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박세현, 정진규, 김남주, 전봉건

2006.05.16 04:46

김동찬 조회 수:93 추천:9

*** 116

세월아 네월아 시정의 아픈 사내가 시정의 아픈 여자를 데리고 여자는 아가를 누런 아가를 데리고 하염없이 염 없이 고구마를 튀겨 파는데

섬섬 바리시고 네여 도 닦듯 하염없이 튀김 기름 끓는 열반 속에 환한 수련 열 듯 고구마는 솟아오르고
누런 아가는 양털 보풀 이는 싸묵눈길을 간다네 마징가나 은하철도 기름 열반 속 고구마 꽃잎에 뚝뚝 떨어지는 기름처럼 눈발은 잠 속을 녹아

세월아 네월아 하염없이 염 없이 네 가면 병 낫더냐 나을 병 없이도 아픈 시정들이
꺼먹꺼먹 튀겨내는 세월 네월아
아마 너라고 기름 열반을 바랐겠냐마는......

      허수경 (1964 -   ) 「세월아 네월아」 전문

타령조의 반복되는 리듬이 한편 불경을 외는 소리처럼 들린다. 고구마를 집어넣었을 때 기름이 솟구치는 모습을 기름 열반 속에 연꽃이 피어난다고 묘사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열반을 원하지 않았지만 끓는 기름 속에 놓여진 고구마는 병든 튀김장사 부부의 막막한 현실이기도 하다. 종국에 “나을 병 없이도 아픈 시정들”에 이르러서는, 기름열반에 끓고 있는 것이 고구마와 튀김장사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현실이란 사실을 느끼게 된다.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한평생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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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뉴스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초창기 일화다
나는 그 시대에 감히
행복이란 말을 적어넣는다

     박세현 (1953 -   ) 「행복」전문

   “9시 뉴스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카피가 마음을 끈 적이 있다. 세상의 불쾌한 소식들로부터, 그 소란스러움으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뉴스거리가 별로 없었던 그 시대에, 행복이란 말을 박세현 시인은 적어 넣는다. 내 시 이야기도 독자에게 번잡함만 더해주고 있지나 않았는지 염려스럽다.

   오늘 시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시 이야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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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정진규 (1939 -   ) 「연필로 쓰기」 전문

 나의 아버지는 어렸을 적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하면 늘 연필을 깎아서 필통 속에 가지런히 넣어주셨다. 헌 종이 위에 문질러서 연필심의 끝이 너무 날카롭지 않게 만드는 일도 잊지 않으셨다. 아버지도 내 생애가 잘 씌어지길 바라고 또 잘못 씌어진 부분이 있으면 지우개로 잘 지워갈 수 있게 되길 바라셨을까. 무엇보다 향그런 영혼의 냄새를 지니길 바라셨을 게다. 컴퓨터로 이 글을 치면서 너무 쉽게 쓰고 너무 쉽게 지워지는 내 삶, 향기 없는 내 생애를 떠올리니 서글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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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흘 콩밥을 씹다 보면 깨우치리라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순 무식쟁이든
모르는 것 빼놓고 다 아시는 도사든
둘러보아 사방 네 벽 감방에서
갖고 놀 만한 것이라고는 네 자지밖에 없다는 것을

       김남주 (1946 - 1994) 「독거수」 전문

   두 번에 걸쳐 근 십년간을 감방에서 보냈던 투사적 삶이 김남주 시인의 시에도 느껴져 그의 시를 읽다보면 사뭇 비장해질 때가 많다. 그러나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땐 혼자서 실성한 사람처럼 마구 웃었던 적이 있다. 목사님이 거룩한 설교를 하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농담을 던질 때 더 웃게 되는 것과 같이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 시는 한 번 웃고 지나가기에 너무 많은 것을 던져준다. 그가 사방이 벽인 감방에서 외로움을 겪으며 얻었던 것은 내가 알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독재와 체제에 대한 투지보다는 오히려 깊은 허무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독재자나 그에 맞서는 자신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불쌍한 존재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 때 얻은 마음의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그리 빨리 세상을 등진 것은 아니었을까.

*** 120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전봉건 (1928 - 1988) 「피아노」전문

기분 좋은 상상을 한다. 손가락이 긴 젊은 여자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창밖으론 푸른 하늘이 보이고 커튼이 바람에 날리는 방이다. 여자의 머리카락도 날린다. 바람에 바닷냄새가 묻어 있는 걸로 보아 바다가 가깝게 있나 보다. 파도소리도 섞여 들려온다. 여자가 피아노를 칠 때마다 건반에선 싱싱한 생선이 튀어 오른다. 생선의 비늘에 은색의 햇빛이 반짝인다. 
   때론 이런 시가 읽고 싶다. 무뎌진 내 감각을 저 시퍼런 파도의 칼날에 날이 서게 하는 시.