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썩, 신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왜 오늘은 '신문이요'라는 소리가 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복도에 나갔더니 어떤 아주머니가 신문 뭉치를 들고 저만치 빠른 걸음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다. 전에 배달하던 젊은 남학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새로 신문배달을 시작하는 분인가 보다. 그런데 뒷모습이 낯설지 않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숙여 도망치듯 사라지는 그 모습이 어디선가 눈에 익은 모습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우리 학교 김 선생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연한 기회에 그 신문사에 근무하는 사람을 만나 물어봤더니 내 추측이 맞았다.  
김 선생은 2년 전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목사인 남편, 그리고 중학생인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20년 이상 근무를 했으며 우리학교에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이다. 자리를 잡지 못해 애타하더니 신문배달을 시작한 모양이다.
김 선생은 신문 배달을 하기로 작정하면서 행여 아는 사람을 만날까 걱정을 했지 않았을까. 체면 따위야 이미 초월했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겠지만, 하필 내가 있는 사무실 지역 배달을 맡으면서 갈등도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신문이요'라는 말이 목구멍 저 안에서 맴돌다 말았던 모양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30년도 넘은 세월 저편의 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중학을 나와 방황하던 나는 졸업 4년째 되던 해 설날 아침 마침내 학교를 다시 다녀야겠다고 결심했다. 되돌아보면 그 때가 내 생의 한 고비였다. 내 앞길은 내가 만들어 가겠다고 부모님께 큰소리를 치고 광주에 올라왔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우선 스물 한 살이나 먹은 녀석을 신입생으로 받아주는 고등학교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입학시험을 본다해도 붙을 실력이 아니었다. 다행히 K상고 야간에 입학을 허가 받았으나 학비는 물론 먹고 살아갈 일부터 걱정이었다. 그래서 신문배달을 하기로 작정했다.
배달을 처음 시작하는 날, '신문이요'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그렇게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찬열 너 뭐 하는 거야". 나 자신에게 채찍을 내렸다. 그래 좀 더 당당하자. 땀흘려 일하며 학교에 다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인생에 있어서 학교가 몇 년 빠르고 늦고는 대단한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캄캄한 새벽길을 달려 신문을 배달하면서도 신이 났다. 늦었지만 학생이 되었다는 사실, 무언가 희망이 보인다는 생각을 하면 신바람이 저절로 났다. 한 주일에 한 번씩 주간지도 배달했다.    
  몹시도 춥고 눈보라가 치던 어둑어둑한 어느 날 새벽, 도청 앞 금남로 부근을 신문뭉치를 들고 뛰어 가다가 미끈 뒤로 넘어졌다.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일어나 보니 신문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하얗게 눈 쌓인 도로 위로 신문들이 파도처럼 물결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를 회상하면 지금도 가슴이 다 시리다.
신문배달을 처음 시작하는 김 선생의 모습은 스물 한 살 적 바로 내 모습이었다. 신문배달을 했던 경험이 내 인생의 구비 구비에 큰 힘이 되었던 것처럼, 힘든 이민생활을 살아가야 할 김 선생에게도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이민 올 때 뭉칫돈을 가지고 온 사람이야 잃을 게 많겠지만 나처럼 맨손으로 건너온 사람은 잃을 게 없다. 밑질게 없는 신문배달을 하겠다고 결심한 김 선생은 벌써 그것을 통달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쑥스럽지만 머지 않아 모자를 바로 쓰고 큰 소리로 '신문이요' 를 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얻을 것만 남아있는, 밝고 푸른 내일을 생각하며,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신문배달원 김 선생께 뜨거운 성원의 박수를 보낸다.       - 2003년 10월 8일 광주매일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