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DID IT!

2005.11.23 17:04

정찬열 조회 수:17

5년 전, 나는 우연히 스키를 배우게 되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있는 몇 집이 어울려 스키장이 있는 멤모스로 3박 4일 휴가를 갔었다. 집에서 여섯 시간을 운전하여 현장에 도착했더니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고, 동계 올림픽을 치른 곳인 만큼 스키장은 크고 아름다웠다. 스키를 탈 줄 모르는 나는 독서나 하자는 심산으로 책만 잔뜩 가져갔었다.  
다음 날 아침, 모두들 장비를 챙겨 스키 탈 채비를 하면서 자기들만 타는 게 안되었던지 구경만 하겠다는 우리 부부를 데려다 거의 우격다짐으로 스키학교에 등록을 시켰다. 기왕 시작한 것 기껏해야 넘어지기 밖에 더 하겠느냐는 마음으로 참여했더니, 실제로 몇 번 넘어지긴 했지만 그날로 스키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스키라는 게 어렸을 적 방죽에서 대나무 스키나 썰매를 타던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꽁꽁 언 논바닥이나 저수지를 씽씽 누비며 그 시절 우리 꼬맹이들은 또 얼마나 멋지고 신나게 스키를 타고 썰매를 지쳤던가.
그 이후, 나는 왜 해보지도 않고 아예 스키는 못타는 것으로 포기했었던가를 곰곰이 되뇌어 보곤 했다. 시작만 하면 간단히 되는 것을 왜 그렇게 오랫동안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 놓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2년 전, 맘모스 스키장에 다시 갔을 때였다. 가파른 언덕을 스키로 숨가쁘게 내려오다 눈덩이에 걸려 넘어졌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니 저만치 어떤 남자가 한 쪽 다리로 유유히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세상에 외다리로 저렇게 스키를 잘 탈 수 있다니!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보고 또 봐도 틀림없는 외다리였다.
두 다리를 멀쩡히 가진 사람도 타기 어려운 스키를 저렇게 한 다리로 타다니. 저만치 잘 탈 수 있기까지 얼마나 넘어지고 다치고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참 대단한 의지로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었다. 이 세상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는 많은 세계가 있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올 해 집에서 한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스노우서밋 스키장이 개장하여 올라갔다가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되었다. 첫 눈이라서 적설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인공 눈을 덧 뿌려 스키장 컨디션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초보자 코스나 난이도가 중간 정도인 불루 코스에 사람들이 주로 몰리고 블랙 다이아몬드 트렉엔 사람이 드물었다. 블랙다이아몬드 코스는 내려다만 보아도 눈이 어질어질 한 절벽이어서 웬만한 강심장으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걸어서 내려가기도 다리가 떨리는 힘든 코스다.
  몸이 아직 풀리지 않아 나는 가파른 코스를 조심해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 곁을 웬 남자가 앉아서 스키를 타고 쏜살같이 지나치는 것이었다. 아니 어떤 사람이 이 어려운 코스를 앉아서 탈 수 있을까. 잠깐 멈추어 바라보았다. 다리가 없는 사람이 앉은뱅이 썰매와 같은 특수 제작된 스키를 타고 손에 쥔 짧은 막대로 방향을 조절하며 깎아지른 듯 험한 코스를 유유히 내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이 절벽을 스키를 타고 내려가다니!
나는 넋을 잃고 그 사람이 종점에 도달할 때까지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마침내 종점에 도착한 사내가 아스라한 위쪽을 쳐다보는 순간 나는 그 사내를 향해 두 손을 번쩍 들어 힘차게 흔들어 주었다. "YOU DID IT" 산이 쩡쩡 울리도록 큰 소리로 대답 해주었다.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도 내내 그 사내의 모습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인간 능력과 의지의 한계는 어딜까. 두 다리를 잃은 사람도 그처럼 치열하게, 그리고 꿋꿋하고 당당하게 인생을 살아가는데 사지가 멀쩡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갑자기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하늘엔 흰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2003년 12월 3일 광주매일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