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봄아

2006.02.10 20:12

정해정 조회 수:116 추천:1

  새벽 일찍 눈이 떠 질 때가 가끔 있다.
  그런 날 은 걸어서 동네 성당에 새벽 미사에 다녀온다.
  며칠 전 그 날도 그랬다. 사계절이 분명치 않은 이 곳에도 자욱한 새벽 안개로 봄은 오나보다. 한 무리의 작은 새 떼들이 가로수에서 파편처럼 쏟아져 나와 안개 속을 뚫고 하늘로 오른다.
  봄은 곧 생명이요. 생명은 곧 꿈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나무들 가지치기 한 집들이 더러 눈에 뜨인다. 잔 나무 가지를 쳐서 길가에다 쓰레기로 쌓아놓은 어느 집 앞을 지날 때였다.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보니 버려져 있는 나무에는 꽃눈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고 집으로 왔다. 빈 김치 병을 깨끗이 헹구어 넓은 리본으로 묶어주니 꽃병으로는  그럴싸하다. 물 울 담아 나뭇가지를 듬뿍 꽂아 햇빛이 잘 드는 거실 창가에 놓았다.
  며칠 후였다.
  쓰레기 통으로 갈 뻔했던 나뭇가지에서 진분홍색  꽃봉오리가 저마다 시샘이라도 하듯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활짝 웃으면서...
  겨울 눈 속에서 꽃을 피워 봄을 제일 먼저 알린다는 '홍 매화'였다.
  봄이 터진 것이다. 우리 거실에는 금새 봄이 가득해 졌다. 나는 너무 신기하고 반가와 홍 매화 곁을 서성이다가 나뭇가지 사이로 아기 머리카락 보다 더 가는 줄이 보일락 말락  그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뭇가지가 올 때 거미란 놈이 붙어 온 모양이다. 거미를 찾아보니 어디 숨어서 인지, 너무 작아서 인지 보이지 않는다.
  나는 행여 거미줄이 다칠 까봐, 거미란 놈이 놀래 도망 갈까봐 조심조심 홍 매화 꽃망울이 더 편하게 터질 수 있도록 가지를 만져 주었다. 어떤 꽃은 벌서 연두색 이파리를 달고 있는 녀석도 있다.
  우리 집을 방문한 사람들은 "야! 봄이네." 하면서 하나같이 꽃 이파리를 만져본다. 가짜가 세상을 판치고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무리는 아니다.
  봄... 따스하고 보드라운 봄기운은 돌 속에서도 싹을 틔우고 싶은 마음을 넣어준다고 하지 않던가.
  하찮은 것이지만 생명이 있는 저 들은 어떤 환경에서나 최선을 다해 자기의 몫을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자 왠지 부끄러워진다.
  나는 가만히 중얼거린다.   "매화야. 거미야. 그리고 봄아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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