지독한 사람들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 소용없어 버려지는 물건들이 필요한 사람에겐 더없이 좋은 선물이 될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사람들의 실용적인 생활태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거라지 세일 같은 것을 한국에서도 실시해 보면 어떨까.
또 있다. 입지 않는 옷이나 쓰지 않는 물건을 모아두면 한 달에 한번씩 자선단체에서 가져간다. 이렇게 수집된 물건들은 세계도처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보내진다. 우리가 힘들 때 미국에서 보내준 구호품도 이런 방법으로 모아진 것이다.
  세계 최강의 나라 미국, 겉으론 사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알뜰하게 절약하고 쓰고 남은 물건은 버리지 않고 나누며 살아가는, 보이지 않는 그런 모습이 미국의 저력이 아닌가 싶다. OECD에 가입하여 선진국 국민임을 자랑하는 한국인이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욕심을 내어 움켜쥐고 있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사용함으로써 제 몫을 하는 물건들. 어디 물건뿐이랴. 내가 붙들고 있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함으로써 더 잘할 수 있는 일도 있고, 그런 자리도 있다. 주어야 할 때 흔쾌히 주는 것이 나도 남도 함께 잘사는 길이다.
나누며 사는 삶은 모두에게 기쁨을 준다. 김치 담근 날, 이웃집에 김치를 돌리며 환하게 웃던 딸아이의 모습, 소매 끝이 다 헤진 내 중학교 교복을 몰려 입고 울먹이던 그 옛날 마을 동생의 얼굴이 생각난다. 거라지 세일에서 단 돈 5불에 비싼 책장을 내 주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미국 할아버지의 모습도 떠오른다.
버릴 때 버릴 줄 아는 사람. 베풀며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이 결국 승리한다. 삼계탕에 들어있는 닭갈비를 보면서 생각나는 일이다.   -2003년 8월 20일자 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